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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평점 :
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3대째 이어져온 그 곳은 언젠가는 호텔이었고, 또 언젠가는 레스토랑이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찾아오는 이를 기다리고 맞이한다. 시대도, 사람도, 모습도 달라졌지만 여전한 환대로 기다리는 곳, 누군가가 머무르고 떠나는 그곳에 한 그루 벚나무가 있다.
사람보다도 더 오래도록 그곳에 뿌리 내리고 땅과 사람을 지켜온 늙은 나무 한 그루. 이 이야기는 묵묵하고 고요하게 존재해온 그의 말로 전해진다. 야에, 사쿠라코, 히오. 벚나무의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나날로.
p.9 해가 드는 쪽은 따뜻하지만 실내에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습기를 머금은 목조 건물 특유의 향긋한 나무와 흙 냄새가 코끝에 닿은 순간 히오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카페 체리 블라썸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만들어낸 냄새다. 히오는 이 공간을 둘러싼 공기를 온몸으로 흠뻑 마시고 나서 "자!" 하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p.54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그런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나날은 거의 비슷하다.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그날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문을 연다. 손님이 찾아온다. 이웃 주민이기도, 낯선 사람이기도, 삶에 지쳐 도망쳐왔거나, 썩 달갑지 않은 소란이기도 한 이들이. 서른 살에 가게를 물려받아 이제 막 3년차인 풋내기 사장 히오의 하루는 여전히 서툴고 어려운 것 투성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친절은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온통 번쩍이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서 속삭이는 고요함은, 휴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마음 따위는 번번이 실망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오래된 땅의 낡고 작은 공간은 그 마음을 아는 이들이 머무르고 오롯이 자기 안에 잠겼다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늙은 나무는 말할 수 없다.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품에 안고 다독여줄 수도 없다. 그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찰나를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 그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풍경처럼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곁에 서서. 온몸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p.160 말로 위로하기는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 쉽게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머리로는 이해하고 스스로를 타일러보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갈 곳을 잃은 진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쓸쓸하다는 마음의 소리만 끝없이 메아리쳤다.
생의 끄트머리에 선 인간은 그를 보며 유한한 삶을 절감한다. 봄 꽃, 여름 그늘, 가을 낙엽을 지나 죽은 듯이 앙상해지는 겨울 가지. 나무의 사계절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순간 하나 버릴 것도, 쓸모 없는 것도 없다는 것조차도.
시속 0km와 시속 4km의 존재가 자라고 늙어온 곳, 낯선 이가 머물고 쉬었다 가는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서툴고, 어렵고,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죽은 듯이 겨울을 보내고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오래된 나무처럼, 하루를 하루만큼 충실히 살아낸다면. 긴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다가올 가을을 본다. 살아가야지. 그렇게.
p.132 얼핏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벌레조차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커다란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물이 겨울을 나고 편히 쉬는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p.242 외할머니가 지켜낸 벚나무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꽃을 피운다. 나는 끝이 없는 이 순환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기적. 그때 부드러운 빛이 방 안을 빙 둘러쌌다. 시선을 들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장지문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