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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것도 허리까지 쌓이는 눈은 여행지에서나 본,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말인즉슨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보라는 영화에서나 봐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이 책을 집어들 미래의 나와 또다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처럼 보라고, 그러는 편이 좋을거라고.
장르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일종의 통용되는 룰처럼요. 예를 들면, 로맨스소설에는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등장한다든지, 서로로 인해 낭만적인-피폐물의 지옥같은 사랑도 아무튼 사랑이긴 하지요?- 순간을 경험한다든지,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는 영웅적인 주인공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기적같은 조력자들 같은, 그런 필수아이템들이 아, 이게 이런 장르구나, 하고 작품을 이해하고 몷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제부터 소개할 책인 『내 동생의 무덤』 같은 스릴러에는 등장인물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폐쇄적인 배경이나 사건이 필요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제일 중요한 용의자나 악당,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이 밑도끝도 없이 냅다 해외로 가버린다면? 사건의 전말을 독자에게 알려줘야 할 시점에 자기들까리 메시지나 주고받으면서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판을 짜서 빠져나간다면? 남겨진 독자는 솜사탕 잃은 너구리처럼 나도...! 나도 데려가...! 하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다구요. 여기서는 재난을 넘어 재양에 가까운 폭설과 눈폭풍이 그런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해줍니다. 쥐구멍은 이 폭설맨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책을 읽다보면, 읽기 좋은 책은 그 이유가 대체로 비슷하고 대단치 않지만 읽기 힘든 데에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요. 이번에는 내내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 감정들이 휘몰아쳐 당장이라도 덮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치만? 절로 코끝을 문지르고 이불을 뒤집어쓰게되는 추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음이 궁금해 책장을 멈출 수 없게 하는 필력이 어우러저 아주 괴로웠어요. 언젠가 작가에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읽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재주라고 하겠습니다... 용서못해... 그치만 재밌었어요 또 써주세요 차기작 언제 나오지요?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고 제각기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겠지만 과연 서로를 완벽하게 아는 사이가 있을까요? 평생을 함께해온 가족? 마찬가지로 나고 자란 마을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댔던 이웃들? 당신은 그들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나요? 만일, 내 가족이 죽었는데, 살해당했는데, 믿고싶지 않았지만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나는 그 애를 반평생 찾아왔는데. 범인으로 지목된 자가 그 과정도 이유도 여전히 미심쩍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찾아간 고향의 이웃은 어딘가 의심스럽고 나를 적대하는 것만 같다면? 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까지도?
한치앞도 모르는 눈보라속에서는 길을 잃기가 쉽지요. 엉뚱한 길로 가기도, 제자리에서 맴돌다 파묻히기도, 제대로 나아가는 줆로 알았지만 실은 죽을 길을 찾아가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지와 작중배경, 주인공 트레이시가 처한 상황을 폭설로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막다른 곳에서 길잃은 자의 절망이란, 아물지 못한 상처를 비밀로 후벼가며 끌어안고 사는 마음이란 대체 얼만큼의 무게로 삶을 짓누르는 걸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스릴러입니다. 법정스릴러, 추리소설. 거칠고 축축하고 진창같은 피로에 절어버린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것처럼 작은 마을의 눈보라, 도망칠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곳. 숨죽이는 긴장감으로 그치지 않고,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던,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제목의 "내 동생의 무덤"은 과연 어디일까요.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곳? 평생을 담고 살아왔던 주인공과 아버지, 동생 세라를 사랑했던 이들의 마음? 아니면 누구도 몰랐던, 아이처럼 웅크려 파묻힌 그 곳? 어디로 읽어내느냐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장르가 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을 에이는 바람에 쏟아질 것만 같은 구름이 몰려오고 세상이 눈으로 덮여 숨죽이는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긴 겨울밤을 함께할, 페이지터너. 로버트 두고니의 『내 동생의 무덤』입니다.
좋은 책을 함께할 기회를 주신 출판사 비채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