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멜랑콜리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장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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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핏빛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이 도시에서는 "갈등과 무질서를 통한 질서의 창출, 다양한 소요와 효율성 사이의 충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그런 창조와 파괴의 어지러운 반복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멜랑콜리, 한동안 제법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단어로 기억한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는 채로 모든 것이 멜랑콜리-로 수식되는 편이었지만. 그러나 본디 "멜랑콜리"란 그러하지 않은가. 어쩐지 느리고 무겁고, 열기가 가신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감정과 언어의 한가운데에서는 조금 비켜난 느낌. 솔직한 심정으로 "멜랑콜리 피아노"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 지금도 명확하게 설명할 언어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있는 힘껏 느껴보는 수밖에.
p.9 "결국에 우리의 도시는 본성상 멜랑콜리하다." (...) "이 도시의 본질적인 성격은 멜랑콜리이다." (...) 한낮인데도 황혼녘처럼 느껴지는 잿빛 도시 토리노의 특징을 멜랑콜리하게 드러내고 있다.
p.16 자유는 진공상태에서는 자라날 수 없다. 충분한 공기와 물, 따뜻한 햇빛이 없다면 덕과 자유의 나무는 생장할 수 없다. 그러나 토리노에서는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충분한 공기와 물은 거센 폭풍과 세찬 급류였고, 따뜻한 햇빛은 뜨거운 열기였다. 100년 동안 토리노에서 벌어진 자본과 노동의 투쟁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진 환경에서 살아남은 식물들이 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멜랑콜리와 노스탤지어는 슬픔의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스크리브너의 말을 빌자면 "멜랑콜리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며, 노스탤지어가 '상실'에서 비롯된다면 멜랑콜리는 '결여'에서 유래한다."
p.200 바꿔 말해, 노스탤지어가 한때 소유했으나 상실한 대상을 그리워하는 감정인 반면, 멜랑콜리는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슬픔이다. 따라서 노스탤지어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을 다시 획득하려고 하지만, 멜랑콜리적인 주체는 상실한 대상에 원래부터 있던 결여를 응시하며 "자신이 실패한 장소들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고 한다.

현대 사회상이야 어떻든 한때 이탈리아는 강국이자 파시즘이 발흥하고 또 세를 떨쳤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민중이 있었고, 반파시즘과 자유를 외치는 이들이 존재했다. 토리노는 용광로같은 공업도시이자 노동으로 뭉친 이들의 혁명정신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몽테뉴에게는 "몹시 축축한 곳에 서투르게 조성되어 호감이 안 가는 소도시"였으나 한 세기 반쯤 후의 몽테스키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주지"였으며 이후 니체에게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곳"이었던 도시. 이 책은 물러설 수 없는 사상들이 충돌하는 격전지로서의 20세기 토리노, 현대에 이르러 멜랑콜리에 에워싸인 토리노와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p.202 토리노의 20세기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까? (...)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토리노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이 투쟁이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벌어진 공간이다.

뜨거운 투쟁과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멜랑콜리의 도시, 토리노. 상실과 애도 이후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트라베르소의 말처럼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p.201 특히 역사학자들은 “목격자"이자 "망명자” 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한편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투성을 회복하여 기억을 역사로 다시 쓰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역사가 기억으로 치환되면서 어떤 것은 기억되지만 다른 것은 망각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를테면 혁명과 반파시즘에 대한 망각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기억들을 역사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만일 멜랑콜리가 결여를 응시하며 실패한 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결여를 채우고 실패한 지점을 기억하려는 욕구가 그런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글을 맺는 지금까지도 이 책을 고작 3천여자의 글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답을 내리기 어렵다. 때때로 시간을 들여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이 있다. 안개 너머로 햇살이 무르고 느리고 묵직하게 비칠 때의 낯선 곳으로의 그리움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감정이 멜랑콜리라면, 투쟁으로서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멜랑콜리하다. 그러니 결여를, 부재를 응시하며 실패를 기억하려는 욕구, 빈 자리를 더듬는 움직임은 비극의 반복을 막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느릿한 그리움에 젖어 물들어가기만 하지 않을 그 도시에서.
p.200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멜랑콜리는 애도를 통해 상실의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소되지 않은 멜랑콜리란 곧 "완료되지 않은 애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토리노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는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일 수 있다.
p.207 이 오랜 충돌의 역사는 포아가 말하듯이 “오늘은 너, 내일은 나라는 투의 승리와 설욕의 정신 상태"를 조장했다. 동의와 지도의 순간은 짧았고, 강압과 지배의 시기는 길었다. 안정된 헤게모니는 토리노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실은 진정한 승자도 없고 진정한 패자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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