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브램 스토커 지음, 진영인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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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윌북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공포의 원형'에는 무엇이 있을까. 죄책감이나 원한 따위의 응보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기원을 알 수 없거나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생물적인 두려움도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낯선 것', 그 중에서도 '낯설고 사악한 존재의 침입' 또한 그 뿌리가 깊지 않은가. 대개 그 둘이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 점에서 더더욱. 결국 공포의 대상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위세와 의미를 달리하며 인간과 함께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유럽의 오랜 흡혈귀 신화를 대중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온 첫 성공적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멀고도 낯선 이교도의 땅에서 온 사악한 죽음의 존재, 적어도 그 이름을 대치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말이다.

인외 존재 중에서도 '흡혈귀'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연구 대신, 오늘은 이렇게 묻기로 하자.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가? 신의 눈과도 같은 태양과 낮, 생명을 벗어나 우리 인간이 극도로 취약해지는 밤, 말도 길도 알 수 없는 '이교도'의 땅, 생명과 삶을 벗어난 존재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의. 문명시대 이래로 강자를 자처해왔던 인간이 피식자도 아닌 '먹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지위의 역전.
『드라큘라』는 흡입력있는 내용과 긴장 넘치는 전개를 제하고 전문이 일기 및 서간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데에서 형식적으로도 독보적인 작품이다. 낯선 곳에서 사악한 계략에 휘말려 쫓기던 이가 의로운 이들과 힘을 모아 악당을 퇴치한다는 뻔한(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나름 참신한 소재였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클리셰라는 '보장된 맛'으로 흥행하니 된 것 아닌가.) 스토리를 누가 700여쪽이 넘는 대서사로 풀어낼 수 있겠는가.
p.77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짐승처럼 핥았다. 혀로 하얗고 날카로운 이를 핥는 동안 달빛 아래 붉은 입술과 혀가 촉촉하게 빛났다. 여자가 고개를 더 숙이자 얼굴이 내 입과 턱 근처까지 왔는데 내 목이 목표인 것 같았다. (...) 내 목 피부가 달아올라 욱신거리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간지럼 태우는 손이 가까이 왔을 때처럼 피부가 곤두섰다. 달아오른 목 피부로 부드럽게 떨리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두 치아의 끝이 목 피부에 가만히 닿았다.
p.241 “잠들고 싶지 않나요?”
“네, 두려워요.”
“잠이 두렵다니! 왜죠? 다들 잠을 자고 싶어 하는데.”
“제 입장이 되어보면 다르게 생각하실 거예요. 잠이 무서운 일의 징조라고 생각해보세요.”


자 여기까지는 점잖게 남겨보려 애쓴 부분이고. 이하로 솔직한 감상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치겠어요 정말. 나도 이렇게 읽고 싶지 않은데 분명 호러고 공포로 점철된 글인데 아무리 노력해봐도 외국서 온 성격 좋은 젊은이를 욕망하는 고리짝 드라큘라 노백작 같아서 웃겨죽겠다고요. 이건... 호러 문학이죠? 독자를 웃기려고 넣은 장면은 단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등골이 오싹해지고 절망감에 눈물을 떨굴 수 밖에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작품이란 말입니다. 공포와 맞서싸우는 선한 의지, 용기에 감동해서 읽던 때도 있었지요, 물론.
그치만 생각해보세요. 삼백도 넘은 양반이 요 젊은이 한 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마부에 시종 노릇을 하질 않나, (들키진 않았지만) 헐레벌떡 뛰어들어가서 밥 차려주지, 잠자리 봐주지, 날이면 날마다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얘기 좀 하자고 붙잡아놓지를 않나... 태워줘, 먹여줘, 재워줘, 내보내줘 살려줘...!
자고로 생각없이 읽으면 웃다 숨 넘어가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뭐, 그렇게 되면 피는 안 빨렸으니 흡혈귀의 수하가 되지는 않겠군요. 그러니 내 무덤에 마늘만은 놓지 말아줘요 (정 불안하거든 바싹 구운 걸로 부탁해요... 그건 맛있으니까)...
p.38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유로이 들어왔다가 안전히 돌아가시오. 당신이 안고 온 행복을 조금만 남겨놓고 가면 좋겠소."
p.78 “감히 너희 셋이 이자를 건드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눈독을 들이다니, 물러나, 셋 다! 이 자는 내 것이야! 이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 나도 사랑할 줄 알아. 옛날과는 다르다고.“

물론 집필 시기가 시기인만큼 여성관이 영 구식이긴 합니다. 어쩌겠어요. 무덤에 대고 잠깐 나와보시라고 들볶을 수도 없고. 아무튼 한국에선 무리입니다. 마늘을 좀 덜 먹어보세요, 곰의 자손들아. 근처에도 못 오게 생겼잖니.
그러니 최선을 다한 새번역에 힘입어 읽어보세요. 포식자 앞의 인간, 동물적인 위협을 관능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문장과 쫓고 쫓기는 여정,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위협과 말 그대로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의 연대를.
p.458 우리가 싸움에서 진다면 그가 결국 승리를 거둘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결말은 어떨까? 사실 목숨이 문제가 아니야, 목숨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닌 거야. 우리가 진다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상황에 놓이게 될 거야. 우리도 그자와 같은 부류가 되겠지. 밤의 추악한 괴물이 되어 마음도 양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사냥하겠지. 우리에겐 천국의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문을 다시 열어주겠나? 우리는 영원히 혐오스러운 존재로 살 거야.
p.665 오늘 아침 우리는 불안하게 일출을 기다렸다. 반 헬싱은 최면을 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을 감안하여 평소보다 일찍 시작했다. 그렇지만 원래 최면에 걸리는 시간에 이르렀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갖은 애를 쓴 끝에 하커 부인이 최면에 빠졌지만 해가 뜨기까지 겨우 1분이 남았다.

덧, 오래된 명작인만큼 타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이 여럿입니다. 각각의 문체 차이와 일부 대사를 방언으로 번역한 문장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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