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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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모모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편집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수록작들의 제목에 숨겨진 의미와 그들을 관통하는 전체 주제를 생각하는 데 있지 않을까. 이 책도 다르지 않다. 한참을 음미하듯 굴려보고서야 알았다. 분노구나, 어떤 형태로, 어떤 감정을 동반하든 간에, 이것은 분노구나.
모두가 분노에 차있다. 늘어붙은 바닥처럼, 파글거리며 튀어오르는 방울처럼. 어떤 것은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깊은 냄비 안 걸쭉한 액체의 바닥처럼 푹, 하고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고. 억눌린 분노와 굴종, 순응, 교묘함과 회피를 동반하는 그 모든 감정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 약자, 소수자로 경험하는 삶에 관련된 분노, 혹은 권력 우위에서 밀려나 당혹스러워하는 이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사치스러운 야만을 목도하면서도 숨죽이고 내리눌러야 하는 구역감을 속삭이듯 무심하게 풀어놓는다.
p.301 저녁 식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맨얼굴이었다. 모임 회원들은 우리를 힘 없는 사람들처럼 대하면서도 우리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우리가 힘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사이에 두고도 마치 공기를 통해 이야기하듯 대화를 나눴고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가까이서 알아버렸다.
p.295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변한다. 그는 그저 아를로일 뿐이고, 숨 막히는 어른 특유의 머스크향 같은 체취가 나를 압도한다. 쟤네는 섹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를로의 손이 내 배 위에서 메마른 열기를 뿜는다. 그럴 때면 내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자궁처럼 품는다. 잠잠하면서도 의식적인 그의 손에는 그 나름의 심장박동이 있다. 나는 착한 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나는 그의 손처럼 잠잠하지만 어둠은 어김없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런가하면 여성 또한 사람인 까닭에 여성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흑인 여성, 어린 여성, 혹은 어린 흑인 여성,
p.70 제이는 목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 이면에 감춰진 뜻을 이해한다. 자신은 머리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겨드랑이에 있어서는 안 되고, 팔에는 털이 있어도 되지만 다리에 있어서는 안 되며, 다리 사이의 털은… 남자 취향에 달려 있다는 것. 구경당할 수는 있어도 구경할 수는 없다는 것.
p.282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몸이 기능하느라 내는 냄새를 감추려 애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돈을 벌기도 할 만큼 자기 육체 안에서 편안한 삶은 대체 어떤 걸까 궁금해하느라 정신이 너무 없어서.
p.299 우리는 가입조차 못 했을 거야. 가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아버지들, 더 올라가서는 그들의 할아버지들로부터 부를 넘겨 받아 우리에게 건네주고 검은 육체와 갈색 육체의 삶과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들 우리 가운데 이런 끔찍한 풍요에 가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이라는 까닭에 죽어가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생생한 욕망에 타오르고 흔들리는 여성이 있다. 관계의 역전, 혹은 일탈의 문턱에 선 여성은 얼마나 찬란한가. 버림받을 것, 혹은 불만족의 대상이 될 것을 예견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이전의 "주체"는 얼마나 초라하고 또 우스꽝스러운가. 소리내서 웃고 얼빠진 새끼, 넌 아무것도 몰라, 비웃고 싶었다. 세상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정숙과 위안을 요구하는 여자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p.95 글로리아는 울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지나치는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어. 그냥 전부, 그냥 방 안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다고."
p.98 글로리아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으며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대가로 글로리아에게 일종의 신성한 앎을 선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이 빛을 흠뻑 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아홉 살 아래인 글로리아가 응당 자신을 돌보리라 생각했는데 역할이 뒤바뀌어버린 데 대한 프레드의 분노도. 그리고 최악의 가능성도.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해 프레드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은 글로리아의 혀끝에서 녹으며 씁쓸한 맛을 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곁에 없으면 프레드가 겁쟁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프레드는 글로리아가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고 믿었다.

비단 개인의 분노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지킬 것이 없는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가 되었든, 피와 살로 빚어진 자식이 되었든. 사람 대 사람으로 공유하는 분노, 광기, 복수. 감히, 내 아이를, 한때는 나를 세상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나를 경멸하는 내 딸을 네가 감히, 네 행복을 너의 이로, 혀로 부수는 고통을. 웃는 얼굴과 담배 한 개피로 이어지는 홀가분함, 인간으로 마주하는 여자의 존재를 그려낸다.
또다른 단편에서는 대립하는 존재로서의 모성을 그려낸다. 희생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모성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어느 여성이 지극한 사랑을 타고나겠는가. 엄마에서 딸로, 다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이가 존재를 요구하는 이물-자녀에게 느끼는 분노와 부담과 거부감을 당사자가 아닌 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널 사랑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좋지 않아, 증오스러워.
p.162 엄마는 분명 세상이 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프랭키의 모습 이 갑자기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두려움 가득한 별개의 존재. 나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엄마에게도 지구상에서 처음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마고는 문득 깨닫는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마고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p.229 콜레트는 몸을 숙이고는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는 열기 같은 목소리로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난 너를 사랑해, 하지만 가끔은 네가 하나도 안 좋아. 빌리는 엄마가 이 일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디로 들어가 가라앉았을지 궁금했다.
p.247 빌리는 이 아기가 자신을 부숴버릴 것임을 알았다. 이 모든 이유들이 참일 수 있으며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끼어든 혼란 뒤에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엄마가 되는 일이 어떤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머니에 돌 하나를 더 집어넣는 일과도 같다는 설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기는 훗날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도리어 내가 망가뜨린다면? 물론 모두가 엄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의미로는 더더욱 아니다. 만일 여자들에게 궁금해할 자유가 더 많이 허락되었더라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이따금 "미친 여자"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미친 여자, 미쳐버린 여자,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헝클며 발을 구르지는 않지만 광기로 휘몰아치고 끓어오르는, 혹은 완전한 폐허에 맨발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 그럴 때면 늘 어느 향수 광고를 떠올린다. 잘 차려입은 여성이 격식있는 연회장을 떠나 발을 구르고 머리를 헝클고, 춤추고, 파괴하고, 뛰어내리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각각의 시공에서 이야기를 플어내는 열한 개의 단편들 내내 여성이 자기-것을 조각내고, 들여다보고, 파괴하거나 저항하는 과정들이`불합리 혹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를 미치거나 미쳤거나 미쳐갈 여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좋다. 조금 더 미쳐도 좋겠다.
미친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미친 여자는 낯설다. 미친 여자는 힘이 세다. 미친 여자는 예측 불가와 괴력과 이질성과 보이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상징과도 같다. 미치지 않으면서 미칠 것을 요구받는 존재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미친 여자는 당신을, 세계를 부술 것이다.
p.25 골반 한쪽을 삐딱하게 기울여 선 채로 에바에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치 방의 모든 빛과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에바는 엄마의 거대한 존재감에 둘러싸여 협박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 우쭐해졌다. 엄마의 따스한 갈색 얼굴에 입 맞추고 싶었다.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후려치고 싶었다.
p.57 "도대체 언제쯤에나 흘려보낼 수 있는 거야? 우리 원래 대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건데?" "흘려보내?” 나는 한밤중의 별처럼 불꽃이 번쩍 튀고 갑자기 감정이 울컥한다.
(...) "그게 뭐였는지 우린 알지도 못했잖아." 나는 알고 있었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보드라운 꽃잎들, 내 딸아이. 그리고 나는 히스가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p.84 제이가 말한다. 다음에 또 내 동생한테 좆같이 굴면 네 침실로 찾아가서 이걸 쥐어뜯어 놓을 거야. 제이가 뱉는 말에는 어떤 그림자도 숨어 있지 않았다. 그 탁 트이게 열린 곳에서 녀석은 스르륵 열려버렸고 허세와 유산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두려움이 녀석의 얼굴 위로 떠오른다. 제이는 그 두려움을 뚫어져라 본다. 그리고 그 시답잖음을 음미한다. 그래 내 말 알아들었어? 제이가 묻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둠 속에서도 제이는 뜨거운 빛을 뿜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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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날들의 기록 -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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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아침의 피아노』로 삶을 정리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던, 김진영이 그간의 저작을 거쳐 단상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의 글이 다시금 독자에게 말을 건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라는 제목처럼 고요 속에서 솟아오르고 침잠하고 벼려진 짧거나 아주 짧은 사유들을 모은 이 책은 따스한 봄빛의 표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이다. 홀로 웅크리고 조용히, 오래 울어본 이가 남겨둔 시간들. 새벽 어스름에서, 한밤의 불빛 너머에서,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오래오래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다 다시금 사랑을 다짐해본 자만이 써낼 수 있는 글들. 스스로를 아주 많이 부끄러워하고 세상의 어떤 면모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 김진영의 글이다.
김진영의 글은 매번 나를 울게 한다. 그의 글은 고개를 떨구게 하고, 오래오래 고요히 울게 만든다. 그의 다른 책을 소개하는 글은 이렇게 말한다. "호주머니에서 죽음을 꺼내면서도 삶을 말하고, 아픈 이별을 떠나보내면서도 사랑을 껴안았던 철학자"라고. 그런 까닭에 그는 아프고 처절하게 묻는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p.79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08 『애도 일기』에서 바르트는 말했던가: "사랑이 끊어진 자리에서 타오르는 문장들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런 한 줄을 생략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문장이다’

공교롭게도 근래 여러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고민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노력하는 사람을 다그치지 말라고 답하며 으레 "무릎을 꿇은 자의 등에 채찍을 때려서는 안 된다(신철규, "마비" 중)"던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그저 안타깝다가도 감히 내 주제에 할 말인가 싶어진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는 과연 어디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김진영의 글에서 나는 떠나보낸 이와 그의 상실로 무너져내린 세계를 떠올린다. 현존의 부재가 부재의 현존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그 어딘가에 놓인 시간들을.
p.47 자꾸만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아니라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뭔가 빗나가고 틀렸다는 생각. 그런 자기검열 뒤에는 언제나 초조함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애를 쓰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모자라는 일이고, 그래서 더 무언가를, 더 많은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강박.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불쌍한 자괴감.
p.74 한 사람이 죽었다. 그의 사진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머리를 숙인다. 이 잠깐 사이에 혼란을 느낀다. 그건 부끄러움일까, 죽은 자들 앞에서 산 자들은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떤 본질적 패배에 대한 부끄러움.

세상의 추악하고 괴로운 부분을 직시하는 일은 분명 어렵다. 그 꼴을 보고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힘없이 눈물을 떨구는 자기연민이 아닌, 바닥의 바닥을 짚어내는 사유와 글은 분명 그에게 일종의 사명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진영의 글이 쉬이 잊히지 않아 밤을 지새우게 하고, 부옇게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되뇌는 까닭이다.
수많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는 끈질긴 사랑의 의지가 있다. 얼어붙은 땅에서 기어이 고개를 드는 풀빛의 생명들과도 같은 그것. 이따금 그것을 숭고함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눈물은 얼굴의 굴곡을 기억한다(신철규, "어둠의 진화" 중)"던 시인의 말처럼 슬픔은 삶에 궤적을 남긴다. 슬픔을 이해하는 자 또한 세상에 그러하다. 어쩌면 애도와 사랑은 잊지 않음, 아니, 잊지 못함에서 자라나는 감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슬퍼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했던가, 애도의 무게, 사랑의 책무를 아는 이에게는 이해가 남는다. 그 자신과 타인과 삶 자체에 대한 이해가. 나는 그것을 품위라고 부른다.
p.157 사유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아니. 말을 고치자. 부여가 아니라 ‘수여‘다. 수여 안에는 부여에는 없는 특별한 태도가 있다. 그건 존경심이다. 혼란을 배척하지도 제압하지도 않기, 오히려 혼돈을 응시하고 발견하고 존경하기. 그것이 사유의 질서, 아니 사유의 품위다.
p.314 착한 것들은 부드럽다. 그러므로 당연히 부드러운 것들은 착하다. 그런데 그런가? 부드러운 것들이 반드시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그것이 몹시 슬프다.
p.384 "혁명이란 뿌리에 도끼를 대는 일이다"
(…) 뿌리에 도끼를 대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 중에는 애도를 중화시키려는 정치도 있다. "나쁜 사회는 슬픔을 슬퍼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 혁명이란 그러니까 제대로 슬퍼하고 제대로 애도하는 일이다. 역사 안에서 '애도의 정의가 구현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마지막 기록을 담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서, 꼭 잡으면 잠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손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김진영, 『조용한 날들의 기록』"는 이답지 않은가.
한 권의 책을 채우는 짧은 글에 바위와도 같은 고뇌가 있다. 적막한 가운데 소란한 마음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나는 또다시 쉬이 잊지 못할 문장을 되뇌어 볼 것이다.
p.140 마음이 늘 불편한 건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아니 거의 분명히, 마음껏 사랑하지 못해서, 그럴 수가 없어서인지 모른다.
p.445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강해지려고 한다. 그 강함이 약자들의 연대, 연민 혹은 사랑이다. 사랑은 본능도 천성도 아니다. 사랑은 약한 사람들이 긴 세월을 통해서 발견한 생존의 필연적 논리다. 그런데 이 논리를 생존술이 아니라 통치술로 이용하는 두 영역이 있다. 나쁜 종교와 나쁜 정치가 그것들이다. 그들은 약함을 강함과 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순응과 순종의 논리로 더럽힌다. 타락한 종교와 정치가 그 끝에서 사랑과 정의가 아니라 법과 형벌로 귀결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법으로부터 마침내 벌받고 추방당하는 이들이 약한 사람들이라는 건 더더욱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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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vs 보부아르 세창프레너미 11
변광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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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서는 남에게 소개하기 쉽지 않다. 그것도 '이러니까 저렇게 해라' 식의 자기계발서의 형식이 아닌, 정말로 철학자 혹은 어떤 학문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면 더더욱. 혼자 보고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두는 요약집이 아니라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어떤 이의 치열한 사유를 따라가며 느꼈던 감동을 풀어두는 일은 정말,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닌, 어떻게든 함께 읽고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역시 애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창의 프레너미 시리즈는 종종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데... 각 원저의 입문 역할을 하는 명저산책 시리즈에 비해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에게 적합하다. 저자별로 다르겠지만 어느정도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있으나 친우 혹은 지우이자 대립각을 세웠던 라이벌로서의 프레너미인 두 학자(때로는 그들의 학파까지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서술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본적인 흐름이나 큰 줄기가 되는 사건들은 알고 읽는 편이 이롭다. 싫다면? 어쩌겠어요. 맨 땅에 헤딩 한 번 하고 시작하는거지, 뭐.

엘리트 사회인 고등사범학교의 콧대 높은 3인방이었던 사르트르, 항상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꼭 비버(Beauvoir와 Beaver의 발음이 유사함)같다며 Castor(불어로 '비버'를 뜻함)라는 별명이 붙었던 보부아르. 그들은 1929년 이후 서로를 "지적으로 훌륭한 훈련 파트너", "완벽한 대화 상대자"로 여기며 사랑을 꽃피우다 사르트르의 입대를 계기로 계약 결혼을 시작한다. 그들은 생애 내내 유지한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존중에 기반하는 관계였다.
p.43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처음 만나면서부터,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서로에게 '당신(vous)'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은 존칭형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를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고자 했다.

사랑의 관계를 일방적 희생이 아닌 나의 잉여 존재로부터 벗어고자 하는 정당화의 시도인 동시에 타자의 잉여존재 역시 정당화하는, 서로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우리-주체'의 형상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여긴 사르트르에게 이 계약결혼은 평생에 걸친 사랑의 실험과도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쌍방이 주체성의 상태에 머무는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차례 파경의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으나 기어코 반세기 이상 관계를 지켜냈다. 그들에게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상, 학문, 일생의 동지.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관습에 저항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을까.
p.87 사르트르의 사유 체계 내에서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존재관계에서 한 인간의 주체성과 다른 인간의 주체성의 결합을 전제로 하는 사랑과 언어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1929년 계약결혼을 맺으면서 설정했던 목표는 바로 이처럼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과 언어를 실패로 끝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반세기를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실에 대해 끝없이 도전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 자신들의 학문적 위업뿐만 아니라 세기의 이슈가 되었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사상 기반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길을 개척하고 또 목소리를 내기를, 혼란한 시대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두 참여자들의 사랑. 둘 간의 연대, 같지만 다른 길을 가며 주고받았던 영향과 작품세계를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지난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최악이자 최대의 규모로 다시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체험했던 세대에 속한다. 실제로 그들의 현실참여적 면모는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진성을 띄기도 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절대성 혹은 본성의 선함에 기댈 수 없는 존재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들은 그저 대상의 의미를 고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투의 존재인 인간이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해 지는 책무, 객체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존재 의미,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난 현실의 수치심 등을 표현하고 그를 통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p.107 아울러 이런 '대자-즉자'의 융합이 바로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후의 목표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인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지향성을 발휘하고 있는 대자가 사물의 존재 방식인 즉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체와 동시에 주검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인간은 ”무용한 열정“이라는 결론에 함축된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보부아르는 『노년』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이 작품은 노인을 중심으로 논하지만, 나는 보부아르가,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르트르 또한, 이렇게 묻고싶어했다고 믿는다.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취약해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
p.303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할 것이다.
(…)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내야 하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이 말년을 빈손으로 고독하게 맞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화가 일단 형성된 후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무기력한 지식이 아니라면 (…) 인간은 모든 나이에서 능동적이고 유용한 시민일 것이다. 만일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 자기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본질적이고 집단적인 삶에 참여한다면, 그는 결코 유배를 겪지 않을 것이다.

여담으로, 사르트르에 큰 애정을 지닌 저자께는 죄송하지만 읽는 내내 이놈의 사르트르!!하고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어요... 사실 세 대쯤... 아니 솔직히, 나만 그래? 아닐걸요? 이거 보고 누구 하나쯤은 몰래 두 대 쥐어박고 갈걸요?
p.54 또한 인간들 사이에는 정말로 말하기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기 마련이다. 가령, 사르트르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까지 보부아르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보부아르는 그런 얘기를 사르트르에게 하지 못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계약조건은 남자인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그녀는 이 조건을 남자에게만 유리한 '알리바이'였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이 조건이 지켜지지 못했음을 실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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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정치 - 안티페미니즘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신경아 지음 / 동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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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동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상에 대한 명백한 또는 암묵적인 반대"를 의미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여성운동의 특정 이슈나 의제, 성과를 둘러싸고 일시적이거나 비교적 단기간에 격렬하게 진행되는 형태인 '일시적 반격으로서의 백래시'이며, 둘쨰로는 특별한 계기 없이 여성 정치인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개인적인 괴롭힘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상적ㆍ지속적 공격으로 나타나는 백래시'이다. 이를 통해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가부장적 질서와 성별 불평등 체계를 기본적인 구조로 살고 있으며, 여기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한 규범으로 유지해가려는 힘"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조막만한 한반도 땅에서 소위 '모던걸'의 등장 이래로 자유롭고 안전할 권리, 동등한 사회적 주체로 살아갈 권리를 외치는 여성에 대한 공격은 중단된 적도, 그 기세가 약해진 적도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모습과 범위를 달리해가며 지치지도 않고 끌어내리려 애쓰는 이들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백래시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는 여성이 존재한 이래로 사라진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성취를 보이는 곳에는 언제나 백래시가 존재했다.
p.28 백래시는 정확하든 아니든 여성들이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는 지각에 의해 촉발된다. 페미니스트의 성취에 직면한 이들이 그에 맞서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재강화하려는 태도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백래시는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한다. 누가 권력을 갖거나 갖지 말아야 할지, 가질 수 없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포함한다.

때때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래, 극심하게 시달리는 바람에 많은 이가 지쳐버린지 오래인) 설전의 기록을 쭉 읽노라면 어쩌면 명확한 목적성을 띄거나 나름의 합리적인 논리 체계가 있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는 백래시 사례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설전까지만 가도 다행인 수준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알고리즘처럼, 당연한 무언가로 자행되기까지 하는 한국의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는 왜, 어떻게 물리적이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형태로까지 발달해왔으며 또 그들을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을까.
p.11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훨씬 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고, 그들의 감정은 불안이나 공포 쪽에 가깝다. (...) 불안은 우울이 되고, 좌절은 분노가 되면서 감정의 전이가 발생한다. 나의 분노를 투사활 누군가로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서 '그들'이 지목된다. 우울은 혐오로, 분노는 적대로 심화된다.
혐오와 적대의 감정에서 형성된 타자에 대한 상징폭력은 일시적인 쾌락을 주며, '우리'의 결집된 힘을 확인할 수 있는 효과의 도구로 체험된다. (...) 백래시는 이런 감정들에 편승해 사회적 세력을 확대해간다.
p.16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실천이다. 만약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이런 민주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작금의 사회가 부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수차례 말했듯이 행정부의 수장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제1임무는 성원의 보호이다. 필수라거나 기본이 아닌 굳이 '제1'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는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는, 자국민 외의 일시거주자를 포함해 자국 영역 내의 성원의 기본적인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p.45 한 사회에서 백래시가 전개되는 양상은 절망의 정치의 모습을 띈다. 매우 부정적인 감정 기제들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에 대해 여러 형태의 백래시가 이루어져왔다. 노골적인 힘의 행사, 폭력이나 위협, 운동의 연대를 분열시키는 '분할 정복' 같은 의도적 전략들 외에 조롱과 낙인찍기, 침묵시키기, 부드러운 억압 등도 있었다. 이는 상징적ㆍ물리적 폭력이 동원되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는 공격을 자행한다는 점에서 가장 부정적인 형태를 띈 힘의 행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국가권력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게 적극적인 폭력을 가하고 또 방조하는 나라이다. 앉은 자리에서 하루가 모자라도록 실사례를 들 수도 있다. 판례만 가지고도 하루가 모자란다. 이런 분노에 타오르는 이가 과연 하나 뿐이겠는가. '이만하면 감사한 줄 알라'는 말은 가해자 혹은 방관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노와 절망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나 '일베'로 대두되어 사회 전반의 정서로 확산되고 국가 정책에서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백래시는 참담한 몰골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는 최근의 '이대남'과 '여성가족부폐지논쟁'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에서 크게 드러난 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p.137 페미니스트 공격이 확산된 사회적 배경으로 김보명은 젠더 이분법에 토대를 둔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신자유주의 사회의 탈맥락화된 능력주의와 결합해온 현상을 지적한다. 성차별의 오랜 논리이자 방식인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경쟁과 불안 속에서 성장해온 청년 남성들의 '공정성' 담론과 결합하면서 여성혐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누적된 구조적 불평등과 문화적으로 일상화된 여성혐오는 이미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차별'로 인 지되지 않는 데 비해,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시성을 획득하면서 '역차별'의 감각을 생산ㆍ확산시켜왔다는 설명이다.
p.168 이런 결과를 고려해보면, 여성정책연구기관을 사회 복지기관으로 통합하는 것은 결국 여성정책을 지우고, 지자체 정책에서 성평등 가치를 배제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진흥', '복지가족' 등 어떤 논리성도 찾아보기 어려운 간판을 달거나, 일반 연구원으로의 흡수통합, '양성평등' 운운하는 개편은 모두 지자체 정책에서 '여성'과 '성평등'을 삭제하고, 여성정책을 최소한의 사업으로 국한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 책은 백래시의 정의부터 각 국가별 현항과 양상, 무엇보다도 한국의 백래시에 동원되는 정동과 사회적 요인, 현재 한국의 '젠더 갈등'과 실질적인 차별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지침서'로 불리기 바라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알지 못하고 그저 분노하는 것으로는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p.176 성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시정 요구로서 여성주의 실천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을 '젠더 갈등'이라고 한다면, 백래시는 이러한 젠더 갈등이 젠더 정치의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맥락에서 반격으로 조직되고 세력화하는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은 ‘젠더 갈등'이라고 부르기에는 정치적 함의가 훨씬 더 크고,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현상이 되어버렸다. 개인들 사이의 젠더 갈등이 정치권력에 의해 정치적 백래시로 확대되면서 국가권력의 통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젠더 갈등' 사회에서 '백래시'의 시대로 깊어져가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p.236 성평등 정치는 여성운동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베를루는 "기존의 헤게모니는 서발턴 또는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위한 공간이 있을 때만 도전받을 수 있다"는 프레이저의 말을 빌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정치사회적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성운동 없는 성평등 정치,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젠더 불평등에 대한 도전은 불가능하며, 여성운동 없는 성평등 정책은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여성주의의 새로운 도전과 백래시 대응전략으로 맺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확장하고 오래, 지치지 않고,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이 일반적 가치로 굳어진지는 오래이나 그렇지 못한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다.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러니, 어느 책의 제목을 빌어 오늘도 침묵하지 않기를, 살아남기를 다짐한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12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지우며, 사회 변화의 방향을 뒤로 돌린다. 더 깊은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적 실천을 공격하며, 그런 공격성을 힘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힘이 아니라 폭력이다.
p.240 안티페미니스트 백래시가 전개되는 탈민주화 사회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하층계급과 빈곤층, 이주민, 장애인 등 '그들'로 분리되는 인구집단에 대한 혐오ㆍ차별ㆍ폭력이 공존하기 쉽다. 그러므로 백래시에 대응할 때도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회적 맥락을 일고, 그 안에서 다각적 연대를 통해 조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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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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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핏빛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이 도시에서는 "갈등과 무질서를 통한 질서의 창출, 다양한 소요와 효율성 사이의 충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그런 창조와 파괴의 어지러운 반복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멜랑콜리, 한동안 제법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단어로 기억한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는 채로 모든 것이 멜랑콜리-로 수식되는 편이었지만. 그러나 본디 "멜랑콜리"란 그러하지 않은가. 어쩐지 느리고 무겁고, 열기가 가신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감정과 언어의 한가운데에서는 조금 비켜난 느낌. 솔직한 심정으로 "멜랑콜리 피아노"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 지금도 명확하게 설명할 언어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있는 힘껏 느껴보는 수밖에.
p.9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 "이 도시의 본질적인 성격은 멜랑콜리이다." (...) 한낮인데도 황혼녘처럼 느껴지는 잿빛 도시 토리노의 특징을 멜랑콜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p.16 자유는 진공상태에서는 자라날 수 없다. 충분한 공기와 물, 따뜻한 햇빛이 없다면 덕과 자유의 나무는 생장할 수 없다. 그러나 토리노에서는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충분한 공기와 물은 거센 폭풍과 세찬 급류였고, 따뜻한 햇빛은 뜨거운 열기였다. 100년 동안 토리노에서 벌어진 자본과 노동의 투쟁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진 환경에서 살아남은 식물들이 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는 슬픔의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스크리브너의 말을 빌자면 "멜랑콜리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며, 노스탤지어가 '상실'에서 비롯된다면 멜랑콜리는 '결여'에서 유래한다."
p.200 바꿔 말해, 노스탤지어가 한때 소유했으나 상실한 대상을 그리워하는 감정인 반면, 멜랑콜리는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슬픔이다. 따라서 노스탤지어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을 다시 획득하려고 하지만, 멜랑콜리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에 원래부터 있던 결여를 응시하며 "자신이 실패한 장소들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고 한다.

현대 사회상이야 어떻든 한때 이탈리아는 강국이자 파시즘이 발흥하고 또 세를 떨쳤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민중이 있었고, 반파시즘과 자유를 외치는 이들이 존재했다. 토리노는 용광로같은 공업도시이자 노동으로 뭉친 이들의 혁명정신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몽테뉴에게는 "몹시 축축한 곳에 서투르게 조성되어 호감이 안 가는 소도시"였으나 한 세기 반쯤 후의 몽테스키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주지"였으며 이후 니체에게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곳"이었던 도시. 이 책은 물러설 수 없는 사상들이 충돌하는 격전지로서의 20세기 토리노, 현대에 이르러 멜랑콜리에 에워싸인 토리노와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p.202 토리노의 20세기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까? (...)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토리노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이 투쟁이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벌어진 공간이다.

뜨거운 투쟁과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멜랑콜리의 도시, 토리노. 상실과 애도 이후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트라베르소의 말처럼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p.201 특히 역사학자들은 “목격자"이자 "망명자” 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한편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투성을 회복하여 기억을 역사로 다시 쓰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만일 멜랑콜리가 결여를 응시하며 실패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결여를 채우고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려는 욕구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을 맺는 지금까지도 이 책을 고작 3천여자의 글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답을 내리기 어렵다. 때때로 시간을 들여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이 있다. 안개 너머로 햇살이 무르고 느리고 묵직하게 비칠 때의 낯선 곳으로의 그리움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감정이 멜랑콜리라면, 투쟁으로서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멜랑콜리하다. 그러니 결여를, 부재를 응시하며 실패를 기억하려는 욕구, 빈 자리를 더듬는 움직임은 비극의 반복을 막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느릿한 그리움에 젖어 물들어가기만 하지 않을 그 도시에서.
p.200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멜랑콜리는 애도를 통해 상실의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않은 멜랑콜리란 곧 "완료되지 않은 애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토리노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는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일 수 있다.
p.207 이 오랜 충돌의 역사는 포아가 말하듯이 “오늘은 너, 내일은 나라는 투의 승리와 설욕의 정신 상태"를 조장했다. 동의와 지도의 순간은 짧았고, 강압과 지배의 시기는 길었다. 안정된 헤게모니는 토리노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실은 진정한 승자도 없고 진정한 패자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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