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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자전적 SF 소설이라니, 이게 무슨 갑각류 대외비공사노동자 같은 소리인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 되었습니다? 예? 잘못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대게가 말을 걸었다니까요?
주인공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는데, 나도 잘못 본 줄 알았어요... 게가 사람 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살려달라고 했다고요. 집게와 눈자루를 파르르 떨면서 나름 점잖게 말을 했다고요. 러시아 정부가 극비리에 진행하는 해저 공사에 인부로 동원되었다가 납치되어서 한국까지 왔다고...?
누가 인문대학 어문전공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했느냐. 적어도 죽어가는 러시아 출신 대게, 그러니까 러시아‘산’이 아니라, 아주 아닌 건 또 아니긴 한데, 아무튼 러시아에서 잡혀와 죽어가는 노동자 대게를 구할 수는 있더라고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부당해고 및 불공정계약 항의 농성장에 문어가 나타나서 배고프던 차에 잘 됐다 안주거리나 할랬더니 해양... 뭐? 아무튼 같이 좀 가시쟤서 한 얘기 하고 또 하고, 오가는 길에 멀미도 좀 하고, 수산시장에 갔더니 러시아어 하는 대게가 "살려주시오..." 하기에 졸지에 전공 살려 통역도 좀 하고요.
아픈 가족 때문에 기적의 신약이라는 사기꾼 냄새 폴폴 나는 수상한 가게에 갔더니 외계생물과 말하는 대게가 잡혀있어서 이걸 어쩌나 하는 순간에 이른바 “해양... 뭐?”가 나타나 처단하는가 했더니 전동휠체어 군단이 나타나서... 하이야!
와중에 또 멀미를 하고, 개복치가 소년을 만나고, 고속도로에서 해파리에 쏘였는데 또 멀미하며 끌려가고... 여차저차 시위 끝에 잘가요, 해양... 뭐. 를 했는데 여기까지의 배경이 전부 한국이라는 거죠.
...예? 어쩐지 멀미상관적 구성 같은데요. 예. 그게 또 아닌 건 아니긴 하지요...
이 책에 "자전적 SF"라는 희한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시니컬한 농담으로 쉴 새 없이 웃기는데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는 이유도 멀미나게 정신 없고 황당한데 읽다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웃겨? 우습지. 이 상황이. 잠깐 두려워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일 것 같지. 적어도 이 사태를 이렇게까지 끌고 온 장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 각각은 어쩌다 실소든 조소든, 혹은 고소든 웃음을 터트리고 있냔 말이죠. 웃겨요? 어디가요? 왜요?
이 허무맹랑하고 울화통 터뜨리는 작품들로 작가는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했던 걸까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두 개만 찍으면 냠이 되는 세상에 눈 딱 감고 항복을 행복이라 우길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생물은 아무도 없지요. 어느날 갑자기 대왕문어가 농성장에 나타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닫힌 세계에서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넣는 세상에서 나만은 안전하리라는 믿음은 허황될 뿐입니다.
그러니 다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멸망은 축복처럼 한순간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느릿느릿 파괴되는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지극히 현실적이고 너무나도 한국적인 이 다국다행성적 소설의 세계로 돌아와 묻기로 합시다. 지구 생물은 이대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바다는 안전합니까? 이 물과 땅의 행성은 폐허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죽음은 찬란하고 번영은 무궁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것은 물음이 아닙니다. 마치, 살려주시오, 미끈거리는 점액과 같이, 제대로 보고 생각하라는 요청일 수는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