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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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초판이 2007년이니 꼬박 11년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나 다시 읽어보는 책이다. 초판본은 표지가 무서워 사질 못했는데, 그게 두고두고 후회될만큼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얼마나 사랑했는지 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것이다. 내 청소년기 독서 생활의 3분의 1 정도는 온다 리쿠에게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것이 국내 번역된 작품 중 그 때 읽었던 것들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 나머지 3분의 1은 철학과 미야베 미유키에 빚지고 있다. 개중 후자는 온다와 미야베 세계를 냉탕 온탕처럼 오가며 흠뻑 젖는 즐거움에 빠졌던 데에 큰 공이 있으니 두 작가가 내 어린날을 기둥처럼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런지.
화려한 표지를 지나 첫장을 넘기며 오랜만에 든 생각. 아. 이 양반 불친절의 끝을 달리는 작가였지.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구나. 처음부터 화자와 청자가 불분명하다. 소설에는 독백이라 할지라도 독자라는 청중이 있다. 여기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풀어놓는 조각들을 움켜쥐고 맞춰가며 결말에 이르러서야 아! 하고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중 화자들의 시간도 제각각, 배경도 제각각, 내용도 제각각. 쓰는 동안 고생한 만큼 읽는 것도 고생 좀 해보라는 건가. 묘하게 분통터졌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날의 기분을 제공해주신 약 11년전의 저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땡큐.

갑작스럽지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캐릭터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첫 화자에게 흥미를 느꼈습니다.(feat. ARuFa)
앞서 말한 불친절의 끝을 달리는 서술 방식은 온다 리쿠의 개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련하게 흐려진 기억처럼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작품의 맛을 즐기라는 배려이리라. 시간이 흘러 얼기설기 미화되고 때로는 단단히 봉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기억의 조각들과, 파편화된 진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불안. 늦여름같다... 분명 완연한 겨울 날씨에 솜이불을 둘렀건만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 숨막히는 구름의 습기가 느껴진다. 뒤이어 등장하는 화자들도 간간이 던져주는 힌트를 제외하면 관계나 정체를 유추하는 데 다소 품이 든다. 여러모로 에너지를 요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아. 하는 탄식만을 남기고 가물거리며 흐려지는 장면에... 흠뻑 젖어 쓰러지길 바란다. 코끝을 스치는 백일홍의 향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바람에, 고요한 푸른 방과 창백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취해.
노스탤지어가 무엇인지 첫맛을 보여준 작품, 해묵은 악의가 빚어내는 참극을 헤집는 마음을 가늠해보게 한 작품, 어쩐지 예스러운 단어들이 퍽 잘 어울려 그마저도 즐거운 작품.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겨울의 문턱에서 늦여름을 그리는 마음으로.


덧붙여.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떠올랐던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을 소개해둡니다.
1. 『여름의 마지막 장미』
2. 『달의 뒷면』 , 『어제의 세계』
3. 『몽위』(p.324)
4. 『코끼리와 귀울음』
5. 『여섯번째 사요코』, 『흑과 다의 환상』, 『삼월은 붉은 구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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