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홀리 : 무단이탈자의 묘지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2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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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와인드 대상 축소 법령이 통과된 지금, 사람들은 '언와인드 대상'들을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조율'이고 '개정'이었을까. 2권에서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분리해낼 수 있다고, 나아가 초월적인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등장한다. 과연 믿음이 무엇이길래, 존재가치에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여기게 하는 걸까.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에 집착하는 자들은 언제나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 우리의 삶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처럼. 반면에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에게 논리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야 한다는 것에 이유는 필요 없으니까(신철규 저, 『심장보다 높이』, 남승원 해설 중에서)".

p.56 「용서해다오.」 부모는 그녀에게 애걸하고 또 애걸했다. 종종 눈물도 흘렸다. 「우리가 저지른 이 일을 용서해 주렴.」 미라콜리나는 그들을 용서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부탁이 혼란스럽기는 했다. 미라콜리나는 언제나 십일조가 되는 것이 축복이라 생각해 왔다. 아무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운명과 목표를 안다니. 어째서 부모는 그녀에게 목표를 주었다는 이유로 미안해하는 걸까?

p.130 수천 명의 열일곱 살짜리들이 하비스트 캠프에서 석방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는 분명 사방에 승리감이 넘실댔다. 그건 인간의 연민이 거둔 승리, 언와인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 승리감에 취한 사람들은 정작 언와인드라는 문제 전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언와인드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다른 곳을 보며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수요는 그대로인데 "공급"이 줄어드니 갈망은 커지고 '가격'은 상승하리라는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급기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죽어서 공급되어야 할 이유를, 누군가가 인간이어서는 안 될 이유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악착같이 만들어낸 논리가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행동한 사람들을 엉뚱하게 "폭도"라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앞의 책)."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만으로 '분해되지' 않게 하려는 이들은 사회의 질서를 해치고, 나아가 악에 가담하는, 아니, 악 그 자체인 존재가 된다. 살겠다는 이유만으로, 죽지 않게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수요'가 있는 한, 욕심이, 요구가 있는 한 이 지옥은 끝날 수 없는 걸까?

p.370 코너는 세상이 늘 지금 같았던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생 세상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존재해왔기에 그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상상하기란 어렵다. (...) 병든 사회가 자신의 병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건강했던 시절을 기억조차 못 할 수도 있을까? 지금의 상황을 반기는 사람들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너무 위험한 것이라면?

p.382 우리는 언와인드를 멈출 수 없어. 제독이 언젠가 말했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많은 아이를 구하는 거다. 하지만 오래된 뉴스 보도를 보고 난 뒤 제독의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어쩌면 언와인드를 끝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과거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1권 말미에 간신히 도래했던, 지극히 부서지기 쉬운 피신처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증오와 혼란에 잠식되어간다. 낙원은 붕괴되었고, 사회는 여전히 그들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급기야, 누군가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내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는 1권에서의 질문을 계속해 묻는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단순히 피와 살로 이루어져 분해 가능한 고깃덩이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근원, 이를테면 영혼 같은 것이, 과연 어디에서 생겨나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p.96 「모든 부위는 최고이자 최상의 언와인드에게서 직접 골라낸 거야. (...) 그 가엾은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기에는 너무 불량했어. 하지만 지금은 분열된 상태에서나마 너를 통해 드디어 완성됐지!」

p.236 하지만 그에게 영혼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기자 회견에서 받았던 공격은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영혼이 나뉠 수 없는 거라면, 그의 영혼은 어떻게 그를 있게 한 아이들의 부분의 총합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그들 중 하나도 아니고, 그들 모두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번 권의 또다른 핵심은 오만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내 뜻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자식이라는 '실패'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변치 않을 신념이 있다고 믿는 것, 내가 타겟이 아닐 뿐인 세상이 여전히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사람을 '수확'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신념만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스스로의 삶을 타자의 뜻에 의탁할 수 있다는 믿음. 존엄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그 모든 믿음이, 주어진 믿음에 의심 않는 순종이 모두 오만일 것이다. 내일을 빼앗긴 '몸'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 세계의 끝은 정녕 익숙하고 평화로운 절망일 뿐일까. 누구를 위한 안전이고, 문명이며, 합의인가. 이야기의 반을 지난 시점에서 묻는다. 말끔하게 표백된 이 세계에서 여전히 인간이어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에 있겠느냐고.

p.268 「그러라고 해, 레브, 난 죽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레브.」 마커스가 애원한다. 「나한테 언와인드의 신체 부위를 주게 해...」 레브는 형의 손을 꽉 쥔다. 「알았어, 마커스, 알겠어.」 그렇게 레브는 운다. 형이 방금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증오하며.

p.586 「바깥의 상황이 바뀌고 있어. 사람들이 변하고 있어.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을지 몰라도,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어. 나는 매일 그걸 봐. (...) 세상에는 특별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어.」 칼라는 둘에게 다시 윙크한다. 「지금 너희는 내게 그런 특별하고 평범한 사람이 될 기회를 준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너희한테 고마워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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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와인드 : 하비스트 캠프의 도망자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1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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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연령의 인간은 '보호자'의 의사에 따라 그 신체 부속 일체가 "처분될" 수 있다. 분해되어 적출된 장기 및 전신 조직은 100% '활용'되어야 한다. 일단 태어난 이상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더 이상 자녀를 양육하고 싶지 않은 부모도, 자원이 부족한 시설도 걱정할 일이 없다.

일단 "본보기"로 보내면,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두가 잘 알지 않는가. 손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원활한 진행을 위해 모든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사는 일절 고려되지 않으며, 결정은 번복될 수 없다.

p.41 「매일 원치 않는 아기들이 태어나고 있거든. 그 아기들 모두가 보금자리를 찾는 건 아니야.」 「우리한테는 그런 아이들을 받아 줄 의무가 있단다.」 「새로운 피보호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해.」 「그 말은, 10대 피보호자 수를 10퍼센트 줄여야 한다는 뜻이야.」 「이해하지?」

p.129 그가 실제로 하는 말은 이것이다. 제발 인간이 되어 주세요. 너무도 많은 규칙과 통제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우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녀는 얼마나 자주 연민이 편의에 자리를 내주는지 안다. 그런 경우를 자주 본다.


이렇게, 가치 없는 생명을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하는 제도를 '언와인드'라고 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공리주의에 대한 어설프고 확고한 오독과 지극히 평범한 이기주의가 환상적으로 뒤섞인 미래라고 해도 좋겠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인. 지금도, 어딘가에선, 충분히.

혹자는 장담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납득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있어봤자 짐만 되는 '몸' 하나만 제거하면 수십수백의 '사람'이 새 것 같은 몸으로 살 수 있는데? 손, 발, 피부, 장기, 안구, 혈액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자원 순환인데도?

p.251 부모는 자신을 사랑했을까? 어렸을 때는 확실히 사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됐다고 해서 자신이 영혼을 도둑맞은 건 아니었다… 때로는 부모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영혼을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적어도 부모가 언와인드 의뢰서에 서명한 순간 코너의 영혼 일부는 죽어버렸다.

p.321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장기를 기증했다면 언와인드는 절대 생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것을 지키고 싶어 하지. 죽은 뒤에도 말이야. 윤리가 탐욕에 짓밟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언와인드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했다.」


당연히 두 말 할 것 없이 끔찍한 이야기다. 사람의 자격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도, 인간이 인간의 지위를 갖기 위해 타인을 비인간화해야만 하는 것도, 그것이 사회와 제도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도.

개중 가장 끔찍한 점은, 누군가에겐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제법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미래로 보여질 게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는 더더욱 단순한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미 어딘가에서는 현실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이 이야기의 어디에서든 엄청난 상상을 동원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지옥은 이미 도래해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지옥.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할 권리를 가질 때, 혹은 그렇게 믿기로 "합의할" 때, 그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어떤 곳이 되는가. 모든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존엄이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합의"가 있는 사회는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누군가가 덜 사람이거나, 더 사람인 사회는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p.473 「네 행동에 책임이 있을지도 몰라. (...) 하지만 네가 진짜 세상을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내 잘못이지. 너를 십일조로 키운 모두의 잘못이고. 우리는 네 피에 독극물을 주입한 사람들만큼이나 죄인이야.」


사람의 일부가 사람의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에서 누가 더 사람이고, 더 안전하며, 더 존엄하고 귀중한 존재인가. 존엄이 한정된 재화인 사회, 존엄성을 경쟁해야 하는 사회, 존엄에 "자격"과 "증명"이 필요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존엄하지 않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래산 위의 깃발을 뺏는 게임과도 같아 조금씩 덜어내고 가르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실체도 토대도 없이, 오로지 끝을 위한 끝으로 향하는 전력질주처럼.

짧은 분량의 챕터와 여러 캐릭터의 시점을 오가는 서술에도 난잡한 느낌 없이 연결하는 솜씨가 좋다. 되돌릴 길이 요원한 이 절망에서 "제거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투쟁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총 네 권의 대여정의 마지막까지 동력을 잃지 않고 쭉 밀고 나아가기를 기대해봐도 좋겠다.

p.421 롤런드는 이런 일을 당해도 싼 인간이 아니다. 그는 많은 일을 했다. 전부 좋은 일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당해도 싼 인간은 아니다. 게다가 그는 결국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

p.481 「난 우리가 언와인드될 때 우리 정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코너가 말한다. 「우리 정신이 언제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건 알아.」 그는 모두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잠시 말을 멈춘다. 「우리에겐 우리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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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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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 또 사람 죽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파괴하는 이야기에 이렇게 반색해도 되는가 싶긴 하지만, 단순한 스릴에 그치지 않을 것을 믿기에 다시금 펼쳐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고 하면, 나름대로 근거 있는 신뢰가 아닌가.

그의 전작과 수록작들의 배경이 되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일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비단 '기록된 역사' 뿐만 아니라, 이 사회는 대체 어떤 꼴로 돌아가고 있는지, 성원 간의 신뢰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세계를 지탱한다고 믿어온 어떤... 근본 따위가 얼마나 일그러지고 썩어 있었는지.

p.11 13년 동안이나 다녔던 회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하니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 (...) 그전까지는 정치나 사회, 인간관계 등, 아무튼 무언가가 나를 지켜 주고 있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을 품고 있었다. 최소한의 신뢰조차 성립하지 않는 살벌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p.192 "미조로 박사님은 전시에도 줄곧 제국대학에 계셨습니까?" "아뇨, 육군 군의관으로서 대륙에 가 있었습니다. (...) 제국대학 의학부 학자는 총을 잡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전염병 예방을 연구해 달라는 군대의 요청을 받아 갔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현실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아니, 어떤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을 그리는 걸까. 기존에도 써낸 적은 있으나,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낸 전적이 있음에도. 어쩌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할 세상을 봐버렸기 때문에, 무언가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평생 발소리에 쫓기며 공포에 시달릴 셈"이냐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을 죽인 걸로 사형까지 내려지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더욱 심령, 유무형과 믿음의 경계를 넘는 존재를 소환할 필요를 느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모조리 비극이다. 어떤 것도 통쾌하지 않고, 어떤 일은 영영 없던 일이 되지 못한다.

p.47 녀석의 집 안에서 울리는 발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인 채 울리다가 다니무라의 비명을 지워 버리며 덮치려고 했다. 내가 밤길에 들은 것은 한 사람이 반복하여 지나갔던 발소리가 아니었다. 부츠를 신은 여러 사람이 잇달아 통과하는 소리였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여태껏 여자를 몇 명이나 죽인 거야?"

p.107 요네무라는 그럴 작정이었다. 이미 도망칠 방도가 없기에 형량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자백하여 반성의 기미를 보인다면 유기징역만 받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모든 계산을 미야코의 유령이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형벌과는 다른 공포가 치밀었다. 지벌 말이다.


이것은 좌절인가? 어느정도는 그렇다. 일어난 일은 없던 것으로 되돌려질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우연과 그 때, 그 곳의 순간이 얽힌 결과물인 이유로, 어떤 파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어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고,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외치게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일까. 수록작 전체에 단순한 긴장으로 충격으로 치부할 수 없을 짙은 분노가 배어있다. 같은 인간종이라는 사실에 대한 끔찍한 무력감. 절망은 반복될 것이며, 악은 도처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꼴로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좌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질문이 이어진다. 이 작가에 질릴 수 없는 이유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p.230 "과학적 탐구 앞에서 인간의 생명 따윈 아무렇든 상관없어. 페스트균에 감염된 인간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살아 있는 임산부의 태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핵폭발로 인간을 얼마나 죽일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거든 뭐든지 실험하면 그만이야.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연구하고 싶다면 실제로 사람을 죽여 보는 게 제일이지. 그것도 되도록 처참한 방법으로 말이야."

p.236 "이 나라는 바뀌어 가겠지. 풍경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맞아." 하야미는 수긍한 뒤 술잔을 입으로 옮기면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이매망량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의 모습을 띤 괴물들이 시대와 이름을 바꾸어 언제 다시 이 나라에 발호할지, 그걸 감시하는 것이 펜을 쥔 자의 소임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결국 이 책에서 신비로움과 반전은 대체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를 여전히 묻고 있으며, 이 책의 이야기와 문장들은 그 고민의 흔적인 동시에 다음 행보의 어떤 씨앗과도 같은 단서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세계의 경계가 우리의 이해 바깥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무형을 현실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고 해도 좋겠다.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 혹은 끊임없이 이어질 무언가가 있다는, 아주 작고 연약한 믿음을 포함하여. 사람의 마음을 부수고 무너트리는 것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는 존재도 모두 인간이라는 어떤, 사실, 진리, 확신.

p.125 '나'를 낳게 한 우연한 만남은 부모님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조부모와 그보다 윗세대에서도 면면히 반복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더욱이 그 기적은 '나'에게만 벌어지지 않았다. (...)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적이면서도 굉장히 진부한 일이기도 했다.

p.319 "당신은 특별한 인간이 아냐. 인간은 모두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세계에 있는 존재야. 모두가 제로의 상태에서 태어나. 그리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계속 살아가. 그게 인간의 일생이야. (...) 이 세계도, 현재라는 시간도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들 살아가고 있어. 당신도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 자신이 누구냐는 답이 없는 문제에 현혹되지 말아 줘."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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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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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평등의 케이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불평등의 케이지'란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다. 그것도 지금 당장의.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이미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양상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견해에 따라 그 원인과 기원만 모아도 역사가 될 지경이다.

그러나, 돌아가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나아가 현대-도시화된 세계 대부분의 사회에 불평등이 문제의 시발점이자 문제 자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시 범위를 좁혀, 한국 사회의 세대, 계층, 집단 간 불평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게 생존을 도모하고, 점점 해체되고 분열되어가는 사회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p.15 탈출을 꿈꿔보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이렇게 살고 있다고? 탈출을 시도해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언젠가는 탈출을 감행할 것이라고? (...)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나도 모른다). 대신, 왜 우리가 탈출을 꿈꾸는지, 왜 꿈꾸면서 이 체제에 그대로 머무는지, 이 모순과 불일치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p.23 이 책은 ‘탈출’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그 탈출을 좌절시키는 기제, 즉 ‘충성’과 ‘순응’을 야기하는 기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탈출의 옵션이 중요한 만큼, 탈출을 좌절시키는 옵션 또한 중요하다. 이 옵션의 작동 방식을 이해해야만, 탈출이 왜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성공 신화"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가? 실력과 업적에 합당한 보상이 있는가? 격차는 능력과 노력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 상향이동이 불가한, 자본-계급이 생득적 권력의 지위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또다른 "기회의 땅"을 향해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 절망과 좌절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소거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 사회에 가두는가?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지난 연구에 이어 이 '소셜 케이지'의 기원과 현재를 벼농사 체제에서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 문화에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통해 분석한다.

p.80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닫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꼭 자리가 아니어도, 소득이나 자산이 늘어날 여지가 봉쇄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이동성이 저하된 사회에서 경기가 나빠지고 불평등이 증대되면, 중하층 계급은 대안적인 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혁명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옵션(혁명)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p.115 개인의 입장에서 엑시트 옵션이 적은 사회와 많은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사회인가? 엑시트 옵션이 많은 사회가 개인이 살아가기에 더 좋은 사회다. 그 사회는 인간의 정주 욕구와 이주 욕구 중, 후자를 극대화하는 사회다. 물론 정주 욕구를 극대화하는 사회와 조직도 계속 생존할 것이다. 인간은 안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철밥통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책머리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생존기술"에 대한 지침서가 아니다. "나라도 살아남아보자" 식의 로드맵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어떤 실용적인 지침이나 성공으로의 열쇠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느껴질만큼 냉정하고 현실적인 길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이상으로의 투쟁과도 거리가 멀다.

혹자는 이에 절망할 것이다. 어쩌면 분노할 수도 있겠다. 일면 동의한다. 누군가에겐 공허한 이상이 당장의 생계에 맞닿아있는 탓에 역설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내던지고 온몸으로 나선 이들이 있다. 학문이 현실과 유리되는 현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현장 바깥으로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 글은 저자가 그 점을 잘 알고 본업에 충실하려 했다는 가정 하의 감상이다.

p.23 소셜 케이지 혹은 소셜 케이징은 '탈출을 좌절시키는 기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나 집단, 조직을 탈출하고자 할 때, 이를 좌절시키거나 단념시키는 '심리적-제도적-환경적 장벽'이 소셜 케이지다. 다시 말해서 소셜 케이지는 내가 현재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이탈하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물도록 만드는 생태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인센티브 메커니즘과 제도의 총체다.

p.117 결국 한국의 상층 노동시장은 좀 거칠게 이야기하면 노동조합, 연공제, 학별로 버텨온 시스템이다. (...) 전작에서 이 제도들의 뼈대 역할을 하는 연공제가 벼농사 체제의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벼농사 체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벼농사 체제의 연공/위계 문화와 강력한 친화성(선택적 친화성)이 있는 임금체계라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현재에서 탈출을 어렵게 하는 소셜 케이지는 학벌주의, 제한된 노동시장, 연공제가 복합적으로 뒤엉킨 합작품 내지는 오래된 유산의 역기능적 현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실패가 곧 재기불가능한 추락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어떻게 자본권력에 맞서 자유도를 높일 수 있을까. 노동자가 또다른 노동자, 즉, 외부사회로부터 유입된 "노동력"과 약자 간의 출혈경쟁을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케이징을 벗어나 사고하는 일은 과연 요원하기만 할까, 그 점이 궁금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모방한 AI와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노동의 가치는 임금으로 저당잡히며, 인생의 한 지점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는 단순히 "취업시장"만의 문제가 아닌 현재에서. 채 답하지 못한 질문으로 3부작의 끝을 맺는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결국 많은 일이 그러하듯, 남은 것은 미래의 일이다. 독자는 물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살 작정인가?

p.299 MAGA를 외치며 중하층 백인을 결집하는 트럼프의 정치도 이러한 문화주의 우파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이민 이슈는 좌파정당뿐만 아니라, 우파정당 내부에도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균열은 미국과 유럽에서 국제주의와 세계화를 추진해온 전통 우파가 사그라들고, 신 극우파가 출현하여 우파정당을 장악하게 된 구조적 배경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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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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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이를 신뢰할 수 있는가? 낯선 타인과 동석해 하루를 나눌 수 있는가? 누구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는 동시에 타인의 일면과 순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가? 비정형적이고 강제되지 않는 집단 내의 호혜를 기대하고 또 그 연쇄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가? 호의가 배반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는 성립 가능한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망설임 없는 긍정은 고사하고,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 허황된 꿈, 어리석은 이상론으로 치부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사회에 살고 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실현을 경험한 적조차 없다. 불가지 혹은 이해-전은 곧 불신으로 직결되고, 정보우위가 곧 생명인 세계에서 타인은 언제나 암묵적인 경쟁대상이므로, 제거와 압도를 목표해야만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p.6 이들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커먼즈를 구축한다. (...) 뼛속까지 장사꾼인 이들이 타자를 돕는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너를 도우면 '누군가'가 나를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운 당사자에게 보답을 기대하는 대신,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더 넓은 세계로 이전함으로써 세계 자체를, 커먼즈로 만드는 셈이다.

p.92 카라마와 동료들은 (...)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대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유일한 진리가 아니다. 그저 믿어진 규칙, 그렇다고 선언되기 때문에 믿어지는, 이외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했다고 믿기 때문에 유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종의 방향 혹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공고하게 구축된 불신과 경계의 토대에서 호의의 순환경제는 요원하거나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헐렁한 이상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곳이 있다.

비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상인의 도시. 돈과 물건과 사람이 쏟아지듯 밀려오고 스쳐지나가는 곳, 홍콩, 그 중에서도 가히 "국제적인 비공식 경제의 거점"으로 알려진 청킹맨션. 천차만별의 인간군상이 득실거리는 곳, 짝퉁과 내일을 장담하지 않는 이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에 바로 그 가능성이 있다. 그를 향한 여정의 안내를 맡은 것은 역시나 도통 못 미더운 동시에 모두에게 신뢰받는 자칭 타칭 '보스' 카리마다.

p.157 TRUST가 공식 중고 거래/경매 사이트와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TRUST가 '신용할 수 있는 브로커/고객'과 '신용할 수 없는 브로커/고객'을 점차 가려내는 플랫폼이 아니라는 점이다. TRUST에는 변함없이 누구나 신용할 수 있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계·인간관이 유지되고 있고, 거래 실적이나 자본 규모, 과거의 실패나 배신과도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돌아간다.

p.173 비즈니스에 관한 이기적인 관심과 타자에 대한 이타적인 행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맺어져 있는 구조가 구축되면, 누군가가 내게 베푼 친절에 직접 갚아주지 못하더라도 이게 그 사람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으며 (...) 즉, 여기에도 '부담'을 애매하게 만들며 자발적인 도움을 촉진함으로써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안전망을 형성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홍콩과 아프리카를 잇는 가품과 모조, 도박과 도전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공식 경제에 참여하는 이들과 생활을 공유하며 그들의 독특한 호수관계에 주목한다. 모두가 입을 모아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낯선 이에게 의탁하고, 호의를 베풀며, 그것이 배반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처지와 불안정한 연결 뿐이다.

서로의 전체와 근원을 파악할 수 없는 유동적 관계에서 이 완벽한 불신과 절대적 신뢰의 기묘한 공존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담보 없는 신뢰, 잠재적 폭력을 예비하지 않는 우호적 관계 구축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숱하게 증명된 호의와 선의의 순환이 전지구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는 무엇이란 말인가?

p.249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다. 돈을 버는 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어떤 기회도 자신의 이익으로 바꿀 수 있다, 라고 누구나가 공언하기 때문에 가볍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경제에 대항하는 지점으로 증여경제 또는 분배의 구조를 구상하는 게 아니라, 증여경제나 분배경제가 잠재적으로 내포한 부정적인 측면이 자본주의경제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힌트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p.282 돈벌이라는 목적은 이들을 순식간에 연결하는 동시에 연결을 적절히 끊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 동료를 만들고 증여를 순환시키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벌이를 동료나 증여를 순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돈벌이야말로 사회를 만드는 놀이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전반적 금융, 상업 시스템은 불신에 기반한다. 각자도생을 전제하고 대가를 선지불하지 않으면 신뢰도 없다. 시작이 없으니 성취도 없다. 조력이 없으니 회복도 없다. 저자는 청킹맨션의 사례가 정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호수 시스템 유지와 구축에 '낭비되는' 유무형적 자원에 대한 비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수성'을 보편신념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담보가 신뢰에 앞서는 사회에서 순간의 실패가 회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곧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담보를 갈구하는 길로 이어지기 떄문일지 모르기에. 느슨한 연대, 무관심의 관용, 그렇게 펼쳐질 가능성의 세계.

p.259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면 선순환의 상호성은 손쉽게 악순환의 상호성으로 전환한다.

p.292 이들이 효율성과 편의성을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우위에 두거나 신뢰의 등급화를 목표로 삼는 것과는 다른 회로로 실현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한 방법론으로 민족지를 통해 세련된 사회경제 시스템의 이론과는 다른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리가 반드시 '위험한 타자'나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음을 사고하는 한 걸음이 된다면 기쁠 것이다.


*도서제공: 갈라파고스

#청킹맨션의보스는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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