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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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때로는 그 순간의 감동이 인생의 길을 바꿔놓기도 한다. 안정적인 삶을 내던지고 찰나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자연으로 떠나는 것처럼.
그러나 때로는 바로 그 순간이 평생을 살아내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뜯어보자면 딱히 엄청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가 행성의 대기와 충돌하면서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위치와 때에 따라 그다지 드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경로를 바꿔놓기도 한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힘, 사람을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p.222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운명의 해였던 2009년, 12월 초에 오로라 여행을 다녀왔고, 중순에 사직서를 냈고, 말일 자로 자유인이 되었다.
p.231 오로라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일한 모습은 단 한 순간도 없다. 희미한 날도 많지만 오로라 폭풍과 같이 온갖 색의 빛이 밤하늘 전체를 물들이며 휘몰아치는 순간을 맞으면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절정의 순간은 한 번 찾아오기도 하고 하룻밤에도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하고 정말 운 좋은 날은 밤새 난리를 치며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절정의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빛, 오로라는 누군가에게는 정령들의 춤, 누군가에게는 신의 계시 호은 하늘의 촛불, 혹자에게는 망자를 천국으로 이끄는 여신의 증거로 이해되어왔다. 드물지만 조선에서도 관찰된 기록이 있다. 지구 자기장의 중심이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먼 훗날 어느 밤에는 하늘을 뒤덮는 장관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p.17 오로라는 사진으로만 보아도 환상적이지만 실제로 보면 훨씬 신비롭다. 우선 그 장대한 규모에 놀라고, 너울거리는 움직임에 빠져든다. 오로라는 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p.25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로라를 '정령들의 춤'이라고 불렀으며, 중세유럽에서는 신의 계시로 여기거나 하늘에서 타오르는 촛불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바이킹족의 전설에서는 전쟁의 여신 발키리가 전사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때 방패에서 반사된 빛이 오로라라고 전해진다.

태양계 내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행성은 아마도 지구 하나 뿐이라고 추측된다. 그나마 생명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되는 곳은 아마도 화성 하나 뿐이다. 식어버린 땅, 붉은 모래가 날리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행성. 그곳에서는 오로라를 볼 수 없다. 대체 저게 뭔가 싶은 덩어리에 가까운, 목성과 토성에서도 관찰되는 오로라를. 먼 옛날 태양계 생성 초기에는 화성에도 대기와 자기장이 존재했을 것이고, 신의 영혼 내지는 정령의 춤이 하늘을 뒤덮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차게 식어 자기장은 사라지고 희박한 대기는 태양풍에 흩어지고 만다.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물과 대기라지. 어쩌면 오로라는, 빛나는 그 춤은 생명 혹은 어딘가에서 눈물짓고 있을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94 사막과도 같은 광대한 우주, 그 변두리 어딘가의 작은 별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행성에서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 오로라의 황홀한 빛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생명이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증거다. 먼 훗날 다른 우주에서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그 행성에서도 오로라가 보일 것이다.

이 책의 반 정도는 오로라 화보집, 반 정도는 과학지식으로서의 오로라, 나머지 반 정도는 사진가 권오철의 생생한 오로라 관측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도합 150%의 힘으로 평생의 장관을 쟁취해보시라). 어느 쪽에 관심이 있어도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환상을, 누군가에게는 위안을, 누군가에게는 언제일지 모를 꿈의 씨앗이 될 셈이니 (그 환상이 191쪽 같은 '순식간에 얼어붙는 소변'이라면 시도하지 마시라. 라면이나 소변이나 몇 시간은 걸린단다).
잠들지 못하는 밤, 알지 못하는 낯선 땅의 겨울바람과 새하얀 달, 산과 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휘감아도는 색색의 춤을 떠올려보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늘의 파도, 빛의 장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춤. 광대한 우주 변두리 어딘가를 맴도는 작은 행성의 아주 작은 존재인 우리를 살아내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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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브램 스토커 지음, 진영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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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공포의 원형'에는 무엇이 있을까. 죄책감이나 원한 따위의 응보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기원을 알 수 없거나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생물적인 두려움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낯선 것', 그 중에서도 '낯설고 사악한 존재의 침입' 또한 그 뿌리가 깊지 않은가. 대개 그 둘이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결국 공포의 대상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위세와 의미를 달리하며 인간과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유럽의 오랜 흡혈귀 신화를 대중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온 첫 성공적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멀고도 낯선 이교도의 땅에서 온 사악한 죽음의 존재, 적어도 그 이름을 대치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말이다.

인외 존재 중에서도 '흡혈귀'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연구 대신, 오늘은 이렇게 묻기로 하자.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가? 신의 눈과도 같은 태양과 낮, 생명을 벗어나 우리 인간이 극도로 취약해지는 밤, 말도 길도 알 수 없는 '이교도'의 땅, 생명과 삶을 벗어난 존재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의. 문명시대 이래로 강자를 자처해왔던 인간이 피식자도 아닌 '먹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지위의 역전.
『드라큘라』는 흡입력있는 내용과 긴장 넘치는 전개를 제하고 전문이 일기 및 서간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데에서 형식적으로도 독보적인 작품이다. 낯선 곳에서 사악한 계략에 휘말려 쫓기던 이가 의로운 이들과 힘을 모아 악당을 퇴치한다는 뻔한(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나름 참신한 소재였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클리셰라는 '보장된 맛'으로 흥행하니 된 것 아닌가.) 스토리를 누가 700여쪽이 넘는 대서사로 풀어낼 수 있겠는가.
p.77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짐승처럼 핥았다. 혀로 하얗고 날카로운 이를 핥는 동안 달빛 아래 붉은 입술과 혀가 촉촉하게 빛났다. 여자가 고개를 더 숙이자 얼굴이 내 입과 턱 근처까지 왔는데 내 목이 목표인 것 같았다. (...) 내 목 피부가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간지럼 태우는 손이 가까이 왔을 때처럼 피부가 곤두섰다. 달아오른 목 피부로 부드럽게 떨리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두 치아의 끝이 목 피부에 가만히 닿았다.
p.241 “잠들고 싶지 않나요?”
“네, 두려워요.”
“잠이 두렵다니! 왜죠? 다들 잠을 자고 싶어 하는데.”
“제 입장이 되어보면 다르게 생각하실 거예요. 잠이 무서운 일의 징조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여기까지는 점잖게 남겨보려 애쓴 부분이고. 이하로 솔직한 감상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치겠어요 정말. 나도 이렇게 읽고 싶지 않은데 분명 호러고 공포로 점철된 글인데 아무리 노력해봐도 외국서 온 성격 좋은 젊은이를 욕망하는 고리짝 드라큘라 노백작 같아서 웃겨죽겠다고요. 이건... 호러 문학이죠? 독자를 웃기려고 넣은 장면은 단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등골이 오싹해지고 절망감에 눈물을 떨굴 수 밖에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작품이란 말입니다. 공포와 맞서싸우는 선한 의지, 용기에 감동해서 읽던 때도 있었지요, 물론.
그치만 생각해보세요. 삼백도 넘은 양반이 요 젊은이 한 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마부에 시종 노릇을 하질 않나, (들키진 않았지만) 헐레벌떡 뛰어들어가서 밥 차려주지, 잠자리 봐주지, 날이면 날마다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얘기 좀 하자고 붙잡아놓지를 않나... 태워줘, 먹여줘, 재워줘, 내보내줘 살려줘...!
자고로 생각없이 읽으면 웃다 숨 넘어가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뭐, 그렇게 되면 피는 안 빨렸으니 흡혈귀의 수하가 되지는 않겠군요. 그러니 내 무덤에 마늘만은 놓지 말아줘요 (정 불안하거든 바싹 구운 걸로 부탁해요... 그건 맛있으니까)...
p.38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유로이 들어왔다가 안전히 돌아가시오. 당신이 안고 온 행복을 조금만 남겨놓고 가면 좋겠소."
p.78 “감히 너희 셋이 이자를 건드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눈독을 들이다니, 물러나, 셋 다! 이 자는 내 것이야! 이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 나도 사랑할 줄 알아. 옛날과는 다르다고.“

물론 집필 시기가 시기인만큼 여성관이 영 구식이긴 합니다. 어쩌겠어요. 무덤에 대고 잠깐 나와보시라고 들볶을 수도 없고. 아무튼 한국에선 무리입니다. 마늘을 좀 덜 먹어보세요, 곰의 자손들아. 근처에도 못 오게 생겼잖니.
그러니 최선을 다한 새번역에 힘입어 읽어보세요. 포식자 앞의 인간, 동물적인 위협을 관능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문장과 쫓고 쫓기는 여정,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위협과 말 그대로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의 연대를.
p.458 우리가 싸움에서 진다면 그가 결국 승리를 거둘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결말은 어떨까? 사실 목숨이 문제가 아니야, 목숨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닌 거야. 우리가 진다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상황에 놓이게 될 거야. 우리도 그자와 같은 부류가 되겠지. 밤의 추악한 괴물이 되어 마음도 양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사냥하겠지. 우리에겐 천국의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문을 다시 열어주겠나? 우리는 영원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살 거야.
p.665 오늘 아침 우리는 불안하게 일출을 기다렸다. 반 헬싱은 최면을 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을 감안하여 평소보다 일찍 시작했다. 그렇지만 원래 최면에 걸리는 시간에 이르렀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갖은 애를 쓴 끝에 하커 부인이 최면에 빠졌지만 해가 뜨기까지 겨우 1분이 남았다.

덧, 오래된 명작인만큼 타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이 여럿입니다. 각각의 문체 차이와 일부 대사를 방언으로 번역한 문장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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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 페미니스트 교사 마중물 샘의 회복 일지 점선면 시리즈 1
최현희 지음 / 위고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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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위고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읽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던 책이다. 으레 책을 두고 하는 고민이란 대부분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일 터이나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에세이에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글을,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쓴 모든 문장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나는. 알량한 위안거리로 삼아버리면 어쩌지, 따위의 고민으로 인해 이 책은 침대맡 책탑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제법 오래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용기가 필요했다. 비겁한 사람이라 타인의 시간에서 용기를 얻어야했다.
양육자도, 교육자도 아닌 나의 좁다란 세계에 들어온 "마중물샘"이라는 이름(성함...?)이 들어온 건, 아마도 좋은 일은 아니었을 테다. 마중물샘의 블로그를 몇 번 보다 아주 정해놓고 찾아들어가면서도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때가 수두룩했으니. 그렇게 무관심했다. 어린이와 생활을 함께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마중물샘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이것은 부끄러운 나를 참회하는 데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제목에서처럼 "다시 내가 되는 길"의 일부일 뿐이다.
216
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세상'이란 이름 아래 사람은 너무도 쉽게 말한다. '당장은 어떻게 못 한다', '이만하면 전보다는 낫다', '너의 피해의식일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화를 낸 건 심했다' 등등. 침묵하라, 가해에 동조하라, 너의 피해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라. 기울어진 운동장, 평등하지 못한 세상, 위협적이고 부당한 세상에서 '내가 되는 나'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는 출간 때 그렇게 기뻐하며 읽어놓고도 말을 아꼈던 책이다. 아마 그 즈음의 나는 사람이라기보단 사람 형상의 넝마 정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이, 내 시간이, 내 길이 버거워 휘청거리는 마당에 남의 마음까지 소화할 수는 없다고, 방구석에서 눈물콧물 짜며 읽어놓고도 피해버린 데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늦게나마 변명해본다. 다시 말하자면 나름의 사정이 변명이 될 정도로 소중하고 눈부신 기록을 엮어낸 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102
성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롭게 자란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법과 제도의 평등이 편견과 차별 없는 사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것들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고 다시 보고 질문해야 보인다. 그래야 바뀐다. 아주 느리게 하나씩 하나씩.
225
연약해 부서지더라도 그걸 버티는 과정과 재건의 시간을 거치는 순간들의 나는 약하지 않다. 버티다 보면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오늘 같은 변화가 온다. 그리고 알 수 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런 신비로운 비밀에 대해서. 연약하지만 약하지는 않은 세상의 많은 이들과 연결될 수 있다.

자주 했던 말처럼, 인간은 섬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위로가 위로를, 이해가 이해를, 변화가 변화를 부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중물샘의 오랜 회복일지, "다시 내가 되는 길"에 동행할 모두에게 행복하고 나른하고 깔깔 웃다가도 싫은 건 툭 털어버리는 하루가, 누구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도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이 당연한 것이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또 하루를 시작해 힘든 날엔 화도 내고 소리도 좀 지르고, 아 할 일 있었지-하는 와중에 아니 어느새 또 트위터를!의 순간도 좀 갖고 말이다(그래, 수제트윗 좀 써주시라. 이왕이면 나 심심할 때). 그렇게 스스로가 되는 길의 길목마다, 언젠가의 끝에 쉬어갈 자리가 있기를 바란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서로에게 동행자, 쉼터, 눈부신 나날이기를.
277
내 안에는 남에게서 받은 위로들이 많이 쌓여 있다. 위로는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흐르게 되어 있으므로 나에게는 남을 위로하기 위한 엄청난 자원이 있는 셈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힘든 삶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잘 버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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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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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계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신춘문예 등단 이후 두 번째 작품"에 독자는, 평론가는, 문단은 무엇을 기대할까. 혹자는 등단 이후 "인정받은 작가"로서의 첫 행보에 설렐 것이고, 혹자는 그래봐야 풋내기 아니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애송이, 신인, 짧은 경력.
기실 문학 또한 사람의 일이니 확신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이 얇은 책 한 권 전체가 무엇하나 안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차있다. 작품 하나, 문장 하나까지도 매섭다. "신참"이라는 말에는 그저 적응하지 못한, 물정 모르는,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따위의 의미가 깔려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닳아 순해지지 않은 시선이 가장 날카롭고, 갓 터져오른 화산이 가장 폭발적인 법 아니겠는가.
p.58 저는 그에게 시스템의 논리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이자, 스승의 책무니까요. 더구나 문학이란 인간됨을 가르치는 학문 아닙니까. 그는 한갓 기예로써 문학을 다루려 했지만요. 문학을 통해 길러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p.70 그가 언급하는 시인들은 저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명성과 실력이 아직 여물지 않은 그들까진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문단의 온갖 추문들을 끌고 와서 피곤하기만 한 논쟁을 벌이려 할 때에도 저는 그에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쏟다간 온화한 시심만 흐트러진다'며 꾸짖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대장장이는 쇠를 두드려 무언가를 만든다. 그렇다면 작가의 일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인가? 글만 쓴다면 모두가 작가인가. 작가와 문학의 자격을 논하려면 석달열흘로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그러니 단 한 마디로, 작가는 익숙함을 낯선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낯선 시간과 공간, 때로는 상황에서, 인간의 감각은 평소의 것 이상으로 날카로워진다. 아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또 생생하며, 낯선 시공이나 익숙함 속의 낯선 상황에 놓인 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포함한 것을 의식 밖으로 밀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개인은 적응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다시금 주의의 대상으로 끌어오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파격적"이니 "문단의 충격"이니 상투어가 되어버린 그 익숙한 말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 그대로의 파격과 충격은 신인 또는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만 보낼 수 있는, 어쩌면 최대의 찬사가 아니겠는가.
p.40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그는 늙었고 산 아래 사람들은 미숙해졌다. 뒷덜미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p.106 어느 순간부터 윤 여사는 다른 인간의 먹고 잠자고 입는 방식에까지 참견하게 됐다. 대부분 비슷하게 먹고 잠자고 입었으나, 가끔은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는 존재도 있었다. 윤 여사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으려 하는 인경이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따금 이런 말을 한다. 너만 상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따져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조롱하고 낮잡아보는 속내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더 드물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세간의 인식"으로 포장될 때는 더더욱. 우리가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고고하고 또 추악한가.
그리하여 닿지 않을 사과, 돌려주지 못할 말과 마음에 대해 곱씹어보고 한다. 들을 이와 의지가 부재하는 사죄와, 반성은 얼마나 참담하고 또 절망스러운가.
p.162 레이를 다시 본 건 병철이 고령 운전자가 어쩌고 했던 뉴스까지 싸잡아서 신나게 뇌까리던 도중이었다. (…) 저 차에 환자가 타고 있거나, 어쩌면 저렇게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부름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다. 병철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멋대로 지껄였던 얘기들에 대해서는, 거기서 오는 죄악감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에게라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p.200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정말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받아 들지 않는다면, 그걸 어떻게 제게 주시겠습니까? 제가 받지 않을 건데." (…) 눈밭에 피를 조금 튀기면 저 검정 패딩과 왠지 어제보다 홀쭉해진 가방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주둥이를 벌리고 썩지 않은 치아를 뽑아서 차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져가지 않겠다는 검은 봉지를 사마귀의 손에 돌려줄 방법 은 없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가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한줌의 우월감이라도 품고 있다면 이왕 하는 것 한껏 오만하기를 바란다. 아주 높이, 지극히 고고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작품 속 주인공에서, 작가 후기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뜨거운 애정과 서릿발같은 비판이 뒤엉킨 문장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수많은 신인이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나란한 곳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말할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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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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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묻고 싶다.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이되, 내가 겪지 않았던 시대의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살고있는 지금,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되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앞선 물음에 바로 내가 그렇다고 손을 들지는 않아도 이미 한두마디씩 말을 얹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나, 막상 말해보라, 어느 누가 그럴 수 있는가, 질문을 받으면 어물거릴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전에도 존재했고, 아마 아주 오래된 이름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창조물인 그것,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인종. 이 책은 그들의 통사도, 옹호도, 비난도 아닌 그저 이해해보려는 노력일 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의 한계와도 같이. 책에서 말하듯 "이 책이 겨루려는 대상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얽힌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놓고 극단적 편향으로 양분된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한쪽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선', 다른 한쪽은 '악'으로 바라본다. 유대인,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직접적 관련성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인들이 특히 그렇다(p.6)."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의 텍스트나 유대민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한국 보수 개신교단, 한국 도서시장에서 유대인은 일종의 롤모델에 가깝다. 선택받은 민족, 신의 역사를 드러낼 증거물, 성공가도를 달리게 해줄 교육문화와 자본이라는 장점이 마음에 꼭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유대인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작정 내보내기에는 정착해온 시간이 있지 않은가.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선인가, 악인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편향 인식을 교정하는 첫걸음은, 유대인은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타고난 능력의 선민이나 음모 집단이 아니다. 유대인의 고난과 성취는 역사적 환경이 만들어냈다(p.7)."

과제용 독후감을 쓰듯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한국의 역사, 한 페이지로 요약하시오.'에 대한 솔직한 답이 '되겠는가?' 내지는 '얻어맞고 쥐어터지다 힘이 있을 땐 두들겨패러 쳐들어가고 꽤나 자주, 오래 숨죽여 살았다'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듯이.
이 책은 성서고고학의 시작부터 성서와 이스라엘의 기원, 디아스포라의 신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유대 공동체와 유대인 정체성, 그들이 사회에서 나름의 지위를 차지했던 역사와 근대 이후 유대인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서구 각국의유대 공동체와 시오니즘, 이스라엘 건국과 이후 현대까지의 분쟁을 다룬다. 이 중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톺아보려 해도 이만한 분량의 책 서너권은 너끈히 필요할 것이다.
대신 오래 고민해왔고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남기려 한다. '왜 인간을 이다지도 끊임없이, 오랜 시간,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또 집요하게 타 집단을 증오하고 가해하는가?' 우리는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의 선봉, 인간 문명의 최전선을 자부하던 동서 거대 문화권이 증오와 박해, 내분과 충돌로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집단,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일은 필수 절차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나라에 대봐도 조선만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낀 신세'로 쥐어터진 역사가 많지 않다. 적어도 양란기부터 한국전쟁 종전 후까지는 그렇다. 이런 '선량한 피해자의 아픈 역사'를 주입받고 자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도 유대인의 역사는 반 이상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에서 바울 기독교가 분화되고 그것이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의 역사가 그렇다. 이래서 몰리고 저래서 떼죽음에 차별과 배제가 그들 자신을 규정하고 결집시키는 정체성이 된 데에는 어디에서도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 에서 말했다. "만약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든다(p.15)." 오늘날 중동분쟁,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를 멸절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또는 반유대주의자에게 묻겠다. 그들이 먼저 존재했는가? 그들에게 속했다고 여겨지는 불변의 공통점은 누가 어떻게 규정하고 유지하는 것인가?
그런 그들이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 박해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대부분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을 이들이 허구와 진실을 넘나드는 기록의 폭력과 증오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심지어 그간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면서 당장의 폭력적 충돌과 가해를 멈추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악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현재에 대한 저자의 분석으로 처참한 심정을 대신한다. "인종주의 광기 때문에 집단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의 피와 뼈로 세운 이스라엘은 인종주의 범죄 경력이 있는 인물이 치안장관이 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역사는 잔인한 역설이다(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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