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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평점 :
의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환갑 정도는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우리는 ‘오래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젊음을 연장하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은 곧 인간의 삶 중 노년기의 비중이 커졌다는 것과도 같다. 신체 능력의 저하, 사회적 지원 필요성 증가.
그뿐인가, 본디 인간은 생각보다 자주 아프고, 쉽게 다치지만 죽는 일은 그만큼 수월하지 못하다. 앞선 이유와 같이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사람을 살리는 기술은 보다 정교해지고 또 확대되었다. 삶은 다양해졌고,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태어남이다.
p.32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들이 모두에게 주어져야만 우리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좋은 돌봄이란 단순히 돌보는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는 돌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돌보는 사람도, 돌봄받는 사람도 모두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립인 거죠.
우리 모두는 출생으로 이 사회에 살아갈 자격과 그에 따른 의무를 진다. 태어났기에 부과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세상은 변했고, 삶의 형태는 다양해졌다. 살아있는 시간은 길어졌고 누워서 눈만 끔뻑거리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누군가는 돌봄이 필요하며, 그 돌봄을 제공할 사람 또한 필요하다. 양자가 같은 사람이거나, 필요한 돌봄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만 모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시 묻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환경과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가? 작금의 세상은 태어난 존재가, 혹은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생존할 수 있는 곳인가?
p.93 보통 사람들은 중병이 걸렸을 때만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사람에게는 매 순간 돌봄이 필요하거든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처럼 사소한 일이라도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서로를 돌본다면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는 슬픔과 소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판에 박힌 전형적 이미지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 있는가? 응애 하면 태어나 알아서 쑥쑥 자라 돈을 벌고 뼈가 부서져라 일하면 어느날 갑자기 뚝딱 하고 새로운 “정상 가정”을 꾸려 노년기엔 여유로운 일상-이라고 불리는 소외-를 겪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돌봄에 의존하고 또 돌봄의 주체가 되는가? 사람과 사람이 닿지 않는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무수하고 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분명 ‘돌봄’ 자체는 우리 사회에 이미 널리 퍼진 개념이다. 삶의 어느 때에는 돌봄이 필요하고 그를 제공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돌봄’을 어떻게 제공해야 할지, 누가 누구에게로 주고 받아야하며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누군가의 희생, 짐으로서의 인간, 이 두 가지로 돌려막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로 일관해오지 않았는가.
여기서 문제는 “따스한 손길” 따위가 아니다. 물론 정서적 지지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때, 복지제도를 “돈낭비” 정도로만 여기며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언제든 사회적, 육체적 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특별한 일도, 불행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홀로, "정상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p.108 이미 기존의 생애주기라는 게 많이 무너진 상황인데 여전히 그 나이대를 돌봄을 받는 시기라고만 보면, 돌봄을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문제화하지 못하고, 공공 정책에 개입할 여지는 더 적어지는 거죠.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진단 말이예요. (...)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면 더 다양한 돌봄 상황을 어릴 때부터 마주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무력하게 죽는다. 때로는 순간의 문제일지라도.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처럼 먼 산 바라보듯 어떻게든 되겠지, 딴청 부리는 사이에 이름 없는 희생으로 마법같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지원 체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인장기요양급여, 장애인 생활지원, 산후도우미, 아동 돌봄 서비스 등 다양한 제도가 있으나 너무 파편화되고 더러는 탁상행정의 전형인 탓에 수혜자의 실제적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p.129 저는 항상 제도와 제도 아닌 것이 구분되는 게 조금 의문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미시와 거시로 돌봄을 구분할 수 있을까 싶어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미시와 거시이지만 (...) 일상에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도 여러 관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 옆집 사람과 맺는 관계, 오랜 친구와 맺는 관계, 가족과 맺는 관계 등처럼 돌봄서비스를 지원받으면서 맺는 관계가 제도인 거죠.
이제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착한 마음씨”에 얼마나 더 기댈 수 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가 “수발”을 들어줄 것이라는 꿈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비정상”인 사람들을 어딘가로 몰아넣는 사회, 언제든 나도 "치워질 수"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는 사회, 돌봄을 주고받는 데 가장 필요한 인간적 신뢰가 없는 사회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p.184 결국 제도라는 거는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제도의 사각지대를 누가 메꿔야 하느냐, 저는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이냐,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봐요.
p.312 우리가 낯선 타인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이 있는 사회와 그 돌봄이 서비스로만 제공되고 가족에게만 부담 지어진 사회는 질적으로 굉장히 다른 사회라고 생각하거든요. (...) 한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 부분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돌봄과 돌아봄은 닮았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구태연한 말이지만 사람이라는 글자는 한 명인 동시에 두 명이다. 한 사람이 다리를 벌리고 선 동시에 두 사람이 기대고 선 모양이다.
그처럼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한 사람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이 또한 돌봄이라 부르고 싶다. 돌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 그 사이에는 단절도 구분도 없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것, 상대를 살피고 마음 쓰는 모든 것이 돌봄이다.
누구나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돌봄받는 일이 나약함과 무능의 징표처럼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돌봄을 통해 태어나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다 돌봄 받으며 무사히 삶을 마친다.
그 모든 시간에 사람이 사람을 돕고 지지하며 함께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껏 연약할 수 있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내가 사는 곳이, 누군가가 살아갈 곳이 또한 그러하기를. 이제 다시 물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해야하는가.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