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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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원류 혹은 근원에 가까운 글을 만난다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동시에 제법 찝찝한 일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간 내 멋대로 쌓아올린 작가의 인상이 무너지거나 미묘하게 느껴지던 기류의 시작점을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이고이 모셔둔 정원석 아래 벌레소굴이 있을지 금덩이가 있을지 뒤집어 파보기 전까진 모른다 이거예요.

그런 이유로 장강명 월드의 원류라는 이 책을 집어드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나름의 변을 달아본다. 『뤼미에르 피플』 동명의 빌딩에 살고 있거나 그 주변의 사람들을 소재로 한 열 편의 연작소설로, 그곳은 빛, 광명이라는 뜻의 이름과는 딴판의 '밑바닥 소굴'로 그려진다.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하며 주류에서 밀려난 낙오자들의 안식처.

p.59 남자는 지금 자신이 세계 최초의 '숨 참기' 자살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고통에 질 수 없다는 오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 돌이켜보면 남자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은 내가 정한 것이었나? 그 목표라는 것들은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p.110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재홍의 품에 안길 때 나는 스스로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재홍을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니면 내가 재홍을 포기하고 그와 떨어질 수 있을지. 아마 나는 그중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 그건 내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재홍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약한 사람은 어떤 것을 경험해도, 죽을 위기에 빠졌다 살아난다 해도, 결국 변하지 못한다.


등장인물 제각각은 사회의 어떤 '정상성'에 부합하지 못한다. 밀려나고 외떨어져있다. 고만고만한 도심 속 빌딩, 그 안의 판에 박은듯 똑같이 생긴 방, 그래, 집보다는 방에 가까울 공간의 사람들. 얼핏 보기에 그저 다 같은 낙오자로 보이나 행복은 비슷비슷하지만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이라는 말처럼 그들을 이루는 결핍은 제각각이다.

유흥과 환락의 밀집,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노동에 찌든 일상, 몸과 세계와 나와 남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의 뤼미에르, 빛들의 무리, 뤼미에르 빌딩. 그들의 현실과 우리시대를 요약하는 것은 죽어가는 눈, 타인에의 무관심, 경멸과 모멸이 아닌가. 도시의 밤은 지상의 살아 춤추는 별빛이 아닌 고깃배의 불빛 혹은 부나방의 환상과 닮아 있다.

p.21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녀에게서는 진한 슬픔이 풍겨 나왔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의 슬픔은 빈소 한 곳의 슬픔보다 컸다. 어떻게 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슬픔이 담겨 있을 수 있는지, 그렇게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한 척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p.45 여자아이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야비한 운명의 덫에 걸려 거지 같은 상황에 빠진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다른 선택을 했어도 별 수 없었을지 몰라'라는 생각이 힘든 삶에 위안이 돼 주었다.


이런 군상을 그려내는 법에 있어 가장 손쉬운 선택은 동정일 것이다. 혹은 그럼에도 인생은 살만하다는, 대책없는 긍정 캐치프레이즈거나. 그도 아니면 드라마 주인공처럼 캔디삼순이로 개명이라도 하든지. 그러나 작가는 잔뜩 상처받고 균열투성이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달콤한 연민을 구하지 않는다.

안전하고 푹신한 위안을 대차게 걷어차고 떠나버린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보여줄 생각도 없이. 환상과 절망의 경계를 열쳐둔 채로. 작중 괴수들, 인간 아닌 것과의 경계가 흐려진 이들을 보라. 여기서 다시금 독자는 작중 금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현실이 이미 반인반수의 세계 아닌가.

p.158 '게임'에 대해서 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그날 술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이용해 사촌들에게 모욕감을 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는 사촌들이 자신을 괴물로 봐주길 원했다. 그를 불쾌해하면서 두려워하다 마침내 피하게 되길 바랐다.

p.282 어머니의 왕국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나, 빠르게 성장하는 중인 걸까? 쥐들의 지하 왕국은 먼 고대 괴물 쥐의 후손들로 이뤄진, 쇠퇴하는 사회일 거라 여겨왔는데… 우리 종족에게 미래가 있다는 발견으로 갑자기 힘과 희망을 얻은 듯하면서, 동시에 신촌 지하에 있는 괴물 쥐의 서식지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 난감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연속을 한 데 묶는 것은 슬픔일지 모른다. 밀려나고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사람들. 겨우내 웅크려 상처를 핥고 또 핥으며 거듭 곪아터지는 마음들. 그 삶들을 잔인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장들에는 형언키 힘든 위로가 담겨있다. 이 잔혹무도하고 곰팡내나는 환상들이 그저 조롱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손을 뻗게끔 한다. 파국을 예견하면서도 끌어안게 한다. 가난의 습기가 옮을까, 번번이 실패하는 인생이 전염될까 소스라치게 털어버리는 대신.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담담한 시선이 있다. 책을 덮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 들어설 이름들을 지워내는 데에는 평생으로도 모자라리라, 되뇌어본다.

p.318 날이 있는 물건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면서도 그런 물건이 근처에 있으면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손에 쥐고, 휘두르고, 무언가를 베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나중에 자신이 그걸로 무서운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넌 참 이상해"라고 말했다.

p.353 섬이 꾸는 꿈은 한없이 아름답고 동시에 비인간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름다움이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오해한다. 섬은 밀려오는 강물과, 자신을 둘러싼 지형과, 자신이 품은 동식물을 재료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했다. 강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히, 쉼 없이 노래하고 싶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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