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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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참담하고 역겨워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래요.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사람을 그렇게 악랄하게 해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대체 얼마나 지독한 마음을 먹으면 그럴 수가 있어.

지금에 와서는, 남의 일이라면, 지어내는 말도 적당히 하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면박이나 들을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구석기나 고대 왕국 시절처러 퍽이나 오래 전도 아니고, 말 안 통하고 낯선 어딘가에서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곳, 사람이 수시로 오가는 곳, 불과 수십 년 전에.

사람이 사람을 끌고가 무릎을 꿇리고,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이고, 태워 죽였다. 산사람을 파묻은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적군이었는가. 흉악무도한 괴물이었는가.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동네서 오가던 이들, 평소처럼 살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손짓 하나로, 때로는 벼락같이 들이쳐 짐짝처럼 끌어갔다.


군인이었대도, 하다못해 최악의 흉악범이래도 이렇게는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군인의 이름으로, 경찰의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으로, 애국이요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애국이며 자유는 없다. 그렇게 이뤄지는 것은 살인, 도살, 그 이상의 값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떳떳하게 불려왔다.

때로는 부역자, 때로는 간첩. 때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상상 속의 적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그마저의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그저 손발 달린 기구와도 같았을 것이다. 죽도록 부려먹다 마침내 죽어버리면 대강 묻어버리는 짐승만도 못한 것. 사람도 존재도 아닌 그저, 것.

그러나 그 자리에서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법은 없다고, 당신들은 대체 누구며 피도 눈물도 없느냐고, 내게도 삶이 있다고, 나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어떻게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대하느냐고 따져묻고 악을 지르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아무런 값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죄 하나 덜자고, 제 몸만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겁먹은 사람들을 산채로 바닷속에 가라앉혔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쇳덩이와 함께 가라앉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죽은 이들의 죄는 단 하나, 믿었다는 것. 안전하게 데려다줄 의무가 있는 사람의 책임을, 국민을 보호할 국가의 책임을, 내가 탄 배가 불시에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그 누구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도 당연한 상식을.

그마저도 잘못이 아니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핑계로 침묵을 강요당한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서 영원한 유죄를 선고받았다.

누군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단 한 명만이라도 목숨을 가진 존재를 이런 식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의 손끝에는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죽은 자 앞에서는. 어쨌거나 죽인 자는 어쩌면 살았고 죽은 자는 돌이킬 바 없이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산 자의 틈에 함께 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자의 죽음이 그러하다. 그들의 흔적은 무엇보다도 많은 말을 한다. 부서진 뼈로,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삭고 바스러진 옷가지와 닳아빠진 신발로, 손발을 옭아맨 아군의 흔적으로.

뼈를 부수고 살점에 박혔을 총탄 자국으로, 뜯어먹힌 살점으로, 잊혀진 기록 한켠의 "불령선인", "불순분자", 혹은 사망자 1. 이 책에서 재구성된 목소리들과 오래된 뼈, 죽은 이의 흔적에서 생의 시간을 찾아내는 이의 기록으로 우리는 믿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숱하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의 이름으로 현재에 도사리고 있는, 고함과 사탕발림으로 뭉뚱그려지는 증오로, 비참으로. 언제고 누군가의 목숨은 값어치가 없다고, 어떤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날만을 기다리는 그것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금,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이는 산 자에게 속삭인다. 나를 보라고, 네가 밟고 선 땅과 네가 마시는 물과 공기에 피와 뼈가 있을 것이라고, 사라질 수 없다고. 죽은 자는 언젠가 살아있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라고.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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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 이문영 장편소설
이문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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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젠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시한 괴담이었을 수도,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할 일이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한동안 그 말이 입에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명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에는 잠결의 입면환각인 줄로만 알았고, 다음엔 단순한 외부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나도 모르는 새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린 결과인지, 아니면 이게 들어서는 안 될 소리인지 한동안 시덥잖은 생각을 했더란다. 증상이 사라진 후 자연스레 잊고 살았으나, 때때로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명, 귀울음이라는 뜻이다. 몸 밖의 소리가 없는데도 무언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들은 것과 다르게 느끼지 않으니 소음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쳐봐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그것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소리의 원인이 바깥이 아닌 안에 있는 탓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기가 곧 소리길인 탓이다.

p.146 서로의 고통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추락이었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길 멈춘 사람이 괴물이 됐다. 괴물은 내 안에 있고, 당신 안에, 우리 안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밖에도 있었다. 지독한 적막으로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짐승의 심장 박동을 들은 것도 같았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에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해서는 안 될 말이 전해지는 경우뿐만 아니라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아야 내가 무사할 수 있기에 그 존재를 알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소리 같은 것들. 슬프게도, 많다. 너무 많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과학보다는 사견에 가까웠겠지만, 사람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울음소리와 비명소리라고, 생존수단인 아기의 울음은 그 두 영역에 걸쳐있어 유난히 잘 들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p.20 날씨나 피로 때문이 아니라 묽거나 묽어질 것들의 몸에 새겨진 시끄러운 표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만히 묽어지면 억울하니까. 조용하면 보려 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으면 없는 줄 아니까.

p.120 질문하는 직업을 가진 자가 질문해야 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답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스스로 국가를 향해 질문하고 있었다. 눈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너는 왜 여기서 묻고 있냐’고 묻는 듯했다. 질문할 권리와, 질문할 책임과, 질문하는 폭력 사이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뿌린 질문들이 어디쯤 굴러다니고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선 의문을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겠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아니라 들려야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지 못해서, 길을 찾지 못해 곪아터지는 말이 속으로 울리는 게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이명은 누구의 울음일까. 누가 누구에게 전하는 비명일까.

유난히 희미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어떤 사람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고 존재는 희미하며 그의 소리는 작디작다. 마치 한 사람 분을 차지할 주제도 못 된다고 누가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는 주로 셋방에, 재개발단지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에, 고분고분하기를 요구받는 곳에, 살려달라는 외침에 수갑과 욕설과 중장비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이 밀려드는 곳에 자리한다.

p.225 평형을 잃은 내가 게워 올린 바닥, 평형 잡는 물조차 채우지 않고 출항한 배가 침몰하며 노출한 바닥, 평형을 잃은 배가 가라앉자 평형이었던 적 없는 국가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바닥, 배는 인양됐지만 뜰채로도 건져지지 않는 찌꺼기들이 여전히 그 바닥에 수북했다.


출발한 것은 모두 어딘가에 도달한다. 울음도, 분노도, 책임도 마찬가지이다. 그 당연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니 갈 곳을 잃은 마음과 존재가 맴돌고 부딪다 결국 곪아버린다.

Listen carefully.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해야 할 일에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작아지고 묽어지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길을 잃고 갇혀버린다. 그러나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금, 일단 출발한 것은 어디엔가는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주워 담긴 이미 늦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요.

p.316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걸쳐 있었다. 차라리 소설이길 바라는 이야기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때가 많았고, 현실은 정말 현실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소설 같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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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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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SF 소설이라니, 이게 무슨 갑각류 대외비공사노동자 같은 소리인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 되었습니다? 예? 잘못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대게가 말을 걸었다니까요?

주인공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는데, 나도 잘못 본 줄 알았어요... 게가 사람 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살려달라고 했다고요. 집게와 눈자루를 파르르 떨면서 나름 점잖게 말을 했다고요. 러시아 정부가 극비리에 진행하는 해저 공사에 인부로 동원되었다가 납치되어서 한국까지 왔다고...?

누가 인문대학 어문전공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했느냐. 적어도 죽어가는 러시아 출신 대게, 그러니까 러시아‘산’이 아니라, 아주 아닌 건 또 아니긴 한데, 아무튼 러시아에서 잡혀와 죽어가는 노동자 대게를 구할 수는 있더라고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부당해고 및 불공정계약 항의 농성장에 문어가 나타나서 배고프던 차에 잘 됐다 안주거리나 할랬더니 해양... 뭐? 아무튼 같이 좀 가시쟤서 한 얘기 하고 또 하고, 오가는 길에 멀미도 좀 하고, 수산시장에 갔더니 러시아어 하는 대게가 "살려주시오..." 하기에 졸지에 전공 살려 통역도 좀 하고요.

아픈 가족 때문에 기적의 신약이라는 사기꾼 냄새 폴폴 나는 수상한 가게에 갔더니 외계생물과 말하는 대게가 잡혀있어서 이걸 어쩌나 하는 순간에 이른바 “해양... 뭐?”가 나타나 처단하는가 했더니 전동휠체어 군단이 나타나서... 하이야!

와중에 또 멀미를 하고, 개복치가 소년을 만나고, 고속도로에서 해파리에 쏘였는데 또 멀미하며 끌려가고... 여차저차 시위 끝에 잘가요, 해양... 뭐. 를 했는데 여기까지의 배경이 전부 한국이라는 거죠.

...예? 어쩐지 멀미상관적 구성 같은데요. 예. 그게 또 아닌 건 아니긴 하지요...


이 책에 "자전적 SF"라는 희한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시니컬한 농담으로 쉴 새 없이 웃기는데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는 이유도 멀미나게 정신 없고 황당한데 읽다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웃겨? 우습지. 이 상황이. 잠깐 두려워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것 같지. 적어도 이 사태를 이렇게까지 끌고 온 장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 각각은 어쩌다 실소든 조소든, 혹은 고소든 웃음을 터트리고 있냔 말이죠. 웃겨요? 어디가요? 왜요?

이 허무맹랑하고 울화통 터뜨리는 작품들로 작가는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했던 걸까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두 개만 찍으면 냠이 되는 세상에 눈 딱 감고 항복을 행복이라 우길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생물은 아무도 없지요. 어느날 갑자기 대왕문어가 농성장에 나타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닫힌 세계에서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넣는 세상에서 나만은 안전하리라는 믿음은 허황될 뿐입니다.

그러니 다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멸망은 축복처럼 한순간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느릿느릿 파괴되는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지극히 현실적이고 너무나도 한국적인 이 다국다행성적 소설의 세계로 돌아와 묻기로 합시다. 지구 생물은 이대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바다는 안전합니까? 이 물과 땅의 행성은 폐허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죽음은 찬란하고 번영은 무궁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것은 물음이 아닙니다. 마치, 살려주시오, 미끈거리는 점액과 같이, 제대로 보고 생각하라는 요청일 수는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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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4
송지영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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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글감을 고르고, 출판사가 작가를 고르는 것 못지않게 독자도 책을 고른다. 종종 말하듯이, 독서는 웬만해서는 수지타산이 맞기 쉬운 취미가 아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입에 뭘 넣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저가”를 표방하는 일은 없는 데다 내내 마음을 울리다 결말부에 속을 뒤집어놓는 일도 허다하다.

차라리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행일테다. 정성 들여가며 읽고 쌓아놨더니 불현듯 용서 못 할 헛소리를 내질러 그간의 사랑했던 시간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래저래 어떤 작가와 그의 세계를 좋아한다는 것은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다시 돌아가서, 이런 연유로 독자도 책을 고른다. 그 기준은 출판사가 되기도 하고, 관심분야가 되기도 하고, 수상이력이나 추천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저자의 이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정보요 기준이다.


그러니 기존의 “공신력 있는” 이력이 없는 작가를 보면 (대체로 전면 책날개의 소개란에 이력보다 자기소개가 더 많은) 슬며시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러나, 읽은 것만 읽고, 아는 것만 알려고 하는 이의 세계는 넓어질 수도 깊어질 수도 없다. 거기서 거기, 그 맛이 그 맛인 나날일 뿐이다.

결국 주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첫 걸음, 까지도 아니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이만이 원석처럼 참신하고 빛나는, 거친 세계를 맛볼 수 있지 않은가. 구를 만큼 구르고 내공도 쌓일 만큼 쌓인 중견 작가의 탄탄한 작품세계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것은 낯선 이,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쉽게 바래고 흐려지는 것이다. 금세 자리하기 전의 긴장감, 새로이 열어젖히는 세계.


이 책은 한겨레의 출간워크숍 프로젝트를 통해 데뷔(라고 해도 좋을지?)한 저자들의 첫 발표작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 주제가 유달리 참신하지 않을 수는 있다. 새로운 이가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문학이 작가와의 대화라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제각기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를 마음자리에 초대하는 셈이다. 낯가림으로 머쓱하니 지나치기 보다는 기존의 세계에 새로운 빛과 파동을 더하는 이들에 대한 응원의 마음으로 읽기를 권한다.

후면의 추천사를 빌어 감상을 마친다.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오래된 땅에 돋아오르는 새 잎을 마주함과 같은 기쁨이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감탄했고 새로운 작가들의 시작 앞에서 조용히 환호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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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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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환갑 정도는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우리는 ‘오래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젊음을 연장하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은 곧 인간의 삶 중 노년기의 비중이 커졌다는 것과도 같다. 신체 능력의 저하, 사회적 지원 필요성 증가.

그뿐인가, 본디 인간은 생각보다 자주 아프고, 쉽게 다치지만 죽는 일은 그만큼 수월하지 못하다. 앞선 이유와 같이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은 보다 정교해지고 또 확대되었다. 삶은 다양해졌고,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태어남이다.

p.32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들이 모두에게 주어져야만 우리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좋은 돌봄이란 단순히 돌보는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는 돌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돌보는 사람도, 돌봄받는 사람도 모두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립인 거죠.


우리 모두는 출생으로 이 사회에 살아갈 자격과 그에 따른 의무를 진다. 태어났기에 부과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세상은 변했고, 삶의 형태는 다양해졌다. 살아있는 시간은 길어졌고 누워서 눈만 끔뻑거리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누군가는 돌봄이 필요하며, 그 돌봄을 제공할 사람 또한 필요하다. 양자가 같은 사람이거나, 필요한 돌봄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만 모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시 묻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과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가? 작금의 세상은 태어난 존재가, 혹은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생존할 수 있는 곳인가?

p.93 보통 사람들은 중병이 걸렸을 때만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사람에게는 매 순간 돌봄이 필요하거든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처럼 사소한 일이라도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서로를 돌본다면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는 슬픔과 소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판에 박힌 전형적 이미지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 있는가? 응애 하면 태어나 알아서 쑥쑥 자라 돈을 벌고 뼈가 부서져라 일하면 어느날 갑자기 뚝딱 하고 새로운 “정상 가정”을 꾸려 노년기엔 여유로운 일상-이라고 불리는 소외-를 겪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돌봄에 의존하고 또 돌봄의 주체가 되는가? 사람과 사람이 닿지 않는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무수하고 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분명 ‘돌봄’ 자체는 우리 사회에 이미 널리 퍼진 개념이다. 삶의 어느 때에는 돌봄이 필요하고 그를 제공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돌봄’을 어떻게 제공해야 할지, 누가 누구에게로 주고 받아야하며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누군가의 희생, 짐으로서의 인간, 이 두 가지로 돌려막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로 일관해오지 않았는가.


여기서 문제는 “따스한 손길” 따위가 아니다. 물론 정서적 지지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때, 복지제도를 “돈낭비” 정도로만 여기며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언제든 사회적, 육체적 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특별한 일도, 불행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홀로, "정상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p.108 이미 기존의 생애주기라는 게 많이 무너진 상황인데 여전히 그 나이대를 돌봄을 받는 시기라고만 보면, 돌봄을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문제화하지 못하고, 공공 정책에 개입할 여지는 더 적어지는 거죠.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진단 말이예요. (...)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면 더 다양한 돌봄 상황을 어릴 때부터 마주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무력하게 죽는다. 때로는 순간의 문제일지라도.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처럼 먼 산 바라보듯 어떻게든 되겠지, 딴청 부리는 사이에 이름 없는 희생으로 마법같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지원 체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인장기요양급여, 장애인 생활지원, 산후도우미, 아동 돌봄 서비스 등 다양한 제도가 있으나 너무 파편화되고 더러는 탁상행정의 전형인 탓에 수혜자의 실제적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p.129 저는 항상 제도와 제도 아닌 것이 구분되는 게 조금 의문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미시와 거시로 돌봄을 구분할 수 있을까 싶어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미시와 거시이지만 (...) 일상에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도 여러 관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 옆집 사람과 맺는 관계, 오랜 친구와 맺는 관계, 가족과 맺는 관계 등처럼 돌봄서비스를 지원받으면서 맺는 관계가 제도인 거죠.


이제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착한 마음씨”에 얼마나 더 기댈 수 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가 “수발”을 들어줄 것이라는 꿈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비정상”인 사람들을 어딘가로 몰아넣는 사회, 언제든 나도 "치워질 수"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는 사회, 돌봄을 주고받는 데 가장 필요한 인간적 신뢰가 없는 사회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p.184 결국 제도라는 거는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제도의 사각지대를 누가 메꿔야 하느냐, 저는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이냐,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봐요.

p.312 우리가 낯선 타인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이 있는 사회와 그 돌봄이 서비스로만 제공되고 가족에게만 부담 지어진 사회는 질적으로 굉장히 다른 사회라고 생각하거든요. (...) 한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 부분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돌봄과 돌아봄은 닮았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구태연한 말이지만 사람이라는 글자는 한 명인 동시에 두 명이다. 한 사람이 다리를 벌리고 선 동시에 두 사람이 기대고 선 모양이다.

그처럼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한 사람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이 또한 돌봄이라 부르고 싶다. 돌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 그 사이에는 단절도 구분도 없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것, 상대를 살피고 마음 쓰는 모든 것이 돌봄이다.

누구나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돌봄받는 일이 나약함과 무능의 징표처럼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돌봄을 통해 태어나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다 돌봄 받으며 무사히 삶을 마친다.

그 모든 시간에 사람이 사람을 돕고 지지하며 함께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껏 연약할 수 있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내가 사는 곳이, 누군가가 살아갈 곳이 또한 그러하기를. 이제 다시 물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해야하는가.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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