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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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 아니, 전쟁이 끊이지 않게 함으로써 권력을 쥐는 이들의 나라에서 내몰린 사람이 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직장인이었고, 가족의 일원이며... 빨갱이. 불순분자. 그러므로 망명자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세계평화를 이름에 담은, 삶의 궤적이 곧 역사인, 이방인이 있다. 이방인의 이방인, 이방인 중에서도 또다시 낯설고 다른 자.

언젠가 이 책이 필독서인 동시에 불온서적인 때가 있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조용하기를, 나이 먹고 철들기를 거부(6)"하는 그는 빨갱이요 이단아였다. 시대의 참어른이었던 그를 기억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낯선 '어른'에서, 무지의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학생운동이 소멸한 도시의 교육과정에서 나는 내내 부끄러웠다.

p.81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 삼켰다. 서글픔이 앞섰다.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p.193 "한국에서는 이 모든 좌파가 빨갱이가 될 수 있소. 침묵하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러므로 극우가 아닌 실존주의자는 모두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오. (...)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오. 우습지 않소?"


불과 몇 년 새에 그의 이름을 낯설어진 젊은이가 많을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 썩 주류가 아닌 이들 외에는 그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제법 교양서의 영역(?)으로 넘어온 그의 이름에 설핏 웃었던 적도 있다. 잊혀지는가, 했다. 나아가는 시대다.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지난 해의 끝자락에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날 밤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믿음과 관용, 다양성을 다시 한 번 말소하려는, 드디어 아가리를 드러낸 퇴행에 맞닥뜨렸다. 수많은 이들이 저항했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히 확산되는 저항과 연대의 문화에 비해 여전히 장벽은 여전히, 아니, 새로이 공고하다. "우리 편"일 때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지만, 한 끗 차이로 "그들"의 혐오와 증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p.217 한편 마을사람들은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부도 그곳에 살았고 작은아버지도 그곳에 살았다. 내가 그곳에 갔던 날도 살고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 살았다. 마을사람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처럼 살았다. 죽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p.343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았던 바보였다. (...)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한 번도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않고 그저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안락히 자란 세대로서 마주한, 겉보기로나마 잠시간이었던 내란이 이러할진대, 군부정권이 말 그대로 성원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 사회에서 이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절절한 그리움과 생존의 공포, 신념을 배반하고 동지를 외면했다는 뼈아픈 자괴감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먹고 무너뜨렸을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아주 조금.

여전히 우리 사회에 관용은 멀고 연대는 확장이 아닌 고립으로 치닫는다. 혐오는 불어나고, 단단해지며, 너무도 쉽고 강력한 유혹인 반면에 연대와 관용은 "지금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말 앞에 나중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말하고 또 말했던 '똘레랑스'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여전히 간절하게 외쳐져야 하는가.

p.306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번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p.375 '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똘레랑스'가 있는가. 우리는 진정 나아가고 있는가. 달라진 듯도, 여전한 듯도 하다. 희망은 멀고, 환멸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독선과 폭력의 진정한 동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 이후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려온 데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독재와 배제가 민주사회를 침범하는 지금, 한국사회는 제자리와 퇴보를 오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갔어도, 가르침은 여전하다. 차별과 혐오가 관용과 차이의 숨통을 틀어막는 지금, 과거에서 또다른 과거일 현재를 묻는다. 그를 영영 이방인으로 묶어둘텐가. 그것은 지금에 달렸다. 그 책무의 무거움에 몸을 맡긴다.

p.6 그렇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젊은 벗들과 계속 만나고 싶은 궁극적인 이유다. 설령 잘 보이지 않지만, 희망의 보금자리들이 곳곳에 있음을 안다.

p.386 권력은 항상 강력하고 더욱더 강력해지려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는 속성 또한 갖고 있음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이에, 약자인 개인이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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