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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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사계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신춘문예 등단 이후 두 번째 작품"에 독자는, 평론가는, 문단은 무엇을 기대할까. 혹자는 등단 이후 "인정받은 작가"로서의 첫 행보에 설렐 것이고, 혹자는 그래봐야 풋내기 아니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애송이, 신인, 짧은 경력.
기실 문학 또한 사람의 일이니 확신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이 얇은 책 한 권 전체가 무엇하나 안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차있다. 작품 하나, 문장 하나까지도 매섭다. "신참"이라는 말에는 그저 적응하지 못한, 물정 모르는,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따위의 의미가 깔려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닳아 순해지지 않은 시선이 가장 날카롭고, 갓 터져오른 화산이 가장 폭발적인 법 아니겠는가.
p.58 저는 그에게 시스템의 논리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이자, 스승의 책무니까요. 더구나 문학이란 인간됨을 가르치는 학문 아닙니까. 그는 한갓 기예로써 문학을 다루려 했지만요. 문학을 통해 길러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p.70 그가 언급하는 시인들은 저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검증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명성과 실력이 아직 여물지 않은 그들까진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문단의 온갖 추문들을 끌고 와서 피곤하기만 한 논쟁을 벌이려 할 때에도 저는 그에게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쏟다간 온화한 시심만 흐트러진다'며 꾸짖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대장장이는 쇠를 두드려 무언가를 만든다. 그렇다면 작가의 일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인가? 글만 쓴다면 모두가 작가인가. 작가와 문학의 자격을 논하려면 석달열흘로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그러니 단 한 마디로, 작가는 익숙함을 낯선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낯선 시간과 공간, 때로는 상황에서, 인간의 감각은 평소의 것 이상으로 날카로워진다. 아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또 생생하며, 낯선 시공이나 익숙함 속의 낯선 상황에 놓인 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포함한 것을 의식 밖으로 밀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개인은 적응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다시금 주의의 대상으로 끌어오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파격적"이니 "문단의 충격"이니 상투어가 되어버린 그 익숙한 말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 그대로의 파격과 충격은 신인 또는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만 보낼 수 있는, 어쩌면 최대의 찬사가 아니겠는가.
p.40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그는 늙었고 산 아래 사람들은 미숙해졌다. 뒷덜미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p.106 어느 순간부터 윤 여사는 다른 인간의 먹고 잠자고 입는 방식에까지 참견하게 됐다. 대부분 비슷하게 먹고 잠자고 입었으나, 가끔은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는 존재도 있었다. 윤 여사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다르게 먹고 잠자고 입으려 하는 인경이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따금 이런 말을 한다. 너만 상대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따져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조롱하고 낮잡아보는 속내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더 드물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세간의 인식"으로 포장될 때는 더더욱. 우리가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고고하고 또 추악한가.
그리하여 닿지 않을 사과, 돌려주지 못할 말과 마음에 대해 곱씹어보고 한다. 들을 이와 의지가 부재하는 사죄와, 반성은 얼마나 참담하고 또 절망스러운가.
p.162 레이를 다시 본 건 병철이 고령 운전자가 어쩌고 했던 뉴스까지 싸잡아서 신나게 뇌까리던 도중이었다. (…) 저 차에 환자가 타고 있거나, 어쩌면 저렇게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부름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다. 병철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멋대로 지껄였던 얘기들에 대해서는, 거기서 오는 죄악감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에게라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p.200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정말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받아 들지 않는다면, 그걸 어떻게 제게 주시겠습니까? 제가 받지 않을 건데." (…) 눈밭에 피를 조금 튀기면 저 검정 패딩과 왠지 어제보다 홀쭉해진 가방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주둥이를 벌리고 썩지 않은 치아를 뽑아서 차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져가지 않겠다는 검은 봉지를 사마귀의 손에 돌려줄 방법 은 없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가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한줌의 우월감이라도 품고 있다면 이왕 하는 것 한껏 오만하기를 바란다. 아주 높이, 지극히 고고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작품 속 주인공에서, 작가 후기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했듯이, 어쩌면 뜨거운 애정과 서릿발같은 비판이 뒤엉킨 문장들을 세상에 내놓았던 수많은 신인이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나란한 곳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말할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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