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과잉 사회 - 성비 불균형이 불러온 폭력과 분노의 사회
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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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많은 이들이 이 말에 전쟁이나 전염병같은 끔찍한 "외부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고. 이 생각은 틀렸다. 동시에 절반의 진실이다. 여성이 사라지고,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사회에 자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간절히 원해진다. 이용가치가 충분하지만 충분한 가치를 갖지는 못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기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혹은 그 자신에게조차 현실이 아니던가? 여아라서 죽는다. 동시에 남성에게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가치있는 아들과 쓸모없지만 중요한 도구인 여성을 생산해야 한다. 남성우월사회에서 성감별낙태로 야기된 남성-과잉 인구는 낯설지 않다. 그 자신의 존재로는 충분하지 않으나 동시에 재생산에 막중한 임무를 갖는다. 낳아라, 낳지 마라, 누군가를 낳고 무언가는 "지워라".

p.41 2008년에 HIV 바이러스와 관련해 사용된 예산은 전 세계 건강 관련 지출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 하지만 성별 선택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수년 동안 출생신고 기록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인구통계 학자들, 그리고 여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살거나 살게 될 수억 명만이 알고 있는, 더욱 만연해 있지만 훨씬 조용한 전염병으로 남아 있다.

p.56 결국 성별 선택은 모든 사람이 성공하려고 애쓰는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여성은 비록 같은 여성을 희생시키면서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신을 세우려는 갈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좀 더 비극적인 다른 요인은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성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여성이 부족한 사회가 곧 여성상위사회는 아니다. "희소자원"이 더 큰 가치를 갖는다는 수요-공급 논리는 성-권력 앞에 힘을 잃는다. 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닌 "생식수단"이자 "인구조절도구"인 동시에 돌봄노동, 육아, 가사와 성욕 해소 등 일조의 "서비스 재화"로 취급되는 사회에서는 성감별낙태금지가 여성출생가능성을 높인다 하더라도 여성의 자율성과 존재-통제권 억압에 기여하게 된다.

남성우월사회에서의 "이득"과 선호, "인구통제"의 직간접적인 압력의 결과, 성감별낙태와 여성의 이중-가치화는 출생성비의 부자연화(unnatural selection)를 야기했고, 이는 상대적 남성과잉사회와 성병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등 그에 파생된 사회 문제, 출생률하락에서 인구 소멸로 이어지는 연쇄로 이어졌다. 여성이 "태어날 가치"를 갖지 못하는 사회는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p.217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 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

p.318 하지만 성비 불균형이 새로운 파시즘의 물결을 불러오거나 전면전이 불가피해질 정도로 아시아의 군대를 늘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지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헤스케스는 (...) "미혼 남성들이 결집할 경우 더욱 조직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남성 과잉의 결과는 향후 2, 30년 동안 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대다수는 이미 초고령화의 위기에 처해있다. 동시에 어디선가는 여전히 폭증하는 인구를 감당치 못한다. 많은 사회의 문제는 인구 수 그 자체보다 성비에 있다. 노화와 사망은 여전하나 출생률은 줄어든다. "인구조절수단" 그 자체인 여성이 줄어든 탓이다. "낳게 만든다" 이전에 "낳지 못하게 한다"에 더해 "골라 낳게 한다"가 있던 탓이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급증하는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성별선호-감별은 어째서 묵인되고 조장되었는가? 이 걷잡을 수 없는 문제의 실마리는 어디에 묻히는가? 남성과잉현상은 기술, 자본-제국주의, 국가권력,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얽혀있고, 성감별낙태는 단지 현재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성원들과 미래사회의 존속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자 결과다.

p.119 우리는 어떤 상표의 초음파 기계가 사용되는지, 성 감별 검사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혹은 낙태가 애초에 아시아에서 어떻게 그토록 만연하게 되었는지 듣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마치 생명 윤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는 기술에서 분명한 안도감을 얻는다. 또한 지난 수백 년간 인구 변화가 면밀하게 연구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발전이 인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먼저 따져보거나 신중히 검토하지 않는다.

p.359 몇십 년 전 인구 조절 운동이 출산을 관리해야 할 문제로 만들고 사람을 숫자로 바꾸어놓았다. 개발도상국의 부모들은 소가족이 성공적이라 배웠고 아이가 공장의 상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들의 '질'이 '양에 반비례한다고 단단히 교육받았다. (...) 현재 정부의 인구 조절이라는 개념이 구식처럼 들리는 반면 우리는 아직 생식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이 문제를 가족에게로 돌렸다. 중국과 캘리포니아를 막론하고 어머니들이 가족의 우생학자가 되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기술은 현상과 유리된 것으로 간주되며 가치중립의 환상 뒤에 숨는다. 미국의 실험실에서 탄생한 기술은 아시아에서 여아를 사라지게 하고 여성 인신매매와 성산업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는 "부적합한" 인구 통제와 기술자본권력의 팽창에의 욕망,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다는 오판이 있었다.

이미 사라진 존재를 되살릴 방법은 없다. 선택적 출산과 임신중단은 여성의 신체통제권과 결부되어 있으나 감소한 여성인구는 재화로서의 여성 쟁탈이라는 인권침해를 낳았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누가 먼저인가? 명쾌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선진국"의 누구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공수정연구소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선택이 인도의 낙태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태도는 분명 오만이다(365)".

p.259 레나 에들런드는 한 논문에서 성별 선택 기술이 더 저렴하고 정교해지고 더 널리 확산되고 또 세계의 중상층에서 태어나는 남아의 수가 증가하면서 가난한 국가들이 기회를 감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태아 성 감별과 관련된 가장 큰 위험은 최하층 계급의 여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우리는 성별이 소득과 계층에 따라 나뉘고 여성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p.365 개발도상국에서 성 감별과 낙태가 유행하는 데는 미국의 단체들에서 제공한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함께 수천 명의 현장 요원, 수많은 이동 진료소가 필요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을 만드는 의학 기술을 위해 자유롭게 국경을 건너며, 세계은행의 독려 없이도 훨씬 빠른 속도로 기술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새로운 책임이 생긴다.


*도서제공: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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