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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하이드어웨이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5월
평점 :
사람은 동물이다. 상처입고 병든 동물은 도망쳐 숨어든다. 몸을 숨긴 채 아픈 곳을 핥고 문지르고 꽁꽁 웅크린다. 인간은 짐승이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무리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짐승. 이 무른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저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살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을, 사람을 가장 많이 해치는 존재는 다름아닌 그들 자신이 되었다.
사람은 사람에 상처입고 상처입히며 다치고 병든 사람 사이에 살아간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본질이자 떼낼 수 없는 성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 여기 이 삭막한 도시에서 제각기의 이유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은신처가 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겹겹의 가면을 벗어두고 마음껏 취약해질 수 있는 곳.
p.59 왜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하는데? 본인은 그걸로 충분할지 모르겠으나 남은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 이후 나는... 기리토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고생해서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닐까.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을 감쌌지만 내게는 변명으로만 들리더라. 다시 약한 게 가슴에 닿는다. 기리토는 짜증이 나 있는 힘껏 던진다.
p.128 도망치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말인가, 집에도 학교에도 숨을 데가 없는데. 무엇보다 아무 것도 안 한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도망까지 쳐야 한단 말인가. 도망치라고 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녀석들을 지금 당장 어떻게 좀 해달라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궁지에 몰린 인간 대다수는 눈앞의 고양이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약한, 관계도 없는 존재에 이를 드러낸다.
낯선 이들의 도시. 이방인과 타인으로 이루어진 사회. 그 말은 곧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서로에게 낯설고 차가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게들 적응하며 살아가는, 도시화된 사람들. 스스로에게도, 세계에도 소외된 이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오간다. 이변이 없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저 그럴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소의 평범한 사람들.
'평범' 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평범하다. 무력하거나, 고요하거나.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며, 매일을 살아낸다. 대다수가 그렇게 하니까. 평범하니까. 정말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주어진 조건에 그럭저럭 부합하며, 자리와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p.80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아니, 그보다는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계약 사원인 마도카에게는 부조리함을 강요하고 직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나오야는 무난하게 대한다. 이게 정말 자신의 '역할'일까.
p.251 생각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우연하게 닿은 먹이를 먹으며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떠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이게 가장 살기 쉬운 생태라면 나도 앞으로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찾아오는 역할을 맡아 살아간다. 누가 나를 비웃을 수 있는가.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상처를 끌어안고 산다. 흉터에 가까운, 오래된 상처의 무게는 때때로, 벌겋게 드러나 피를 흘린다. 영원할 것처럼. 그들을 상처입히는 것은 세상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다. 상처를 핥고 또 핥아 덧나버리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피곤하고, 이해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굳이 그래야 하나 싶고. 나 하나 애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보통, 정상, 평범... 익숙한 압박과 피로들. 팍팍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삶에도 그들을 위로하는 것, 아니 곳이 있으니. 도심 속 은신처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동물이다. 다치고 병든 동물은 숨어들 곳이 필요하다. 도시의 동물들에게는 도시에서의 은신처가 있기 마련이다.
p.196 무엇보다도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야"라며 이해하는 듯 행동 하는 걸 보는 것도 우울하고 싫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 털어놓아도 거기에는 다시 "왜?" "어째서?"라는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부호가 달릴 것이다.
p.255 커다란 흐름을 거스르려 해봤자 소용없어. 직장 내 괴롭힘도 끈질긴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절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어. 처음에만 조금 소란스럽다가 결국은 또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야. 저항하면 피곤해질 뿐이야.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다고 후쿠시마는 당연한 듯 말했다. 상대는 어차피 그 정도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수다. 세상의 흐름은 다수가 만든다.
좀처럼 견디기 어려운 날이 있다. 마음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날이 있다. 살기 위해 도망치고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몸을 숨기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언제든 물러설 수 있다는 위로이자 모든 휴식처는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라는 현실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물을 닦고 해야 할 일로 돌아와야 한다. 다만 그 울음 끝에서,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것, 그것을 응원이라 부르고자 한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혹성에서 사니까(348)".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354). 책을 빌어 도시의 익명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오아시스는 어디인가요. 오늘의 당신을 쉬게 하는 그곳은.
p.285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은 요시오카와 후쿠시마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목소리가 큰 놈들을 너무 쉽게 따르는 자신 같은 무기력한 인간이야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말았다. 절대로 딸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더럽고 거친 세상의 파도를 만든 사람은 모든 걸 포기해온 자신이었다. 딸을 포기시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348 "간바야시 씨는 본인을 불완전하다고 하는데 완전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기리토의 질문에 리코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우리와 관계없고 지구는 흔들리고 있고... 제대로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도 난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 (...) 흔들리는 별. 지구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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