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과잉 사회 - 성비 불균형이 불러온 폭력과 분노의 사회
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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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많은 이들이 이 말에 전쟁이나 전염병같은 끔찍한 "외부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고. 이 생각은 틀렸다. 동시에 절반의 진실이다. 여성이 사라지고,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사회에 자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간절히 원해진다. 이용가치가 충분하지만 충분한 가치를 갖지는 못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기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혹은 그 자신에게조차 현실이 아니던가? 여아라서 죽는다. 동시에 남성에게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가치있는 아들과 쓸모없지만 중요한 도구인 여성을 생산해야 한다. 남성우월사회에서 성감별낙태로 야기된 남성-과잉 인구는 낯설지 않다. 그 자신의 존재로는 충분하지 않으나 동시에 재생산에 막중한 임무를 갖는다. 낳아라, 낳지 마라, 누군가를 낳고 무언가는 "지워라".

p.41 2008년에 HIV 바이러스와 관련해 사용된 예산은 전 세계 건강 관련 지출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 하지만 성별 선택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수년 동안 출생신고 기록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인구통계 학자들, 그리고 여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살거나 살게 될 수억 명만이 알고 있는, 더욱 만연해 있지만 훨씬 조용한 전염병으로 남아 있다.

p.56 결국 성별 선택은 모든 사람이 성공하려고 애쓰는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여성은 비록 같은 여성을 희생시키면서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신을 세우려는 갈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좀 더 비극적인 다른 요인은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성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여성이 부족한 사회가 곧 여성상위사회는 아니다. "희소자원"이 더 큰 가치를 갖는다는 수요-공급 논리는 성-권력 앞에 힘을 잃는다. 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닌 "생식수단"이자 "인구조절도구"인 동시에 돌봄노동, 육아, 가사와 성욕 해소 등 일조의 "서비스 재화"로 취급되는 사회에서는 성감별낙태금지가 여성출생가능성을 높인다 하더라도 여성의 자율성과 존재-통제권 억압에 기여하게 된다.

남성우월사회에서의 "이득"과 선호, "인구통제"의 직간접적인 압력의 결과, 성감별낙태와 여성의 이중-가치화는 출생성비의 부자연화(unnatural selection)를 야기했고, 이는 상대적 남성과잉사회와 성병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등 그에 파생된 사회 문제, 출생률하락에서 인구 소멸로 이어지는 연쇄로 이어졌다. 여성이 "태어날 가치"를 갖지 못하는 사회는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p.217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 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

p.318 하지만 성비 불균형이 새로운 파시즘의 물결을 불러오거나 전면전이 불가피해질 정도로 아시아의 군대를 늘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지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헤스케스는 (...) "미혼 남성들이 결집할 경우 더욱 조직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남성 과잉의 결과는 향후 2, 30년 동안 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대다수는 이미 초고령화의 위기에 처해있다. 동시에 어디선가는 여전히 폭증하는 인구를 감당치 못한다. 많은 사회의 문제는 인구 수 그 자체보다 성비에 있다. 노화와 사망은 여전하나 출생률은 줄어든다. "인구조절수단" 그 자체인 여성이 줄어든 탓이다. "낳게 만든다" 이전에 "낳지 못하게 한다"에 더해 "골라 낳게 한다"가 있던 탓이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급증하는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성별선호-감별은 어째서 묵인되고 조장되었는가? 이 걷잡을 수 없는 문제의 실마리는 어디에 묻히는가? 남성과잉현상은 기술, 자본-제국주의, 국가권력,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얽혀있고, 성감별낙태는 단지 현재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성원들과 미래사회의 존속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자 결과다.

p.119 우리는 어떤 상표의 초음파 기계가 사용되는지, 성 감별 검사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혹은 낙태가 애초에 아시아에서 어떻게 그토록 만연하게 되었는지 듣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마치 생명 윤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는 기술에서 분명한 안도감을 얻는다. 또한 지난 수백 년간 인구 변화가 면밀하게 연구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발전이 인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먼저 따져보거나 신중히 검토하지 않는다.

p.359 몇십 년 전 인구 조절 운동이 출산을 관리해야 할 문제로 만들고 사람을 숫자로 바꾸어놓았다. 개발도상국의 부모들은 소가족이 성공적이라 배웠고 아이가 공장의 상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들의 '질'이 '양에 반비례한다고 단단히 교육받았다. (...) 현재 정부의 인구 조절이라는 개념이 구식처럼 들리는 반면 우리는 아직 생식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이 문제를 가족에게로 돌렸다. 중국과 캘리포니아를 막론하고 어머니들이 가족의 우생학자가 되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기술은 현상과 유리된 것으로 간주되며 가치중립의 환상 뒤에 숨는다. 미국의 실험실에서 탄생한 기술은 아시아에서 여아를 사라지게 하고 여성 인신매매와 성산업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는 "부적합한" 인구 통제와 기술자본권력의 팽창에의 욕망,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다는 오판이 있었다.

이미 사라진 존재를 되살릴 방법은 없다. 선택적 출산과 임신중단은 여성의 신체통제권과 결부되어 있으나 감소한 여성인구는 재화로서의 여성 쟁탈이라는 인권침해를 낳았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누가 먼저인가? 명쾌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선진국"의 누구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공수정연구소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선택이 인도의 낙태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태도는 분명 오만이다(365)".

p.259 레나 에들런드는 한 논문에서 성별 선택 기술이 더 저렴하고 정교해지고 더 널리 확산되고 또 세계의 중상층에서 태어나는 남아의 수가 증가하면서 가난한 국가들이 기회를 감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태아 성 감별과 관련된 가장 큰 위험은 최하층 계급의 여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우리는 성별이 소득과 계층에 따라 나뉘고 여성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p.365 개발도상국에서 성 감별과 낙태가 유행하는 데는 미국의 단체들에서 제공한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함께 수천 명의 현장 요원, 수많은 이동 진료소가 필요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을 만드는 의학 기술을 위해 자유롭게 국경을 건너며, 세계은행의 독려 없이도 훨씬 빠른 속도로 기술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새로운 책임이 생긴다.


*도서제공: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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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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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논리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부정할 데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발달한 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환경에서조차 이유를 쥐어짜내 납득하려 한다. 어떤 일에든 원인이 있다. 설령 그것이 완전한 허상일지라도, 누구를 위한 배제인지 모를 선동이라 할지라도, 파멸과 자멸로 향할 끝이 볼 보듯 뻔할지라도. 논리는 합리의 동의어가 아니다.

"미국인을 위한 미국"이란 기치 아래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이른바 PACT가 시행된 언젠가의 뉴욕, 그곳에 한 소년이 있다. 버드, 상상과 사랑이 가득한 시절을 빼앗긴, 그의 이름과 기억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파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 그의 '피'에 중국이 있기 때문에, 아니,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방인인, 이제는 '노아'여야 하는 소년.

p.19 그의 어머니가 파오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어떤 애들은 쿵파오라고 불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버드의 얼굴만 봐도 누구나 알았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고, 특히 광대뼈 기울기나 눈 모양에서 티가 났다. 당국에서는 파오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는 아니라고 늘 주지시켰다. PACT는 인종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과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라고 대통령은 늘 말했다.

p.110 중국을 연구하거나 일본 설화를 찾는 일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처럼 생긴 외모는 늘 위험했다. 그의 어머니의 자식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위험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늘 알았고 늘 대비했고 자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늘 예민한 상태로 있었다. 아버지가 두려워한 것은 어느 날 누군가 버드의 얼굴에서 적을 보는 일이었다. 혈통이든 행동이든, 누군가 그를 어머니의 아들로 보고 빼앗아가는 일.


미국은 여전히 미국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위기"가 있었다. 길고 익숙한, 설명할 수 없이 체제 자체에 내재된 침체. 어쨰서인가. 논리적인 동물, 인간은 이유를 찾았다. 아니, 누군가 말했고, 그것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깔고 앉은 권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자'가 있다. 그들이다.

마땅히 하등할 '그들'이 감히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원흉이자 적이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할 리가 없다. 어제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질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좀먹고, 훔쳤기 떄문이다. 사악한 자들. 본래적이고 선명해야 할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혐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국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라는 믿음이 정의를 집어삼켰다.

p.81 아니야, 우린 책을 불태우지 않아. 여기는 미국이야, 그렇지? 그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운다. 진심일까, 아니면 비꼬는 걸까? 버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린 우리 책을 태우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재생지 재료로 만든단다. 훨씬 문명화된 거지, 안 그래? 갈아서 재활용해 화장실 휴지를 만들어. 여기 없는 책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엉덩이를 닦는 데 쓰였을 거야.

p.229 우린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우리가 불황을 겪으면서 제일 잘사는 게 누구지? 사람들은 단호히 동쪽을 가리켰다. 중국의 GDP가 얼마나 올랐는지,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보라고. (...) 누군가 '위기'는 중국 짓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작과 관세와 환율 하락 때문이라고. 그들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싶어한다고. 우리 조국을 빼앗고 싶어한다고.


순수하고, 단일하며, '국가'가 모든 믿음과 가치를 독점하는 사회. 그것이 PACT의 이상이자 유일하게 허용되는 '정상'이다. 그를 위해 '무해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을 '위험분자'로부터 격리한다. 의심스럽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복종하라. '우리'는 다시 위대하고 강해질 것이다. 모든 분노와 두려움을 '그들'에게 쏟으라.

이 이야기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난 일'을 되짚기만 해도 선명히 드러난다.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유일한 동력이 되는 혐오, 배제, 위기의 촉발 혹은 재점화-방화.

p.227 Kre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래, 그녀가 읽는다. 판단하는 거지. 체와 비슷하네, 이선이 말했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떼어내는 거니까. 그래서 krisis는 더 좋든 나쁘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뜻한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섬세한 흉골 라인을 따라가 목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지 결정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p.305 처음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늙은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거릿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배우기 시작했다.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 (...) 오랜 의사를 가진 아동 납치는 각각 핑계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의 몸값을 치르는 일이 가장 큰 처벌이 될 수 있으므로. 닻과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을 뿌리 뽑으려는 시도, 어떤 이질성은 침범하는 잡초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선 노아는 균열에 도달한다. 허름하고, 형편없이 연약한 시도에. 해야할 일이 있어. 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해. 말하기 위해, 들어야 해. 어떤 말은 심장에 가닿는다. 머리보다도 먼저, 부서짐과 빼앗김의 감각으로. 추천사처럼, 이것은 단지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다. 동시에, 실패이자 현실이다. 좌절이다.

허구가 현실을 좀먹을 때, 현실이 허구로 검열되어야 할 때, 시대는 경고가 된다. 응답하라고, 지금이어야 한다고. 들어봐. 일이 벌어졌고, 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들어봐. 내가, 생각해봤어. 그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증언하기 위해.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p.371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래야 한다고 뼛속 깊이 느낀다. 반드시 직접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증언. 임종 지키기.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어떤 것들은 목격되어야 한다.

p.374 그녀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이름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해주길 원한다. 그들의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일어난 일보다, 그들이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간단한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 각자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명단 속 이름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다른 한 명의 사람으로.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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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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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3대째 이어져온 그 곳은 언젠가는 호텔이었고, 또 언젠가는 레스토랑이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찾아오는 이를 기다리고 맞이한다. 시대도, 사람도, 모습도 달라졌지만 여전한 환대로 기다리는 곳, 누군가가 머무르고 떠나는 그곳에 한 그루 벚나무가 있다.

사람보다도 더 오래도록 그곳에 뿌리 내리고 땅과 사람을 지켜온 늙은 나무 한 그루. 이 이야기는 묵묵하고 고요하게 존재해온 그의 말로 전해진다. 야에, 사쿠라코, 히오. 벚나무의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나날로.

p.9 해가 드는 쪽은 따뜻하지만 실내에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습기를 머금은 목조 건물 특유의 향긋한 나무와 흙 냄새가 코끝에 닿은 순간 히오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카페 체리 블라썸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만들어낸 냄새다. 히오는 이 공간을 둘러싼 공기를 온몸으로 흠뻑 마시고 나서 "자!" 하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p.54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그런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나날은 거의 비슷하다.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그날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문을 연다. 손님이 찾아온다. 이웃 주민이기도, 낯선 사람이기도, 삶에 지쳐 도망쳐왔거나, 썩 달갑지 않은 소란이기도 한 이들이. 서른 살에 가게를 물려받아 이제 막 3년차인 풋내기 사장 히오의 하루는 여전히 서툴고 어려운 것 투성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친절은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온통 번쩍이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서 속삭이는 고요함은, 휴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마음 따위는 번번이 실망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오래된 땅의 낡고 작은 공간은 그 마음을 아는 이들이 머무르고 오롯이 자기 안에 잠겼다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늙은 나무는 말할 수 없다.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품에 안고 다독여줄 수도 없다. 그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찰나를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 그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풍경처럼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곁에 서서. 온몸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p.160 말로 위로하기는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 쉽게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머리로는 이해하고 스스로를 타일러보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갈 곳을 잃은 진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쓸쓸하다는 마음의 소리만 끝없이 메아리쳤다.


생의 끄트머리에 선 인간은 그를 보며 유한한 삶을 절감한다. 봄 꽃, 여름 그늘, 가을 낙엽을 지나 죽은 듯이 앙상해지는 겨울 가지. 나무의 사계절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순간 하나 버릴 것도, 쓸모 없는 것도 없다는 것조차도.

시속 0km와 시속 4km의 존재가 자라고 늙어온 곳, 낯선 이가 머물고 쉬었다 가는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서툴고, 어렵고,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죽은 듯이 겨울을 보내고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오래된 나무처럼, 하루를 하루만큼 충실히 살아낸다면. 긴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다가올 가을을 본다. 살아가야지. 그렇게.

p.132 얼핏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벌레조차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커다란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물이 겨울을 나고 편히 쉬는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p.242 외할머니가 지켜낸 벚나무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꽃을 피운다. 나는 끝이 없는 이 순환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기적. 그때 부드러운 빛이 방 안을 빙 둘러쌌다. 시선을 들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장지문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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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하이드어웨이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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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동물이다. 상처입고 병든 동물은 도망쳐 숨어든다. 몸을 숨긴 채 아픈 곳을 핥고 문지르고 꽁꽁 웅크린다. 인간은 짐승이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무리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짐승. 이 무른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저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살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을, 사람을 가장 많이 해치는 존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이 되었다.

사람은 사람에 상처입고 상처입히며 다치고 병든 사람 사이에 살아간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본질이자 떼낼 수 없는 성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 여기 이 삭막한 도시에서 제각기의 이유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은신처가 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겹겹의 가면을 벗어두고 마음껏 취약해질 수 있는 곳.

p.59 왜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하는데? 본인은 그걸로 충분할지 모르겠으나 남은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 이후 나는... 기리토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생해서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닐까.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을 감쌌지만 내게는 변명으로만 들리더라. 다시 약한 게 가슴에 닿는다. 기리토는 짜증이 나 있는 힘껏 던진다.

p.128 도망치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말인가, 집에도 학교에도 숨을 데가 없는데. 무엇보다 아무 것도 안 한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도망까지 쳐야 한단 말인가. 도망치라고 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녀석들을 지금 당장 어떻게 좀 해달라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궁지에 몰린 인간 대다수는 눈앞의 고양이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약한, 관계도 없는 존재에 이를 드러낸다.


낯선 이들의 도시. 이방인과 타인으로 이루어진 사회. 그 말은 곧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서로에게 낯설고 차가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게들 적응하며 살아가는, 도시화된 사람들. 스스로에게도, 세계에도 소외된 이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오간다. 이변이 없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저 그럴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소의 평범한 사람들.

'평범' 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평범하다. 무력하거나, 고요하거나.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매일을 살아낸다. 대다수가 그렇게 하니까. 평범하니까. 정말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주어진 조건에 그럭저럭 부합하며, 자리와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p.80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아니, 그보다는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계약 사원인 마도카에게는 부조리함을 강요하고 직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나오야는 무난하게 대한다. 이게 정말 자신의 '역할'일까.

p.251 생각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우연하게 닿은 먹이를 먹으며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이게 가장 살기 쉬운 생태라면 나도 앞으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찾아오는 역할을 맡아 살아간다. 누가 나를 비웃을 수 있는가.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상처를 끌어안고 산다. 흉터에 가까운, 오래된 상처의 무게는 때때로, 벌겋게 드러나 피를 흘린다. 영원할 것처럼. 그들을 상처입히는 것은 세상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다. 상처를 핥고 또 핥아 덧나버리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피곤하고, 이해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굳이 그래야 하나 싶고. 나 하나 애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보통, 정상, 평범... 익숙한 압박과 피로들. 팍팍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삶에도 그들을 위로하는 것, 아니 곳이 있으니. 도심 속 은신처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동물이다. 다치고 병든 동물은 숨어들 곳이 필요하다. 도시의 동물들에게는 도시에서의 은신처가 있기 마련이다.

p.196 무엇보다도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야"라며 이해하는 듯 행동 하는 걸 보는 것도 우울하고 싫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 털어놓아도 거기에는 다시 "왜?" "어째서?"라는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부호가 달릴 것이다.

p.255 커다란 흐름을 거스르려 해봤자 소용없어. 직장 내 괴롭힘도 끈질긴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절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어. 처음에만 조금 소란스럽다가 결국은 또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야. 저항하면 피곤해질 뿐이야.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다고 후쿠시마는 당연한 듯 말했다. 상대는 어차피 그 정도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수다. 세상의 흐름은 다수가 만든다.


좀처럼 견디기 어려운 날이 있다. 마음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날이 있다. 살기 위해 도망치고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몸을 숨기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언제든 물러설 수 있다는 위로이자 모든 휴식처는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라는 현실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물을 닦고 해야 할 일로 돌아와야 한다. 다만 그 울음 끝에서,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것, 그것을 응원이라 부르고자 한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혹성에서 사니까(348)".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354). 책을 빌어 도시의 익명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오아시스는 어디인가요. 오늘의 당신을 쉬게 하는 그곳은.

p.285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은 요시오카와 후쿠시마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목소리가 큰 놈들을 너무 쉽게 따르는 자신 같은 무기력한 인간이야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말았다. 절대로 딸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더럽고 거친 세상의 파도를 만든 사람은 모든 걸 포기해온 자신이었다. 딸을 포기시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348 "간바야시 씨는 본인을 불완전하다고 하는데 완전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기리토의 질문에 리코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우리와 관계없고 지구는 흔들리고 있고... 제대로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도 난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 (...) 흔들리는 별. 지구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도쿄하이드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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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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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 아니, 전쟁이 끊이지 않게 함으로써 권력을 쥐는 이들의 나라에서 내몰린 사람이 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직장인이었고, 가족의 일원이며... 빨갱이. 불순분자. 그러므로 망명자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세계평화를 이름에 담은, 삶의 궤적이 곧 역사인, 이방인이 있다. 이방인의 이방인, 이방인 중에서도 또다시 낯설고 다른 자.

언젠가 이 책이 필독서인 동시에 불온서적인 때가 있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조용하기를, 나이 먹고 철들기를 거부(6)"하는 그는 빨갱이요 이단아였다. 시대의 참어른이었던 그를 기억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낯선 '어른'에서, 무지의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학생운동이 소멸한 도시의 교육과정에서 나는 내내 부끄러웠다.

p.81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 삼켰다. 서글픔이 앞섰다.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p.193 "한국에서는 이 모든 좌파가 빨갱이가 될 수 있소. 침묵하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러므로 극우가 아닌 실존주의자는 모두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오. (...)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오. 우습지 않소?"


불과 몇 년 새에 그의 이름을 낯설어진 젊은이가 많을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 썩 주류가 아닌 이들 외에는 그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제법 교양서의 영역(?)으로 넘어온 그의 이름에 설핏 웃었던 적도 있다. 잊혀지는가, 했다. 나아가는 시대다.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지난 해의 끝자락에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날 밤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믿음과 관용, 다양성을 다시 한 번 말소하려는, 드디어 아가리를 드러낸 퇴행에 맞닥뜨렸다. 수많은 이들이 저항했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히 확산되는 저항과 연대의 문화에 비해 여전히 장벽은 여전히, 아니, 새로이 공고하다. "우리 편"일 때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지만, 한 끗 차이로 "그들"의 혐오와 증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p.217 한편 마을사람들은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부도 그곳에 살았고 작은아버지도 그곳에 살았다. 내가 그곳에 갔던 날도 살고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 살았다. 마을사람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처럼 살았다. 죽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p.343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았던 바보였다. (...)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한 번도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않고 그저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안락히 자란 세대로서 마주한, 겉보기로나마 잠시간이었던 내란이 이러할진대, 군부정권이 말 그대로 성원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 사회에서 이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절절한 그리움과 생존의 공포, 신념을 배반하고 동지를 외면했다는 뼈아픈 자괴감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먹고 무너뜨렸을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아주 조금.

여전히 우리 사회에 관용은 멀고 연대는 확장이 아닌 고립으로 치닫는다. 혐오는 불어나고, 단단해지며, 너무도 쉽고 강력한 유혹인 반면에 연대와 관용은 "지금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말 앞에 나중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말하고 또 말했던 '똘레랑스'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여전히 간절하게 외쳐져야 하는가.

p.306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번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p.375 '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똘레랑스'가 있는가. 우리는 진정 나아가고 있는가. 달라진 듯도, 여전한 듯도 하다. 희망은 멀고, 환멸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독선과 폭력의 진정한 동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 이후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려온 데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독재와 배제가 민주사회를 침범하는 지금, 한국사회는 제자리와 퇴보를 오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갔어도, 가르침은 여전하다. 차별과 혐오가 관용과 차이의 숨통을 틀어막는 지금, 과거에서 또다른 과거일 현재를 묻는다. 그를 영영 이방인으로 묶어둘텐가. 그것은 지금에 달렸다. 그 책무의 무거움에 몸을 맡긴다.

p.6 그렇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젊은 벗들과 계속 만나고 싶은 궁극적인 이유다. 설령 잘 보이지 않지만, 희망의 보금자리들이 곳곳에 있음을 안다.

p.386 권력은 항상 강력하고 더욱더 강력해지려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는 속성 또한 갖고 있음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이에, 약자인 개인이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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