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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여기 언젠가는 누군가의 땅이었고, 또 언젠가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낯선 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파헤친 후에 떠나갔으며, 지금은 겪어본 적 없는 비바람과 파도에 조금씩 사라져가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살아가는 원주민, 이방인, 혼혈 혹은 흔적... 무엇으로도 불리고, 어떻게도 불릴 수 없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또다른 지구 어딘가의 작은 섬, 와요와요.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말과 노래로 소통하는 사람들, 신화와 노래로 이어지는 기억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오래된 율법에 따라 장자 아닌 남자는 섬을 떠나라. 그렇게 아트레유는 차남들의 운명, 바다로 알 수 없는 길을 떠난다. 죽음의 목전에 당도한 곳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쓰레기섬.
p.36 지진은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도 아주 쉽게 사람을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삶에서 어떤 것을 빼앗거나, 그것을 말라 쪼그라들게 하면 된다.
p.171 한편 아트리에는 자기 몸이 점점 변하는 걸 느꼈다. 잇몸에서 자주 피가 나고 관절도 아팠다. 수영할 때 전처럼 몸이 자유롭지 않았고 때때로 현기증이 나서 다시 물으로 돌아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 썩은 내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뒤섞인 악취에 계속 구토가 나와 몸이 더 약해졌다. 게다가 벌레도 많아져 곳곳에 파리와 모기가 들끓고 해류도 불안정했다.
그곳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무덤이다. 형형색색의 쓰레기들이 수만년의 소멸을 유예당한 시취의 공간이다. 거대한 무덤, 망각된 세계에 실려 아트레유는 타이완에 도달해 앨리스를 만난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영영 기다리고만 있는 그 사람을. 살아야 할 이유를 상실해버린 그는 아트레유로 인해 다시금 삶의 궤적으로 돌아온다.
우연으로 도래한 낯선 이를 살리기 위해, 이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기에.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언어와 문화, 그 장벽은 노래와 시선을 주고받음에 따라 서서히 허물어진다. 그들 각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두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p.208 " 이 섬에 있는 모든 소각장과 매립지, 최첨단 분해 시설을 동원해도 그 쓰레기를 다 감당할 수 없어. 그렇다고 이란이나 타이베이가 쓰레기를 받아줄 것 같아? 빌어먹을, 일본과 중국은 책임을 떠넘긴 지 오래야. 하지만 쓰레기는 아주 공평하지. 쓰레기 소용돌이가 해류에 쪼개져 흩어졌으니까 각자 자기 몫의 쓰레기를 떠안게 될 거야."
p.216 뭘 쓰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앨리스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써서 뭣 하려고요?" "사람을 구하려고." 앨리스가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우밍이의 소설은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일이 지나간 후의, 그 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선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세계에는 수많은 고통과 비극이 있다. 연약한 인간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고, 어떤 상실은 도저히 메워질 수 없다. 만남은 순간이고, 헤어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혹은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잠시 포개졌던 땅이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쓰레기 산이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추천사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 속 세계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무력의 진창에서도 살아간다. 기억이, 말이, 마주치는 눈이 세계를 부수고 태어나게 한다. 개발이 파멸이 되어 돌아오는 세계를 이다지도 장엄한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감은 눈 너머의 세계를 본다. 너의 의미를 기억해.
p.373 "하지만 파도가 언젠가는 떠나가듯이 기억과 상상은 언젠가는 분리될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지." 복안인이 말했다. "이건 대부분의 생물이 문자로 기억을 저장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존재,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야."
p.391 "앨리스, 날 위해 기도해줄 수 있어요?" (...) "기도가 도움이 될까?" "아마 안 될 거예요. 바다의 현자... 내 아버지는 바다가 갑자기 무엇을 가져갈지, 무엇을 가져다줄지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예요."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