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품어온 생각이 있다. 공포는 많은 경우 슬픔에 맞닿아있다고. 보복에의 두려움이 죄책감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물어뜯고 해치는 감각을 알고 있는 자는 필사적으로 제 목덜미를 감추려 드는 법이다. 가해의 가능성을 알지 못하면 보복을 두려워할 일도 없으므로.

전작 『가을비 이야기』의 수록작들이 고전 기담에 착안해 저항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는 공포와 절망이 녹여낸 기묘한 환상의 조각들이었다면, 『여름비 이야기』는 보다 맹렬한 포식과 치밀한 사냥꾼의 면모를 보이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도망칠 수 없다. 알아채는 순간 이미 늦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으나...

p.98 "살인자의 하이쿠는 공허하고 삭막하며 오직 무서울 따름이에요. 여기에 있는 건 전부 그런 시들뿐이죠. 형식은 하이쿠지만 옛날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자신의 범죄 행위를 재현하는, 추악한 자기만족에 넘친 저주의 말에 불과해요."

p.277 그는 현관문 앞에서 페어리 링으로 뒤덮인 잔디를 바라보고, 새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기괴한 현상에 의미가 없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균사가 만연한 지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균류는 지금까지 계속 숲을 파괴해온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 그런 인간에게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면.


앞서 말한 가해의 기억과 보복에의 두려움은 포식과 피식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에의 두려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익숙한 얼굴, 누려 마땅하다 의심 없이 믿어온 권력, '눈 감고도 다니는 길'이 불연듯 낯설어지는 것. 꿈과 현실의 경계가,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불신의 낭떠러지. 쩍 벌어진 아가리의 내부를 처음으로 마주한 자의 공포.

그것은 결국 사람이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에 기인한다. 거죽을 까뒤집는대도, 수족처럼 부린대도, 그 누구도 그날의 진상을 알지 못한대도. 나풀나풀한 옷소매, 사근사근한 눈짓에 숨겨진 진의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그 절대적인 경계. 몸 너머의 인간, 인간의 마음.

p.64 이 웃는 얼굴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서 의혹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생각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느꼈던 천사 같은 웃음과는 다른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p.138 요시타케는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지름길' '샛길'이라고 쓰인 간판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간판. 제등. 격자 창문 사이에서 유혹하는 여인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마치 식충식물처럼 사냥감을 유인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 보복에의 두려움은 가해의 기억과 죄책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죄가 곧 용서로 이어지리라는 순진한 믿음의 고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원점으로의 회귀 불가능성이 아닐까.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없다. 숨통이 끊긴 이는 돌아올 수 없다. 백번을 참회한대도, 울며 조아린대도.

하물며 기억 너머로 사라진 죄의식은 어떠하랴. 그에 더해 이만큼 빌었으면 되지 않았냐는 뻔뻔함, 속죄도 참회도 아닌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은 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죽은 사람이야 어찌되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살인자의 자기위안.

p.151 자수할까. 그런 생각도 몇 번 했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남은 인생을 구경거리가 되어 치욕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면 살아 있 을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솟구치지 않았다. 잠시 지나자 의식이 희미해지며 기억이 모호해졌다. 다만, 깊은 슬픔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상실감 같은 감정만이 잔상처럼 떠다녔다.

p.214 용서해다오. 정말로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 부디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성불해서 극락정토에 가다오. 평생 네 명복을 빌어줄게.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다오. (...) 그건 사고였어. 한순간에 벌어진 일로, 너도 거의 괴롭지 않았을 거야. 난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어.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너도 잘못했잖아? 그런데 왜 난 아직도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잖아.


전작에 이어 다시금 저항할 수 없는 괴이와 무력으로 돌아온 작가에 이야기 안팎의 모두를 결말로 몰아넣는 솜씨에 이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문장에서 한겹 두겹, 죽는 줄도 모르게 숨통을 조여오는 거미줄을 연상하기 때문일까. 알아차린 순간 처음으로 달려가려 하나, 막다른 길이다.

동시에 읽는 내내 인간의 도리를 넘어선 죄를 묻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정의에의 의지가 불가하다면 남은 길은 결국 저주와 복수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방을 둘러친 덫의 결말은 슬픔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허무와 슬픔. 그렇게 몰아치고도 결국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두려움이 뿌리내린 곳은 슬픔이라고.

p.320 세계는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물결치고 있다. 몸도 마음도 산산조각이 난 듯한 감각. 의식은 드넓은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맥락 있는 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강렬한 생각이, 뿔뿔이 흩어진 자기 자신을 잠시 뭉치게 한다. 그것은 한없는 사랑이고 분노와 증오이며, 그리고 공포였다. 하지만 이윽고 망각이 모든 걸 어둠으로 뒤덮으려고 한다. 잊고 싶지 않다...

p.353 작별 인사라는 건 알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진정한 이별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잊는 게 아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잊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리라.


*도서제공: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