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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vs 보부아르 ㅣ 세창프레너미 11
변광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2월
평점 :
*세창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서는 남에게 소개하기 쉽지 않다. 그것도 '이러니까 저렇게 해라' 식의 자기계발서의 형식이 아닌, 정말로 철학자 혹은 어떤 학문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면 더더욱. 혼자 보고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두는 요약집이 아니라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어떤 이의 치열한 사유를 따라가며 느꼈던 감동을 풀어두는 일은 정말,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닌, 어떻게든 함께 읽고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역시 애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창의 프레너미 시리즈는 종종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데... 각 원저의 입문 역할을 하는 명저산책 시리즈에 비해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에게 적합하다. 저자별로 다르겠지만 어느정도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있으나 친우 혹은 지우이자 대립각을 세웠던 라이벌로서의 프레너미인 두 학자(때로는 그들의 학파까지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서술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본적인 흐름이나 큰 줄기가 되는 사건들은 알고 읽는 편이 이롭다. 싫다면? 어쩌겠어요. 맨 땅에 헤딩 한 번 하고 시작하는거지, 뭐.
엘리트 사회인 고등사범학교의 콧대 높은 3인방이었던 사르트르, 항상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꼭 비버(Beauvoir와 Beaver의 발음이 유사함)같다며 Castor(불어로 '비버'를 뜻함)라는 별명이 붙었던 보부아르. 그들은 1929년 이후 서로를 "지적으로 훌륭한 훈련 파트너", "완벽한 대화 상대자"로 여기며 사랑을 꽃피우다 사르트르의 입대를 계기로 계약 결혼을 시작한다. 그들은 생애 내내 유지한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존중에 기반하는 관계였다.
p.43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처음 만나면서부터, 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서로에게 '당신(vous)'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은 존칭형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를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고자 했다.
사랑의 관계를 일방적 희생이 아닌 나의 잉여 존재로부터 벗어고자 하는 정당화의 시도인 동시에 타자의 잉여존재 역시 정당화하는, 서로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우리-주체'의 형상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여긴 사르트르에게 이 계약결혼은 평생에 걸친 사랑의 실험과도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쌍방이 주체성의 상태에 머무는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차례 파경의 위기를 맞았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으나 기어코 반세기 이상 관계를 지켜냈다. 그들에게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상, 학문, 일생의 동지.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관습에 저항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을까.
p.87 사르트르의 사유 체계 내에서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는 존재관계에서 한 인간의 주체성과 다른 인간의 주체성의 결합을 전제로 하는 사랑과 언어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1929년 계약결혼을 맺으면서 설정했던 목표는 바로 이처럼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과 언어를 실패로 끝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반세기를 자신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사실에 대해 끝없이 도전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 자신들의 학문적 위업뿐만 아니라 세기의 이슈가 되었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사상 기반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길을 개척하고 또 목소리를 내기를, 혼란한 시대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두 참여자들의 사랑. 둘 간의 연대, 같지만 다른 길을 가며 주고받았던 영향과 작품세계를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은 지난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최악이자 최대의 규모로 다시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체험했던 세대에 속한다. 실제로 그들의 현실참여적 면모는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진성을 띄기도 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절대성 혹은 본성의 선함에 기댈 수 없는 존재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들은 그저 대상의 의미를 고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투의 존재인 인간이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해 지는 책무, 객체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존재 의미,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난 현실의 수치심 등을 표현하고 그를 통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p.107 아울러 이런 '대자-즉자'의 융합이 바로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후의 목표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인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지향성을 발휘하고 있는 대자가 사물의 존재 방식인 즉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체와 동시에 주검일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인간은 ”무용한 열정“이라는 결론에 함축된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보부아르는 『노년』을 통해 이렇게 묻는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이 작품은 노인을 중심으로 논하지만, 나는 보부아르가,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르트르 또한, 이렇게 묻고싶어했다고 믿는다.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취약해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
p.303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할 것이다.
(…)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내야 하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이 말년을 빈손으로 고독하게 맞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화가 일단 형성된 후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무기력한 지식이 아니라면 (…) 인간은 모든 나이에서 능동적이고 유용한 시민일 것이다. 만일 인간이 어린 시절부터 (…) 자기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본질적이고 집단적인 삶에 참여한다면, 그는 결코 유배를 겪지 않을 것이다.
여담으로, 사르트르에 큰 애정을 지닌 저자께는 죄송하지만 읽는 내내 이놈의 사르트르!!하고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어요... 사실 세 대쯤... 아니 솔직히, 나만 그래? 아닐걸요? 이거 보고 누구 하나쯤은 몰래 두 대 쥐어박고 갈걸요?
p.54 또한 인간들 사이에는 정말로 말하기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기 마련이다. 가령, 사르트르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까지 보부아르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보부아르는 그런 얘기를 사르트르에게 하지 못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계약조건은 남자인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그녀는 이 조건을 남자에게만 유리한 '알리바이'였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이 조건이 지켜지지 못했음을 실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