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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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묻고 싶다.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이되, 내가 겪지 않았던 시대의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살고있는 지금,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되 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 앞선 물음에 바로 내가 그렇다고 손을 들지는 않아도 이미 한두마디씩 말을 얹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나, 막상 말해보라, 어느 누가 그럴 수 있는가, 질문을 받으면 어물거릴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전에도 존재했고, 아마 아주 오래된 이름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창조물인 그것,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인종. 이 책은 그들의 통사도, 옹호도, 비난도 아닌 그저 이해해보려는 노력일 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의 한계와도 같이. 책에서 말하듯 "이 책이 겨루려는 대상은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얽힌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놓고 극단적 편향으로 양분된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한쪽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선', 다른 한쪽은 '악'으로 바라본다. 유대인,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직접적 관련성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인들이 특히 그렇다(p.6)."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의 텍스트나 유대민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한국 보수 개신교단, 한국 도서시장에서 유대인은 일종의 롤모델에 가깝다. 선택받은 민족, 신의 역사를 드러낼 증거물, 성공가도를 달리게 해줄 교육문화와 자본이라는 장점이 마음에 꼭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유대인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작정 내보내기에는 정착해온 시간이 있지 않은가.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선인가, 악인가?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극단적인 편향 인식을 교정하는 첫걸음은, 유대인은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타고난 능력의 선민이나 음모 집단이 아니다. 유대인의 고난과 성취는 역사적 환경이 만들어냈다(p.7)."

과제용 독후감을 쓰듯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한국의 역사, 한 페이지로 요약하시오.'에 대한 솔직한 답이 '되겠는가?' 내지는 '얻어맞고 쥐어터지다 힘이 있을 땐 두들겨패러 쳐들어가고 꽤나 자주, 오래 숨죽여 살았다'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듯이.
이 책은 성서고고학의 시작부터 성서와 이스라엘의 기원, 디아스포라의 신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유대 공동체와 유대인 정체성, 그들이 사회에서 나름의 지위를 차지했던 역사와 근대 이후 유대인 음모론과 반유대주의, 서구 각국의유대 공동체와 시오니즘, 이스라엘 건국과 이후 현대까지의 분쟁을 다룬다. 이 중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톺아보려 해도 이만한 분량의 책 서너권은 너끈히 필요할 것이다.
대신 오래 고민해왔고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남기려 한다. '왜 인간을 이다지도 끊임없이, 오랜 시간,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또 집요하게 타 집단을 증오하고 가해하는가?' 우리는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의 선봉, 인간 문명의 최전선을 자부하던 동서 거대 문화권이 증오와 박해, 내분과 충돌로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질적인 집단,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일은 필수 절차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나라에 대봐도 조선만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낀 신세'로 쥐어터진 역사가 많지 않다. 적어도 양란기부터 한국전쟁 종전 후까지는 그렇다. 이런 '선량한 피해자의 아픈 역사'를 주입받고 자란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도 유대인의 역사는 반 이상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에서 바울 기독교가 분화되고 그것이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의 역사가 그렇다. 이래서 몰리고 저래서 떼죽음에 차별과 배제가 그들 자신을 규정하고 결집시키는 정체성이 된 데에는 어디에서도 이방인이 아닐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 에서 말했다. "만약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든다(p.15)." 오늘날 중동분쟁,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를 멸절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또는 반유대주의자에게 묻겠다. 그들이 먼저 존재했는가? 그들에게 속했다고 여겨지는 불변의 공통점은 누가 어떻게 규정하고 유지하는 것인가?
그런 그들이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 박해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대부분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을 이들이 허구와 진실을 넘나드는 기록의 폭력과 증오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심지어 그간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면서 당장의 폭력적 충돌과 가해를 멈추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악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현재에 대한 저자의 분석으로 처참한 심정을 대신한다. "인종주의 광기 때문에 집단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의 피와 뼈로 세운 이스라엘은 인종주의 범죄 경력이 있는 인물이 치안장관이 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역사는 잔인한 역설이다(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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