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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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품어온 생각이 있다. 공포는 많은 경우 슬픔에 맞닿아있다고. 보복에의 두려움이 죄책감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물어뜯고 해치는 감각을 알고 있는 자는 필사적으로 제 목덜미를 감추려 드는 법이다. 가해의 가능성을 알지 못하면 보복을 두려워할 일도 없으므로.

전작 『가을비 이야기』의 수록작들이 고전 기담에 착안해 저항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공포와 절망이 녹여낸 기묘한 환상의 조각들이었다면, 『여름비 이야기』는 보다 맹렬한 포식과 치밀한 사냥꾼의 면모를 보이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도망칠 수 없다. 알아채는 순간 이미 늦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으나...

p.98 "살인자의 하이쿠는 공허하고 삭막하며 오직 무서울 따름이에요. 여기에 있는 건 전부 그런 시들뿐이죠. 형식은 하이쿠지만 옛날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자신의 범죄 행위를 재현하는, 추악한 자기만족에 넘친 저주의 말에 불과해요."

p.277 그는 현관문 앞에서 페어리 링으로 뒤덮인 잔디를 바라보고, 새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기괴한 현상에 의미가 없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균사가 만연한 지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균류는 지금까지 계속 숲을 파괴해온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 그런 인간에게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면.


앞서 말한 가해의 기억과 보복에의 두려움은 포식과 피식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에의 두려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익숙한 얼굴, 누려 마땅하다 의심 없이 믿어온 권력, '눈 감고도 다니는 길'이 불연듯 낯설어지는 것. 꿈과 현실의 경계가,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불신의 낭떠러지. 쩍 벌어진 아가리의 내부를 처음으로 마주한 자의 공포.

그것은 결국 사람이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에 기인한다. 거죽을 까뒤집는대도, 수족처럼 부린대도, 그 누구도 그날의 진상을 알지 못한대도. 나풀나풀한 옷소매, 사근사근한 눈짓에 숨겨진 진의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그 절대적인 경계. 몸 너머의 인간, 인간의 마음.

p.64 이 웃는 얼굴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서 의혹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생각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느꼈던 천사 같은 웃음과는 다른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p.138 요시타케는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지름길' '샛길'이라고 쓰인 간판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간판. 제등. 격자 창문 사이에서 유혹하는 여인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마치 식충식물처럼 사냥감을 유인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 보복에의 두려움은 가해의 기억과 죄책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죄가 곧 용서로 이어지리라는 순진한 믿음의 고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원점으로의 회귀 불가능성이 아닐까.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없다. 숨통이 끊긴 이는 돌아올 수 없다. 백번을 참회한대도, 울며 조아린대도.

하물며 기억 너머로 사라진 죄의식은 어떠하랴. 그에 더해 이만큼 빌었으면 되지 않았냐는 뻔뻔함, 속죄도 참회도 아닌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은 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죽은 사람이야 어찌되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살인자의 자기위안.

p.151 자수할까. 그런 생각도 몇 번 했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남은 인생을 구경거리가 되어 치욕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면 살아 있 을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솟구치지 않았다. 잠시 지나자 의식이 희미해지며 기억이 모호해졌다. 다만, 깊은 슬픔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상실감 같은 감정만이 잔상처럼 떠다녔다.

p.214 용서해다오. 정말로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 부디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성불해서 극락정토에 가다오. 평생 네 명복을 빌어줄게.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다오. (...) 그건 사고였어. 한순간에 벌어진 일로, 너도 거의 괴롭지 않았을 거야. 난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어.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너도 잘못했잖아?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잖아.


전작에 이어 다시금 저항할 수 없는 괴이와 무력으로 돌아온 작가에 이야기 안팎의 모두를 결말로 몰아넣는 솜씨에 이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문장에서 한겹 두겹, 죽는 줄도 모르게 숨통을 조여오는 거미줄을 연상하기 때문일까. 알아차린 순간 처음으로 달려가려 하나, 막다른 길이다.

동시에 읽는 내내 인간의 도리를 넘어선 죄를 묻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정의에의 의지가 불가하다면 남은 길은 결국 저주와 복수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방을 둘러친 덫의 결말은 슬픔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허무와 슬픔. 그렇게 몰아치고도 결국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두려움이 뿌리내린 곳은 슬픔이라고.

p.320 세계는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물결치고 있다. 몸도 마음도 산산조각이 난 듯한 감각. 의식은 드넓은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맥락 있는 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강렬한 생각이, 뿔뿔이 흩어진 자기 자신을 잠시 뭉치게 한다. 그것은 한없는 사랑이고 분노와 증오이며, 그리고 공포였다. 하지만 이윽고 망각이 모든 걸 어둠으로 뒤덮으려고 한다. 잊고 싶지 않다...

p.353 작별 인사라는 건 알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진정한 이별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잊는 게 아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잊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리라.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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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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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원류 혹은 근원에 가까운 글을 만난다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동시에 제법 찝찝한 일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간 내 멋대로 쌓아올린 작가의 인상이 무너지거나 미묘하게 느껴지던 기류의 시작점을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이고이 모셔둔 정원석 아래 벌레소굴이 있을지 금덩이가 있을지 뒤집어 파보기 전까진 모른다 이거예요.

그런 이유로 장강명 월드의 원류라는 이 책을 집어드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나름의 변을 달아본다. 『뤼미에르 피플』 동명의 빌딩에 살고 있거나 그 주변의 사람들을 소재로 한 열 편의 연작소설로, 그곳은 빛, 광명이라는 뜻의 이름과는 딴판의 '밑바닥 소굴'로 그려진다.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하며 주류에서 밀려난 낙오자들의 안식처.

p.59 남자는 지금 자신이 세계 최초의 '숨 참기' 자살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고통에 질 수 없다는 오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 돌이켜보면 남자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은 내가 정한 것이었나? 그 목표라는 것들은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p.110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재홍의 품에 안길 때 나는 스스로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재홍을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니면 내가 재홍을 포기하고 그와 떨어질 수 있을지. 아마 나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 그건 내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재홍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약한 사람은 어떤 것을 경험해도, 죽을 위기에 빠졌다 살아난다 해도, 결국 변하지 못한다.


등장인물 제각각은 사회의 어떤 '정상성'에 부합하지 못한다. 밀려나고 외떨어져있다. 고만고만한 도심 속 빌딩, 그 안의 판에 박은듯 똑같이 생긴 방, 그래, 집보다는 방에 가까울 공간의 사람들. 얼핏 보기에 그저 다 같은 낙오자로 보이나 행복은 비슷비슷하지만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이라는 말처럼 그들을 이루는 결핍은 제각각이다.

유흥과 환락의 밀집,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노동에 찌든 일상, 몸과 세계와 나와 남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의 뤼미에르, 빛들의 무리, 뤼미에르 빌딩. 그들의 현실과 우리시대를 요약하는 것은 죽어가는 눈, 타인에의 무관심, 경멸과 모멸이 아닌가. 도시의 밤은 지상의 살아 춤추는 별빛이 아닌 고깃배의 불빛 혹은 부나방의 환상과 닮아 있다.

p.21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녀에게서는 진한 슬픔이 풍겨 나왔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의 슬픔은 빈소 한 곳의 슬픔보다 컸다. 어떻게 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슬픔이 담겨 있을 수 있는지, 그렇게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한 척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p.45 여자아이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야비한 운명의 덫에 걸려 거지 같은 상황에 빠진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다른 선택을 했어도 별 수 없었을지 몰라'라는 생각이 힘든 삶에 위안이 돼 주었다.


이런 군상을 그려내는 법에 있어 가장 손쉬운 선택은 동정일 것이다. 혹은 그럼에도 인생은 살만하다는, 대책없는 긍정 캐치프레이즈거나. 그도 아니면 드라마 주인공처럼 캔디삼순이로 개명이라도 하든지. 그러나 작가는 잔뜩 상처받고 균열투성이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달콤한 연민을 구하지 않는다.

안전하고 푹신한 위안을 대차게 걷어차고 떠나버린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보여줄 생각도 없이. 환상과 절망의 경계를 열쳐둔 채로. 작중 괴수들, 인간 아닌 것과의 경계가 흐려진 이들을 보라. 여기서 다시금 독자는 작중 금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현실이 이미 반인반수의 세계 아닌가.

p.158 '게임'에 대해서 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그날 술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이용해 사촌들에게 모욕감을 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는 사촌들이 자신을 괴물로 봐주길 원했다. 그를 불쾌해하면서 두려워하다 마침내 피하게 되길 바랐다.

p.282 어머니의 왕국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나, 빠르게 성장하는 중인 걸까? 쥐들의 지하 왕국은 먼 고대 괴물 쥐의 후손들로 이뤄진, 쇠퇴하는 사회일 거라 여겨왔는데… 우리 종족에게 미래가 있다는 발견으로 갑자기 힘과 희망을 얻은 듯하면서, 동시에 신촌 지하에 있는 괴물 쥐의 서식지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 난감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연속을 한 데 묶는 것은 슬픔일지 모른다. 밀려나고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사람들. 겨우내 웅크려 상처를 핥고 또 핥으며 거듭 곪아터지는 마음들. 그 삶들을 잔인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장들에는 형언키 힘든 위로가 담겨있다. 이 잔혹무도하고 곰팡내나는 환상들이 그저 조롱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손을 뻗게끔 한다. 파국을 예견하면서도 끌어안게 한다. 가난의 습기가 옮을까, 번번이 실패하는 인생이 전염될까 소스라치게 털어버리는 대신.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담담한 시선이 있다. 책을 덮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 들어설 이름들을 지워내는 데에는 평생으로도 모자라리라, 되뇌어본다.

p.318 날이 있는 물건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면서도 그런 물건이 근처에 있으면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손에 쥐고, 휘두르고, 무언가를 베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나중에 자신이 그걸로 무서운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넌 참 이상해"라고 말했다.

p.353 섬이 꾸는 꿈은 한없이 아름답고 동시에 비인간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름다움이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오해한다. 섬은 밀려오는 강물과, 자신을 둘러싼 지형과, 자신이 품은 동식물을 재료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했다. 강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히, 쉼 없이 노래하고 싶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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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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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언젠가는 누군가의 땅이었고, 또 언젠가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파헤친 후에 떠나갔으며, 지금은 겪어본 적 없는 비바람과 파도에 조금씩 사라져가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살아가는 원주민, 이방인, 혼혈 혹은 흔적... 무엇으로도 불리고, 어떻게도 불릴 수 없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또다른 지구 어딘가의 작은 섬, 와요와요.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말과 노래로 소통하는 사람들, 신화와 노래로 이어지는 기억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오래된 율법에 따라 장자 아닌 남자는 섬을 떠나라. 그렇게 아트레유는 차남들의 운명, 바다로 알 수 없는 길을 떠난다. 죽음의 목전에 당도한 곳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쓰레기섬.

p.36 지진은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도 아주 쉽게 사람을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삶에서 어떤 것을 빼앗거나, 그것을 말라 쪼그라들게 하면 된다.

p.171 한편 아트리에는 자기 몸이 점점 변하는 걸 느꼈다. 잇몸에서 자주 피가 나고 관절도 아팠다. 수영할 때 전처럼 몸이 자유롭지 않았고 때때로 현기증이 나서 다시 물으로 돌아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 썩은 내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뒤섞인 악취에 계속 구토가 나와 몸이 더 약해졌다. 게다가 벌레도 많아져 곳곳에 파리와 모기가 들끓고 해류도 불안정했다.


그곳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무덤이다. 형형색색의 쓰레기들이 수만년의 소멸을 유예당한 시취의 공간이다. 거대한 무덤, 망각된 세계에 실려 아트레유는 타이완에 도달해 앨리스를 만난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영영 기다리고만 있는 그 사람을.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해버린 그는 아트레유로 인해 다시금 삶의 궤적으로 돌아온다.

우연으로 도래한 낯선 이를 살리기 위해, 이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기에.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언어와 문화, 그 장벽은 노래와 시선을 주고받음에 따라 서서히 허물어진다. 그들 각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두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p.208 " 이 섬에 있는 모든 소각장과 매립지, 최첨단 분해 시설을 동원해도 그 쓰레기를 다 감당할 수 없어. 그렇다고 이란이나 타이베이가 쓰레기를 받아줄 것 같아? 빌어먹을, 일본과 중국은 책임을 떠넘긴 지 오래야. 하지만 쓰레기는 아주 공평하지. 쓰레기 소용돌이가 해류에 쪼개져 흩어졌으니까 각자 자기 몫의 쓰레기를 떠안게 될 거야."

p.216 뭘 쓰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앨리스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써서 뭣 하려고요?" "사람을 구하려고." 앨리스가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우밍이의 소설은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일이 지나간 후의, 그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선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세계에는 수많은 고통과 비극이 있다. 연약한 인간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고, 어떤 상실은 도저히 메워질 수 없다. 만남은 순간이고, 헤어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혹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잠시 포개졌던 땅이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쓰레기 산이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추천사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 속 세계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무력의 진창에서도 살아간다. 기억이, 말이, 마주치는 눈이 세계를 부수고 태어나게 한다. 개발이 파멸이 되어 돌아오는 세계를 이다지도 장엄한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감은 눈 너머의 세계를 본다. 너의 의미를 기억해.

p.373 "하지만 파도가 언젠가는 떠나가듯이 기억과 상상은 언젠가는 분리될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지." 복안인이 말했다. "이건 대부분의 생물이 문자로 기억을 저장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존재,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야."

p.391 "앨리스, 날 위해 기도해줄 수 있어요?" (...) "기도가 도움이 될까?" "아마 안 될 거예요. 바다의 현자... 내 아버지는 바다가 갑자기 무엇을 가져갈지, 무엇을 가져다줄지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예요."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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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디츠 - 나치 포로수용소를 뒤흔든 집요한 탈출과 생존의 기록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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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우아한 자들의 연회장이자 별장이었고 사냥터였다가 정신병원이었다가 감옥이 되었다가... 세계가 휘말린, 발 닫는 곳마다 포화의 흔적을 남기던 전쟁의시대에 포로수용소가 된 고성, 콜디츠. 수백년을 거치며 그 규모와 모습을 달리하는 내내 누군가에겐 그저 감금과 공포의 장소였던 그곳이 전쟁기에 이르러 다시금 역사의 충실한 반복이 된 것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자고로 사람 있는 곳에 소동 없을 수가 없는 법이라. 일반 포로들과는 대우가 다른, 명예와 신사도를 아는 이들의 집합이라는 장교수용소도 다를 바 없다. 바깥에서야 높으신 분들이지, 일단 몰아다 가두고 나면 골치도 이런 골치가 없는 인간군상이라 이 생생한 투쟁기가 감동 이전에 요란, 소동, 난장판의 한복판이라 느껴졌다고 한다면, 너무한 감상일까?

p.8 콜디츠성은 무시무시한 감옥이었으나 부조리할 때가 많았고, 고통의 장소였으나 고급스러운 희극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 철조망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이 새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겪었다. 그동안 성 안의 삶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고, 밖에서는 전쟁이 가차 없이 계속되었다. 영웅적인 포로가 있었지만, 그들도 인간이었다. 강인한 동시에 약하고, 용감하지만 겁에 질린 그들은 쾌활했다가, 단호했다가, 절망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p.53 〈그곳은 유럽의 축소판이었다.〉 한 포로는 이렇게 말했다. 수감된 포로들이 명목상으로만 연합되어 있는 것도 유럽과 비슷했다. (...) 국적을 초월해서 개인적으로 강한 우정을 맺은 사람들도 있고, 언어 공부를 위해 짝을 지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판에 박힌 인식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 여러 나라는 서로 평화롭게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간 수많은 상상과 말들에서 콜디츠는 저항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들춰낸 기록은 그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곳에도 인간이 있었다. 그리워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했던 이들이. 수년간의 탈출시도에서는 일종의 신념이나 광기에 가까운 감정까지 느껴진다. 돌아갈 곳을 잃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하듯이.

동시에 콜비츠의 '투지'와 '명예'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대인 동시에 계급과 인종, 민족의 시대였다. 장교는 장교, 병사는 병사, 유색인은 유색인이었으며 특권층의 '가치'는 공고했다. 국가와 집단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조차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바깥 사회'의 반복이 누군가에게는 감옥 안의 감옥, 수용소 안의 수용소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p.267 전쟁이 끝난 뒤, 과거 콜디츠에 갇혔던 사람들은 그곳의 포로들이 계급을 따지지 않고 형제처럼 끈끈하게 지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탈출하겠다는 공통의 결의 덕분에, 바깥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차이와 불화가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확히 정반대였다.

p.347 라벤더 중령은 인도가 결코 독립할 수 없는 이유와 인도인의 타락에 대해 미친 듯이 독설을 쏟아 내고 있었다. (...) 결국 마줌다르가 폭발했다. 「당신과 나의 차이는 이겁니다. 중령. 당신은 내 나라에서 25년을 살았는데 그 나라의 여러 언어 중 단 한 개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 나라에서 15년 동안 살았는데 당신네 언어를 포함해서 5개 국어를 하죠.」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특징이라는 순진한 통념을 비웃듯, 명예로운 신사들의 세계에서조차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평범하게' 절멸의 길로 끌려간 쪽과 '운 좋게' 장교로 취급된 쪽이 있을 뿐. 그러므로 콜디츠의 포로들과 간수들이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만은 한 마음이 된 것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그들 모두 포로였지만, 다 '같은 포로'는 아니었다.

몇 년간 지척에 있었던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다는 포로들과 협력자들, 간수들의 증언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각기 명예와 신념을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신념에 모두가 평등한 사람이라는 것은 포함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p.81 콜디츠의 유대계 프랑스인 중 일부는 출신이 좋아서 이곳에 갇히게 되었지만, 팻 리드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냥 유대인이라서 거기에 갇혀 있었다〉. (...) 많은 영국인은 프랑스인 중에 독일인과 똑같은 반유대주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 전체가 그렇듯이, 프랑스군 포로들도 샤를 드골과 빨리 합류해서 나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쪽과 나치에 협력하는 비시 정권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p.422 지난 세월 동안 콜디츠에 대해 많은 사람이 많은 글을 썼지만, 이 노동 수용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작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을 하며 굶어 죽고 있었는데도. (...) 패배한 독일군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SS 간수들은 유대인 수감자들을 한 번에 다섯 명씩 체계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동이 트기 직전에야 총소리가 멎었다.


수년을 담장 너머 세계와 기약없이 격리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들의 온갖 기상천외한 탈출 시도와 '유머러스한 저항'은 일견 시달리는 간수들이 불쌍해보이는 지경까지 몰아갔으며, 어느 정도는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상황, 감금된 전쟁포로의 신분조차, 심지어 탈출하는 순간조차도 유머 감각과 신념을 해칠 수 없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이 '감동'에는 슬픔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좌절하고, 끝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회복할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 콜디츠는 정녕 모순이었다. 꺾이지 않은 의지는 일상의 괴리 앞에 형언할 수 없는 부조리의 물음이 되었다. 그곳에 인간이 있었다. 끝내 잃어진 이들, 그리고 살아남은 기억과 함께.

p.322 그는 끝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콜디츠를 떠나던 그날 담장 밖에 서서 그는 무너졌다. (...) 그때부터 영원히 현실은 언제나 그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마침내 자유를 쟁취했으나,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그는 끝내 되찾지 못했다. 프랭크 플린에게 자유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p.448 그린은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 이제 그는 자유를 헤쳐 나가야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갇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무한히 넓은 곳에 떨어졌다. 콜디츠에서 그는 다른 포로들의 이름, 그들의 목소리와 사연, 두려움, 치아, 입냄새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깨어나고 있는 이 도시의 바쁜 시민들은 그를 몰랐다. 알 수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자유로웠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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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사악한 말 - “나는 인간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다”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50개의 문장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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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과 오용의 대명사이자 어쩌면 그 이름보다 저서들이 유명할 철학자. 그 어떤 맹수보다 사납고 살육자보다도 냉정한 문장들.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만큼 공격당하는 폭풍과 분란의 아이콘. 신의 죽음을 선언한 자.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그의 철학은 여전히 어설픈 이해와 양순한 눈매로 무장한 추종자들에 돌을 던지고 있다.

언젠가의 '그'의 말처럼, 니체의 문장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사유로 가득하다. 무수한 규율과 '상식'으로 덧대고 둥글려진 인간 내면의 본성, 욕망과 의지를 거침없이 충동질한다. 무해하고 안락한 평화에 안주하고픈 연약한 마음을 무자비하게 겨냥해 파헤친다. 인간은 무해하기 떄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무너뜨리고 파괴하라. 의심하고 창조하라. 이빨 가진 동물, 인간이여. 지성과 이성의 힘은 그에 있으니.

p.9 니체의 말은 사악하다. 삶을 체험하도록 만들려고 오랜 기간 우리 삶의 토대가 됐던 모든 믿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말라는 니체처럼 사악한 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니체를 읽지 않으려고 우리는 니체를 읽는다.

p.75 상처를 받지도 주지도 않는 무해한 사람은 겉으로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만약 그들이 내면의 폭력성과 싸워본 적이 없다면, 그들의 선함은 얼마나 깊은가? 무해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남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낫다. 무해함만 존재하는 세계에선 이해와 공감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숱한 오해와는 반대로 니체의 철학은 극한의 이기주의나 도덕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들의 사회'가 감춘 도덕의 새로운 차원을 발굴해내는 역할을 한다. 그의 깨부수는 우상은 돌연 나타난 것이 아닌 관습과 구태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변주임에 틀림없다.

우리 본성의 이빨을, 충동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긍정할 것. 안주하고 굴복하지 말 것. 자기 자신으로 살 것. 먼지 쌓인 우아함의 굴레에서 벗어나 상승하고 솟아오르려는 의지로 충만해질 것. 유쾌와 명랑을 잃지 말 것. 저자와 함께 읽는 50개의 '사악한 문장'을 거쳐온 독자는 그 끝에서 다시 묻게 될 것이다. 인간이여, 인간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p.133 경멸은 정체를 막고 변화를 일으키며 권력의지를 북돋운다. 경멸이 없다면 개인과 사회는 안주에 빠져 평범함에 만족하는 마지막 인간의 사회가 된다. 경멸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경멸의 능력을 제거하는 사회는 침체하고 쇠퇴해, 탁월함보다 평범함을 추구한다. 자신의 가장 높은 희망의 씨앗을 심으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자신에게서 가장 경멸하는 것은 무엇인가?

p.231 우리는 모든 게 결정된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설령 우리가 모든 게 결정된 운명에 따라 사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위해 싸우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자유의지로 경험한다. (...) 니체의 운명은 전통에 대한 저항과 대립이다.


*도서제공: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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