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1~08 세트 - 전8권 전지적 독자 시점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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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유명한 작품이니 해석이나 줄거리 설명은 이른바 "찐팬"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개인적 감상을 써보기로 했다.
제목부터가 참 인상적이다. "전지적 독자"라, 전지적이면 전지적이고 독자면 독자지, 전지적 작가도 아니고 전지적 독자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의문은 첫 챕터를 시작하는 순간 바로 해결될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이자 세계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속칭 멸살법의 (아마도) 유일한 완주 독자인 주인공 김독자만이 한순간에 뒤엎어진 새로운 현실에 대해 전지적 존재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등장캐릭터-인물이라고 하기엔 사람이 아닌 게 너무 많지 않은가- 중 거대하고 엄청난 위력을 가진 이들도 한낱 화신, 즉 인간 김독자보다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제목은 그 자체로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전지적인 독자"와 "전지적인 캐릭터 김독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지와 전능은 흔히 함께 부여되는 속성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을 전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서사의 탄생 전부터 결말에 대한 결정권을 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 과연 전지전능한 작가란 존재할 수 있는가? 위대한 성좌와 성운 그 너머의 "강력한 존재"가 강대한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사인가, 아니면 존재의 긍정과 부정인가? 작가에게서 창조되어 독자에게 읽히는 소설은 작가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주인공 김독자를 포함해 스트리머, 즉 진행자인 도깨비와 인간을 관람과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성좌와 성운들까지 작품 내 그 누구도 전능하지 않다. 모두가 운명과 개연성이라는 거대한 구조 내의 일부일 뿐이며 그 누구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개중 스스로를 독자이자 하나의 존재라고 끊임없이 되뇌는 김독자만이 그나마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끊임없이 판을 벌이는, 유능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김독자는 변함없이 말한다. 나는 독자일 뿐이라고.

"가장 못생긴 왕"이 메시아의 칭호를 얻은 김에 익숙한 메시아, 예수의 예를 들어보자. 흔히 예수를 절대선이라고 한다. 천상의 뜻을 받들어 무려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하러 왔다지 않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예수는 지고한 선역이다. 그러나, 예수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시민이 아니다. 오히려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의 대표적인 악역, 자베르 경감이 모범시민에 가깝다. 그는 소속된 사회와 집단에서 옳은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규칙과 규율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규칙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악으로 규정에 처단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비록 흔들리는 면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위만은 "정의"라고 이름붙여진 질서에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대중적인 정의와 규칙은 사회의 권력구조를 포함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범시민이다.
주인공 김독자는 선역인가? 그의 신념과 행동은 선과 악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의 극단적인 자기희생과 끊임없는 투쟁의 기저에는 분명 세계에 대한 대의가 있다. 작가는 주인공 김독자를 선역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자고로 빠그러진(말이 좀 심하긴 하지만 유중혁 심성이 썩 고운 편은 아니지 않나...) 인성의 유중혁을 포함해 얼마나 피가 흐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든 간에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영웅이란 선역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쯤해서 다시 물을 수 있다. 김독자는 선한 인물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게는 분명한 대의가 있다. 어쩌면 이미 멸망해버린 이전 세계의 일상을 되돌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칠지는 몰라도 타인을 부러 죽음으로 밀어넣느니,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죽음마저 기꺼이 불사하는 인물이다. 이쯤되면 김독자의 본성은 매우 이타적이라는 평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모두에게 다정한 이는 누군가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비와 선은 분명 같은 영역을 공유하지만 같지 않다. 또한, 선하다는 것이 곧 다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김독자의 "동료"들에게 김독자는 선역일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함께를 말하며 홀로 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잔인하다'고 말한다.

진실의 눈이나 원작 줄거리에 대한 기억과 다르게 인간은 물론 도깨비와 성좌, 성운조차도 갖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김독자만의 스킬이있다. 제 4의벽이다. 이것(어쩌면 이 놈)은 새로운 세계의 물리적, 심리적 충격에서 김독자를 유리해 보호함과 동시에 현실을 비현실로, 타인을 등장인물, 즉 배경의 일부로 보게 한다. 이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현실과 비현실, 주체와 대상이라는 존재의 장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 타인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주친 현실과 타인을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앞의 문장을 다시금 말할 수 있겠다. 김독자는 말한다. 자신은 독자일 뿐이라고.
그들과 김독자 자신의 생명의 가치에서 스스로를 항상 뒷전으로 미룬다. 정리하자면 그는 선역으로 등장해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타인의 감정과 자신의 안위를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잔인한 면모가 있다. 선역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쩐지 자꾸만 생사를 넘나드는 우리의 주인공 김독자는 소시민이다. 사회의 당당한 산업역군! 이 시대의 젊은이! 라고 하기엔 그의 삶은 너무나도 소소하고 눅눅하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인물이었고 멸살법이 재현되는 세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영웅으로 여겨진다. 예수로 자주 일컬어지는 구원자 서사와 김독자의 활약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다시 빠그러진(...)영웅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길이 남는 미담 속의 영웅은 극단적인 이타주의자다. 이타심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타자,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해야한다. 분명 멸살법의 유중혁은 영웅이다. 가장 못생긴 왕, 메시아, 구원자 김독자는 영웅이다. 영웅의 제1미덕은 비정함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곧 구분하는 것이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용사, 영웅이 나아가는 길에 즐비한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비참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 누구도 피해입지 않는 전쟁은 없다. 삶은 전쟁이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고,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라는 말처럼. 영웅은 대의를 위한 전장에 선두로 서는 존재다. 영웅은 자신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가야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는 것이 바로 영웅이다. 비록 그 희생이 "우리"의 것보다 많고 처참할지라도. 소심한 영웅은 영웅으로 기억되지 못한다. 평생을 소심하게 살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어 희생을 이끈다. 나. 혹은 타자와 함께. 끌려가는 타자나 남겨지는 이들에게 그 희생이 달가울지는 글쎄,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판타지 소설이다. 가상세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이능력 전투물이다. 동시에 상처받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동안의 시간을 지탱해온 삶을 필사적으로 지켜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영웅의 특징은 "용사"에 더 가까운 의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김독자는 용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용사는 태생부터 고귀한 존재가 대의를 위해 무력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짚어본다면, 역시나 김독자는 영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태생부터 전개까지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과연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결말까지 영웅으로 부를 수 있을지. 그것은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해볼 수 있겠다.

p.s. 우리 독자 잘생기기만 했는데 왜 자꾸 못생겼다고 노래까지 부르고 그러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요. 스무권이 넘는 종이책을 보관할 공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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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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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것도 허리까지 쌓이는 눈은 여행지에서나 본,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말인즉슨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보라는 영화에서나 봐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이 책을 집어들 미래의 나와 또다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처럼 보라고, 그러는 편이 좋을거라고.

장르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일종의 통용되는 룰처럼요. 예를 들면, 로맨스소설에는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등장한다든지, 서로로 인해 낭만적인-피폐물의 지옥같은 사랑도 아무튼 사랑이긴 하지요?- 순간을 경험한다든지,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는 영웅적인 주인공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기적같은 조력자들 같은, 그런 필수아이템들이 아, 이게 이런 장르구나, 하고 작품을 이해하고 몷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제부터 소개할 책인 『내 동생의 무덤』 같은 스릴러에는 등장인물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폐쇄적인 배경이나 사건이 필요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제일 중요한 용의자나 악당,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이 밑도끝도 없이 냅다 해외로 가버린다면? 사건의 전말을 독자에게 알려줘야 할 시점에 자기들까리 메시지나 주고받으면서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판을 짜서 빠져나간다면? 남겨진 독자는 솜사탕 잃은 너구리처럼 나도...! 나도 데려가...! 하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다구요. 여기서는 재난을 넘어 재양에 가까운 폭설과 눈폭풍이 그런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줍니다. 쥐구멍은 이 폭설맨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책을 읽다보면, 읽기 좋은 책은 그 이유가 대체로 비슷하고 대단치 않지만 읽기 힘든 데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요. 이번에는 내내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 감정들이 휘몰아쳐 당장이라도 덮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치만? 절로 코끝을 문지르고 이불을 뒤집어쓰게되는 추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음이 궁금해 책장을 멈출 수 없게 하는 필력이 어우러저 아주 괴로웠어요. 언젠가 작가에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읽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재주라고 하겠습니다... 용서못해... 그치만 재밌었어요 또 써주세요 차기작 언제 나오지요?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고 제각기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겠지만 과연 서로를 완벽하게 아는 사이가 있을까요? 평생을 함께해온 가족? 마찬가지로 나고 자란 마을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댔던 이웃들? 당신은 그들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나요? 만일, 내 가족이 죽었는데, 살해당했는데, 믿고싶지 않았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나는 그 애를 반평생 찾아왔는데. 범인으로 지목된 자가 그 과정도 이유도 여전히 미심쩍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찾아간 고향의 이웃은 어딘가 의심스럽고 나를 적대하는 것만 같다면? 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까지도?
한치앞도 모르는 눈보라속에서는 길을 잃기가 쉽지요. 엉뚱한 길로 가기도, 제자리에서 맴돌다 파묻히기도, 제대로 나아가는 줆로 알았지만 실은 죽을 길을 찾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지와 작중배경, 주인공 트레이시가 처한 상황을 폭설로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막다른 곳에서 길잃은 자의 절망이란, 아물지 못한 상처를 비밀로 후벼가며 끌어안고 사는 마음이란 대체 얼만큼의 무게로 삶을 짓누르는 걸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스릴러입니다. 법정스릴러, 추리소설. 거칠고 축축하고 진창같은 피로에 절어버린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것처럼 작은 마을의 눈보라, 도망칠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곳. 숨죽이는 긴장감으로 그치지 않고,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던,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제목의 "내 동생의 무덤"은 과연 어디일까요.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곳? 평생을 담고 살아왔던 주인공과 아버지, 동생 세라를 사랑했던 이들의 마음? 아니면 누구도 몰랐던, 아이처럼 웅크려 파묻힌 그 곳? 어디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장르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을 에이는 바람에 쏟아질 것만 같은 구름이 몰려오고 세상이 눈으로 덮여 숨죽이는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긴 겨울밤을 함께할, 페이지터너. 로버트 두고니의 『내 동생의 무덤』입니다.

좋은 책을 함께할 기회를 주신 출판사 비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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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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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초판이 2007년이니 꼬박 11년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나 다시 읽어보는 책이다. 초판본은 표지가 무서워 사질 못했는데, 그게 두고두고 후회될만큼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얼마나 사랑했는지 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이다. 내 청소년기 독서 생활의 3분의 1 정도는 온다 리쿠에게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것이 국내 번역된 작품 중 그 때 읽었던 것들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나머지 3분의 1은 철학과 미야베 미유키에 빚지고 있다. 개중 후자는 온다와 미야베 세계를 냉탕 온탕처럼 오가며 흠뻑 젖는 즐거움에 빠졌던 데에 큰 공이 있으니 두 작가가 내 어린날을 기둥처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런지.
화려한 표지를 지나 첫장을 넘기며 오랜만에 든 생각. 아. 이 양반 불친절의 끝을 달리는 작가였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구나. 처음부터 화자와 청자가 불분명하다. 소설에는 독백이라 할지라도 독자라는 청중이 있다. 여기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풀어놓는 조각들을 움켜쥐고 맞춰가며 결말에 이르러서야 아!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중 화자들의 시간도 제각각, 배경도 제각각, 내용도 제각각. 쓰는 동안 고생한 만큼 읽는 것도 고생 좀 해보라는 건가. 묘하게 분통터졌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날의 기분을 제공해주신 약 11년전의 저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땡큐.

갑작스럽지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캐릭터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첫 화자에게 흥미를 느꼈습니다.(feat. ARuFa)
앞서 말한 불친절의 끝을 달리는 서술 방식은 온다 리쿠의 개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련하게 흐려진 기억처럼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작품의 맛을 즐기라는 배려이리라. 시간이 흘러 얼기설기 미화되고 때로는 단단히 봉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기억의 조각들과, 파편화된 진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불안. 늦여름같다... 분명 완연한 겨울 날씨에 솜이불을 둘렀건만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 숨막히는 구름의 습기가 느껴진다. 뒤이어 등장하는 화자들도 간간이 던져주는 힌트를 제외하면 관계나 정체를 유추하는 데 다소 품이 든다. 여러모로 에너지를 요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아. 하는 탄식만을 남기고 가물거리며 흐려지는 장면에... 흠뻑 젖어 쓰러지길 바란다. 코끝을 스치는 백일홍의 향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바람에, 고요한 푸른 방과 창백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취해.
노스탤지어가 무엇인지 첫맛을 보여준 작품, 해묵은 악의가 빚어내는 참극을 헤집는 마음을 가늠해보게 한 작품, 어쩐지 예스러운 단어들이 퍽 잘 어울려 그마저도 즐거운 작품.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겨울의 문턱에서 늦여름을 그리는 마음으로.


덧붙여.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떠올랐던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을 소개해둡니다.
1. 『여름의 마지막 장미』
2. 『달의 뒷면』 , 『어제의 세계』
3. 『몽위』(p.324)
4. 『코끼리와 귀울음』
5. 『여섯번째 사요코』, 『흑과 다의 환상』, 『삼월은 붉은 구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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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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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이라니! 여름이 지난 이 시점에 괴담이라니! 반갑지 않을 리가! 습습한 열대야만큼이나 조여오는 공포와 그 실체를 파헤치는 이야기에 걸맞은 계절이 바로 겨울 아니던가!
개별 작품이 우로보로스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하나의 책을 이룬다. 그렇다고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위한 전초전일 뿐인 건 또 아니라, 연작과 메타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 편씩, 궤를 달리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보는 것도 좋겠다.(84일까지는 아니겠지만. 혹시 아나. 84일을 목표로 한다면 젓가락님 대신 책갈피님이 나타나실지.) 첫 편을 제외하면 순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읽어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지만, 가능한 순서대로 읽는 편이 단서가 연결되는 느낌이 들어 몰입하기에 좋다.
단편집이되 단편집 같지가 않다. 앨범같기도,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독특하고 실험적인 책이라는 말로 아쉬운 마음을 뭉뚱그릴 수 밖에. 괴담이라는 익숙한 장르에서 이렇게까지 참신한 구조를 뽑아낸 기획자의 창의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역시. 084 괴담 네버 다이.

지난 SF 후기에서도 했던 말이지만, 호러 역시 현실을 다루는 장르다. 물론 내가 만든 말이지만. 초현실을 다루는 작품은 반대로 현실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장르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단편집 아닌 단편집은 여러 작가가 젓가락과 "이것"(을 찾아내시는 분께 칭찬의 박수를 드립니다. 짝짝짝.)을 매개로 써내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을 넘나들며 풀어놓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홀라당 까먹고 다시 읽을 미래의 나를 포함해 읽을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내용은 생략하고. 아래에 수록작 별로 간단한 감상을 달아둔다.

덤. 얼마 전에 sns에서 반가운 이미지를 봤다.밥에 젓가락을 세워 꽂는 게 제삿밥 내지는 부정한 행동으로 인식되는건 동아시아 문화권의 통념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던가... 표지를 보라. 벌써부터 재수가 없다. 욕이 아니라, 밥상머리에서 저러고 있는걸 보였다가는 당장에 여기저기서 한소리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재수없게 그런 짓을 하냐고.(젯밥이냐? 는 덤이다.) 부정한 것은 죽은 이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경계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보자. 재미가 두 배.

1. 마쓰다 신조 「젓가락님」
가장 일본스럽고 호러소설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작품. 도시전설의 공포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 인한 공포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공포의 대상은 고립과 억압의 대상과 같거나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저주가 괜히 있겠는가. 사회에서 용인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거나 정당한 방어와 공격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저주의 실행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고립과 궁지에 몰린 간절함이 만들어 내는 공포를 즐겨보자. 뒷 내용을 생각하지 말고 푹 빠져 읽는 것을 추천.

2. 쉐시쓰 「산호 뼈」
괴담, 공포는 사회적 장르다. 공포 혹은 증오의 대상으로 지적되는 것에 함축된 억압과 사회역동을 얼마나, 어떻게 녹여내는 지가 단순한 이야깃거리와 문학을 가르는 지점이 아닐까.
산호 뼈? 제목만 봐서는 알듯말듯하다. 바다의 나무처럼 보이는 산호가 사실은 동물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막상 뼈라고 하니 묘한 기분이다. 오래된 고목을 베었더니 피가 솟아나왔다는 민담처럼. 창백하고 조용한, 묘하게 주변과 유리된 인상을 주는 소년이 걸고 다니는 젓가락에는, 그 안에 깃든 신에게는 무슨 힘이 있길래 온 집안이 나서 섬기는걸까. 비단 가족뿐만이 아니라 어느 집단이든 성원 전체가 경원하며 복종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 집단은 필연적으로 건강이나 행복과는 묘한 거리를 두게 된다. 소년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소년의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 기억해두세요. 마지막까지.
앞선 수록작보다는 좀더 집착, 절망으로 빚은 아동학대의 말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삶을 찾아나가려는 두 주인공의 노력을 응원하게 되는 작품이다.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그 "수수께끼"까지.

3. 에터우쯔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얘기하라면 일주일은 너끈히 침 튀기며 화낼 수 있는 주제가 나왔다. 1인 미디어 시대에 난립하는 인기몰이용 개인방송과 찌라시. 초현실과 현실을 묘하게 뒤섞어놓은 전개와 마지막의 묵직한 한 방이 매력적이면서도 오해와 악의가 불러오는 죽음과 복수, 선망의 대상이 추락했을 때 대중이 보이는 반응에 대한 지적이 돋보인다. 현대 중화권(으로 묶이는) 이슈에 밝다면 작품에 등장하지 않은 묘한 긴장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작품까지 세계관과 등장인물 간 관계를 잘 기억해두기를 바랍니다. 두 배로 재밌어요. 덤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초지일관 누군가를 절대 악역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 축하합니다. 당신도 똑같은 사람.

4. 샤오샹선 「악어 꿈」
이걸 액자식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이 작품만 묘하게 시대가 다른 것 같다 싶더라니, 과연 옳았다. 현대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보다 풍부하게 그려볼 수 있는 시대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속삭임인지 저주인지 고백인지 모호한 문체가 아주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무섭다기보단 슬프고 서러운 느낌이었으니 언젠가 이 작품을 기반으로 동북아권 여성주의 문학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다. 여러 부분에서 너무나도 참혹해 눈을 질끈 감지 않을 수가 없고 익히 아는 역겨움에 입매를 비틀지 않을 수가 없으니..
앞선 네 작품을 하나로 묶는 듯한 내용인만큼, 여기서 등장하는 문장이 이 소설집 전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규칙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특히 권력관계를 반영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는 각 관계에 따라 변하죠."(p.334)

5. 찬호께이 「해시노어」
솔직히, 초반부에는 이게 해제인지 수록작인지 긴가민가 하는 마음이었다. 인물과 중심 소재인 젓가락과 저주, "이것"으로 소설 전체가 연결되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앞선 네 작품이 호러에 가까웠다면 이번 수록작은 좀 더 뭐랄까. 도시 활극에 가까운 느낌이다. 손에 땀을 쥐는 마음으로 읽는 것을 추천하다는 뜻이지요. 수록 순서대로 작품 4와 작품 2, 1이, 작품 5와 작품4, 3이 연결된다는 작은 힌트를 선물처럼 남기겠습니다.
다만 이 좀… 그… 도덕적인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은 순간은 있었네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으니 저자가 쓰고 출판부가 냈겠지만 청소년과 성인이라니요...? 내가 너무... 좀...? 그걸 제외한다면 찬호께이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나는, 힘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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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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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지원받고 쓰는 개인적 후기입니다

기레기, 권력의 개, 파파라치... 현대의 언론을 수식하는 말들이 화려하기도 하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수두룩하게 쏟아지는 게 거짓말에 혐오선동에, 이게 언론사인지 공작교실인지 모를 오려붙이기 아니던가. 언제부터 언론에게 올바른 정보전달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사기만 치지 말라고 두 손 모아 빌게 되었는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언론이 된 건지.
이런 시대에 언론인, 이제는 원로-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가?-라고 불릴 때도 된 손석희의 에세이라니. 웃을 일인지 울 일인지 모르겠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손석희가 사장으로 있는 모 방송국은 똥을 싸고 있고...!(미안합니다. 그치만? 니들이 먼저?) 그래도 읽었으니 기록은 남겨두어야겠고, 이 글을 읽는 미래의 나와 현재의 누군가들이 이해심을 갖고 함께 괴로워해 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난과 역경의 민족.
이러나 저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론계에서 뼈가 굵은, 몇 안 되게 점잖은 언론인이라 그런지. 머리말이 아주 인상깊다. 이대로 언론이 그저 자본의 홍보지, 권력의 공작수단 이상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냐는 우려에 충분히 답하고 있으니.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손석희 본인이 언론인으로서 겪었던 사건들, 뉴스들, 현장과 스튜디오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뒷이야기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언론인이자 방송 이면의 사람 손석희의 이야기를. 그치만 가볍게는 아니고. 무겁게. 묵직하게. 다음에 읽을 나야. 무겁단다. 기억하렴.

에세이긴 하지만 직업 특성상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수많은 이들의 공분을 이끌어냈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부끄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내심 나는 이것들을 지나간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화면 너머의 일이라고 거리를 두었던 그 때 그 방관자의 위치에서 조금도 변한 게 없구나. 아마 이 책의 사건들을 몰랐던 이는 적게나마 있을지 몰라도 알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심이 없는 사람이리라.
에세이지만 에세이가 아니다. 개인의 이야기일 수 없는 사건을 이야기하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잊혀지는 것은... 힘이 없다. 힘이 없어 잊혀지기도, 잊혀지면서 힘을 잃기도, 힘을 빼앗기 위해 잊혀지기도 한다. 수록된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명확해지기도 한다. 결국은 그 모든 "장면들"을 통해 독자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우리는 달라졌는가.' 라고.

한 시인은 홀로 남아있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정호승, 「새벽편지」) 변하는 이도, 변하지 않는 이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하겠지. 살아남기 급급해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에서.
p.27 "선배,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마십쇼."
그에게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한다는 건 그때까지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변한 다음 비난받는 것이 무서워서라도 잘 못 변한다.'

언론의 책무가 무엇인가. 대중은 물어야 한다. 기자가 기레기로 불릴 때, 언론이 권력의 손아 귀에 붙들려 사람을 기삿거리로 만들 때, 그 때야말로 대중은 물어야 한다. 언론의 책무가 무엇인가. 권력을 향해야 할 언론이 칼자루를 거꾸로 쥐었을 때, 대중은 무엇을 요구하고 경계해야 하는가? 이 책은 만능이 아니고, 답을 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언젠가 좀 더 삶의 경험이 쌓였을 때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훗날의 나에게,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수많은 진심을 한 문장으로 남긴다.
p.325 "한놈만 미안하다고 해라... 한놈만..."

덤. 생각해보자.
언론인이 유명인이 되어, 정치인과 자본가, 주변인이 유명인이 되어 인신공격의 타겟이 되어 마땅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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