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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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썩 옳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아, 정말 짜증나게 오만한 인간이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한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는 영원히 닿지도 알 수도 없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것은 사람의 물성, 아니, 마음의 본질적 속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뒤집어 까본대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마법같은 일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도 마음만은, 최후의 내실은 그 주인이 문을 열어 환대하지 않는 한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뿐인가, 상대를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로, 그 자체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성을 오롯이 끌어안는다고 여겨지는 사랑(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조차도 결국 나만의 것이 아닌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고 껴안아 심장을 맞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포함한다. 말해지는 마음조차도 온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가질 수 없음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혹은 그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의 소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완전히. 그것이 고통의 시발점인 동시에 사랑의 환상이다.

그러나 사랑은 환상 없이 불붙지 않는다. 이 모순들이 비끼고 부딪히며 고통의 화음을 이룬다. 시간이 흐르고 사그라들 때에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때에도 그것은 사랑인가?

아마도. 그래야만 한다면. 적당한 눈가림이 꼭 기만은 아니듯이, 알지도 못하는 새 서로가 서로를 비껴도는 별들이 꼭 이별은 아니듯이,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짜증을 내며 읽게 되었는가, 혹은 가슴을 두드려가면서도 잊지 못해 도로 집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것 좀 한 마디 해주면 안 되나? 어렵지도 않은 거, 한 번쯤 기다려주고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나? 안다. 이것이 상대의 명징하고 매끄러운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억지라는 것을. 안다. 성숙하지 못한 마음임을.

그러나 사랑은 퇴행이다. 서로에게서 어떤 안식을 찾는 것은 본능적인 퇴행이고 짐승과도 같은 욕구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또한 짐승이기 때문에.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누구도 악하지 않으나 동시에 그 누구도 성숙하지도, 자기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서로가 자기의 영역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애썼기 때문에. 그래서 끔찍하게도 오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아닌가. 합리적이나 합당하지는 않은 동물. 전자는 내면을, 후자는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논리다. 사랑은 관계의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수차례 말한 모순과 고통이 창출된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 물음에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살던 대로 살면 그렇게는 못 한다는 마음이 조금쯤 묻어있는 말이다. 할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 마주하고 끌어안아도 영영 가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삶에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주인공도, 주인공의 기록도, 그의 사랑과 고통과 좌절과 환희와... 그것을 읽는 이들의 마음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배척당한 채로 공존한다. 지고의 합일을 꿈꾸며. 이 슬픈 존재들.

마음껏 아파하고 연민하되 동정하지 말기를. 이름을 밝히지 않을 그 사람을 읽어나가기를. 그림자를 덧그리기를. 이미 떠나간 자리에서 흔적을 더듬어나가기를.

그렇게 오만한 독자가 슬픔에 홀로 남겨지기를 바라며, 먼저 걸어간 망므을 남긴다. 이만, 슬퍼하는 사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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