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 김응교 장편실화소설
김응교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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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로 돌아온 사람. 가족을 두고, 고향을 두고 떠밀리듯 올라가 제 발로 돌아온 고향에서 그의 이름은 빨갱이, 용공분자, 간첩이다. 38선 너머 이북의 삶을 살다 분단 이전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세상은 북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간다던 고향에 돌아온 남의 사람이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같은 나라 같은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째서 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는가.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사라져가는 전쟁 이후, 모두가 분단된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돌아갈 수도 향할 수도 없는 반쪽짜리 소원.

p.34 오늘도 그는 동해를 가로막는 철조망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사실 여기,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이 그가 태어난 고향 땅인데 마치 고향 잃은 사람처럼, 넋 나간 사람처럼 한없이 북녘 하늘만 쳐다본다. 얘기를 나누고 보면 그는 북쪽에 있을 때 남쪽을 그렇게 보았을 성싶다.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p.369 사실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죄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나 때문에 표현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정희의 눈빛, 그 눈빛에는 정희가 겪는 고통이 찐득하게 가라앉아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제는 더 만나 보려야 볼 수도 없는 필기, 샛별이도.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가 걸어온, 잡히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길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도 국가의 부름 앞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의 기억 곳곳에는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폭력이 가득하다. 사람이 사람을, 이름이 사람을, 이념이 민족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고 말할 사람. 굴곡진 인생의 회환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한반도 현대사의 산증인이라는 수사에 모자람이 없는 생생한 기억에 빠져들다 보면 자연히 인간적인 연민에 더불어 어떤 의문이 떠오른다.

p.186 당시 인민군들은 미군에 대해서는 그 증오심이 극심해서 양키라면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국군과 맞설 때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이는 전장에서도 증오심보다는 미묘한 민족 감정이 앞서 있었다.

p.342 영문과 한글로 적힌 군사 분계선이었다. 팻말을 보자마자 갑자기 가슴 속이 흠칫했다. 분명히 여기도 나의 조국인데 하는 생각 속에, 남의 땅이라는 낯선 감정이 급습하면서 단박에 긴장되었다. 불안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옷깃에다 턱을 반쯤 묻고 계속 전진, 전진했다.


숭고에 가까운 의지와는 달리 부패는 만연하고 폭력은 언제나 정의보다 가깝다. 충성에 보답을 받았는가. 신념으로 살아온 일생의 말로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정할 수 없이 순진한 면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신이 평생을 바친 조국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한국 사회는 보수의 자리를 꿰차앉는 극우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공산당, 빨갱이, 무력진압을 만능 주문처럼 외워댔다. 콕 집어 누구만의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이 휩쓸리는 이들과 마치 그 말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들의 권좌를 공고히 다지는 이들의 사회.

p.451 나는 4기 제15차 전원회의의 결정과 김정일이 등장하는 일련의 조짐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사실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나 말고도 다른 이들 또한 불만인 듯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p.662 창백할 만큼 핼쓱한 얼굴로 그는 되레 나를 위로했다. 그는 북한에 가족이 살고 있기에, 언젠간 돌아가리라 믿고, 전향을 거부했다고 한다. (...) 그의 발음이 꼬부라졌다. 내가 그의 손을 맞잡았을 때 얼음장처럼 싸늘한 손 마디가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를 잡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오랜 고통으로 인해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통일은 물론, 어떤 수준에서의 상생도, 공존도 불가하다. 파편화되고 끝없이 아귀다툼하는 개인들의 지리멸렬한 사회. 그것을 바라는 자가 과연 누구일지, 우리는 그 근원적인 물음의 기회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김진계 옹의 삶을 좇는 길에서 묻는다. 누구의 소원일지 모를 통일, 멸공의 횃불 아래 스러진 이들을. 이 땅이 누구의 조국이었느냐고, 우리의 조국은 과연 무엇이겠느냐고. 끝없는 갈등의 추동 속에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향하고 있나. 민주 사회로의 길은 어디로 어떻게 얼크러지고 있으냐고.

p.112 1950년 필기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고, 나는 전쟁에 휘말려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이런 처지이면서도 나는 이 전쟁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 나에게 북침설과 남침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민족이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p.733 아직도 공공연히 남북한은 힘의 우위 확보와 힘의 역사 지배를 강조한다. 과연 힘에 따라 남북한이 지배될까? (...) 힘의 무력함과 민중의 위대함을 먼저 아는 쪽이 결국은 남북한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다. 김진계와 같은 분들의 긴 고난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위대함은 '힘'이 아닌 '민중' 때문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도서제공: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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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다, 고치다, 지키다 - 학교를 지탱하는 노동의 흔적
희정 지음, 김희지 사진 / 북트리거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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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특정 직업과 그 종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가, 일종의 계급이었다가, 최근에 와서는 보편적인 존칭이 된 그 이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배우기 마련이며 그로 인해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라는 의미를 담은 그 이름, 선생님. 배움의 의미 확장만큼이나 그 터전인 학교의 경계 또한 이전에 비할 수 없이 확장되었다.

좁은 의미로서의 학교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학교는 단순히 교실의 집합이 아니다. 학생과 교사 뿐만 아니라 학교를 이루는 구성원들, 일하는 사람들이 머물고 유지하며 활동하는 모든 공간에 사람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모여 학교라는 집합을 이룬다. 동시에, 누군가는 '진짜 선생님'이 아니다. 계약직과 외부협력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학교 안의 외부인이 된다.

p.6 배움의 공간이라는 학교는 골조를 올리고 기둥을 세우고 창틀을 끼운 실제의 건축물이다. (...) '배우다'라는 말은 '일하다'라는 말을 필요로 한다. 학교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p.93 정규 교사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기간제, 방과후, 특기적성, 파견강사 등 다양한 이름을 달고 '바깥 사람'으로 학교를 오간다. 이들을 아우르는 명칭은 '교육활동참여자'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그저 '참여자'라 분류되는 사람들. 그러나 명칭이 무엇이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다.


각자의 무균실이 충돌하는 요즘, 우리가 만드는 사회는 상처와 경계로 가득한 곳일지 모른다. 위험해지지 않기 위해 모든 위험 요인을 소독하고, 박멸하기를 원하는 사회. 그곳에서 상처와 실패에서 일어설 기회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상처입히고 좌절하는 순간 그대로 추락해버린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공교육의 실패와 무능 따위를. 학교는 일종의 시간 때우기, 입시의 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마저도 실질적인 경쟁력은 사교육에 몰아넣은 채. 우리 사회가 실패한 것은 공교육과 그 제도가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실패한 것이 아닐, 배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

p.141 실제 법과 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공권력 투입과 CCTV와 같은 통제 시설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학교의 안전을 지키려는 경향은 짙어지고 있다. 반면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 노년의 보안관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학교의 안전을 새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됐다. 운동장에 혼자 있는 아이를 유심히 지켜본 이가 건네는 안부야말로 학교를 지키는 일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p.291 그럼에도 계속 실패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라는 길에 나 혼자 있지 않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안전은 돌부리를 모두 치워 놓은 평평 한 길이 아니라, 어떤 길이건 함께 가 줄 사람들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상처 하나 없이 살아갈 순 없지만, 그 상처에 연고를 발라 줄 사람은 있어야 한다. 학교에 그런 이들이 더 많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의 전형적인 집합에서 약간씩 밀려나있는 사람들이다. 입시에 요구되는 교과를 맡지 않기 때문에, '수업'에 들어가지 않기 떄문에, 잠깐 쓰이고 금세 갈아치워지는 사람들이다. 선생님이지만 교사는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사는 방법,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그 간단하고 엄정한 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학교는 여전히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교육 기관'이라는 학교의 근원은 줄글로 놓이는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

p.124 학생들은 학교에서 '비/정규'의 차이를 배우고, 이것이 단순한 고용 형태를 넘어 사회적지위와 신분의 문제임을 직감한다. 이 감각은, 교단에서 하는 어떤 말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다. (...) 그럼에도 학교라는 일터에서 배움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전해준 배움이 학교라는 공간을 채운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p.160 우리는 어떤 일을 쉽다고 생각할까? 중요하지 않은 일? 필수적이지 않은 일? 아니다. 바로 우리가 잘 모르는 일이다. 다른 이가 어떤 노동을 하는지 모를 때 그 일이 쉬워 보인다. (...) 멀티플레이어가 되길 요구받는데, 세상은 그 일이 쉽다고만 단정 짓는다. 그러나 다들 내심 알고 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쉬워 보이는 일이 있을 뿐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일을 하고 내일을 고민하는 사람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학교 안팎의 학생들이 살아가고 만들어나갈 사회는 그런 곳이다. 그렇게 자라난 학생들이 좋은 사회인이 되어 나아간 사회가 좋은 곳이 되려면 '태생부터' 좋은 것만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안전하게 충돌하고 실패하며 고민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좋은 사람을 자꾸자꾸 마주하게 하는 것, 학교는 그런 곳이 되어야한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모든 방해와 다름을 말끔하게 소독한 0의 공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학교로 나아간 모든 '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우리가 살아갈 모든 날에 여전히 좋은 배움이 필요하다. 잘 살기 위해, 함께 살기 위해.

p.290 서로 다른 존재와 갈등을 조정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학교가 먼저 제초를 하는 건 아닌지. 이런 염려조차 학교가 특정 열매의 수확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풀이 어울려 자라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뿌리 뽑힐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학교에 간다.

p.292 그러니 학교에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인사를 듣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학생들에게 너는 뽑아 버리면 그만인 잡초가 아니라고, "단 한 사람이 필요한" 또 다른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도서제공: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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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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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말을 그의 삶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이겠으나, 이는 곧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말해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 자신으로서의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아가, 그의 이름이 마치 끊겨버린 길처럼, 도려내진 자리처럼 그저 흔적, 외에는 남아있지 않다면.

포기 앞에는 단 하나의 선택만이 남는다. 나로 미루어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보기. 지워지고 침묵된 흔적에서, 부재의 자리에서 존재의 기억을 더듬어나가기. 목소리를 불러내기.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당신의 이야기를, 이름을 부르는 일. 나에게서 당신을, 당신에게서 나를 그려보이는 일.

p.32 외할머니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나는 삶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조상이 된 영혼에게도, 원귀가 된 영혼에게도 삶의 과정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몇 개의 언어만으로 압축될 수 없는 순간들이 가득하다. 그 안에는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p.56 그녀들은 늘 자신들의 삶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반응 앞에서 문득 궁금했다. 특별한 삶은 무엇이고, 특별하지 않은 삶은 무엇인지. (...) 결론은, 결국 내가 담고자 하는 이야기는 특별한 사람을 다루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특별한지를 묻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설정된 특별함의 기준을 묻고 그 기준을 뒤흔드는 이야기에 언제나 더 관심이 갔다.


다큐멘터리 감독,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딸, 한국 여자. '남동생이 하나 있다' 한 마디면 아, 하고 누군가는 말 없이도 다 이해할 그런, 딸자식으로 자란 사람. 누이처럼은 되지 말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누군가의 누이로 살아온 사람. 양주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사람.

'평범하라'는 압박 속에 자라온 저자의 고백은 지극히 익숙한 동시에 평범하다. '양 씨 집안 여자들은 불행하다'는데, 불행을 안고 태어나 불행하게 살았을 그 여자들의 이름은, 얼굴은, 삶은 왜 기억나지 않을까. 무엇이 그들을 불행의 자리에 주저앉혔나.

p.31 나는 그 말을 '정상성'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했다. '정상적으로 살아야 해, 정상적으로.' 그렇다면 정상적으로 사는 삶은 뭐고, 정상적이지 않은 삶은 또 뭘까. (...) "평범해야 해, 평범" 이라는 말은 각종 통과의례를 별 탈 없이 거치고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80년 5월 이름도 명예도 없이 사라진,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살았을 어떤 이들을 떠올렸다.

p.156 고모의 존재를 지워 가며 할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화목하고 평범한 가족이라는 환상이었을까? 낙인으로 남은 고모의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족이라는 규범적 관념 속에서 가려졌을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과 존재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보낸 안전하고 화목한 시간들이 누군가를 지워서 얻은 것이라면, 더 이상 그런 화목함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저자는 오래동안 침묵으로 가려져온 또다른 양 씨 여자, 고모의 삶을 죽음에서부터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가족의 역사를 되짚는 일과도 같다. 관습의 이름으로 내쳐지는 것들, 사랑하지만 다 똑같이 사랑하지는 않는. 그 여정을 따라가노라면, 독자는, 관객은, 필연히 묻게 된다. 그 많던 '평범한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드세고, 조용하고, 욕심 많은 꿈을 꾸던 '여자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여성들은. 그 많던 여자애들은. 누이, 딸, 아내가 아니었던, 계집애도 딸년도 아닌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그 사람들은, 그 이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째서 그들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았는가. 분명 있었는데, 그 때 그렇게 살아있었는데, 꼭, 없는 것처럼. 없었던 것처럼.

p.163 애도될 수 있는 죽음과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죽음과 삶이 그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 삶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도 결코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p.184 지금까지의 가족의 시간 속에서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 흔적 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 이름, 지영이었다. 그 이름을 지우는 데에는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만, 사라진 이름이 다시 새겨지고 드러나는 데에는 몇 배 이상의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자살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 이했다는 이유로, 질문조차 박탈당했던 이름의 귀환이었다.


양주연의 기록은 기어코 양양의 말에 도달한다. 현실에 후련한 결말 따위는 없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물음은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을 불편하게 맴돌 것이다. 떠나진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끊겨버린 기억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영과 주연의 기억에 이어진 우리들은 함께 상상하고야 마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려 나거나 잊히지 않는, 여성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고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거나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 누군가의 삶도, 죽음도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쉽게 가려지거나 비밀이 되지 않는" 미래를. 나의 삶에서 당신과 우리의 기억이 손을 맞잡는, 그런 미래를.

p.10 두려움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꽤 강력해 보이지만, 하루하루 거기에 다가가 뭉쳐진 시간과 감정을 풀어 나가기 시작하면 두려움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을 알려 주기도 한다. 때로는 누군가를 깊숙이 이해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려진 슬픔과 만나게 하기도 한다. 과거를 헤매는 일은, 고모라는 존재를 알아 가고 내 안의 두려움을 응시하면서 여러 감정과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다.

p.201 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로운 세상과 이어질 수만 있다면. 그 세상과 함께 나는 매일 매일 새롭고 익숙한 용기를 이어 갈 것이다. 용기는 지나온 시간과 함께 생겨나고, 다가올 시간을 향해서 걸어간다. 용기를 낸 만큼 새로운 세상이 올까? 지금 확실한 한 가지는 내 앞에 놓인 세상 속에서 이제 더 이상 고모는 금기의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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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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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보라. 신새벽의 상쾌한 여명도, 한낮의 정직하게 내리비추는 광채도 아닌, 해가 넘어가는 때의 잔열같은 빛을. 게으르고, 부도덕하고, 형태를 흐리게 하는 색채를. 찰칵. 다른 장면. 쿰쿰한 살냄새, 땀 배인 샅의 냄새가 짙게 깔린 방 안, 문틈새로 스며들어오는 가느다란 조명의 색. 눅눅하고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공간에 고인, 살아있는 자의 열기.

찰칵. 차르륵.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나지막하지만 선명하게 파고드는 목소리.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검열된 몸, 퇴락과 쇠약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몸짓을 들려줄테니. 말해봐라. 그때의 너는 무엇이었지? 후안, 나는요, 익명의 남자가 입을 연다. 찰칵. 또다른 장면.

p.36 「그리고 이제 당신은 제게 보여 주고, 말해 주며 틈을 메워 주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 틈이 다 메워지기에 너무 많다면? 그럼 어쩌지?」 (...) 「내일은 내가 이야기할 차례가 올 거야.」 「그 말만 자꾸 하시잖아요.」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먼지 쌓인 죽음의 길로.」

p.76 후안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오직 빛 속에서만, 오직 몸속에서만 그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예리하며 생기로 충만하게 방 안을 채웠다. 매일, 해뜨기 전, 동들녘 찰나의 여명 속에서, 사막이 푸르고 한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물들면, 나는 커튼을 열었고 후안은 매트리스 위에 포개진 채 잠들어 죽음을 바라보았다.


한 권의 책, 필연적으로 순서를 갖는 언어. 그러나 두서없이 얼크러지고 때로는 말하는 사람조차도 말이 되게 말할 수 없는 그런 기억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비규범, 혹은 탈규범의 존재들. 이탈되고 모순하는 이들. 비정상이야. 태생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탈선해 도착에 도착하는 사람들. 이해의 폭력.

이것은 이야기이다. 기억인 동시에. 이 책은 소설인가? 손끝으로, 무딘 혀끝으로 더듬어 올라가는 기억의 시원. 청년과 노인. 구부러지고 부딪히고 배회하던 몸들의 역사. 검은 책에 담긴 증언들. 검게 지워진, 혹은 덮어씌워진. 어둠은 침묵을 닮았지.

p.116 「하지만 나는 우리가 가진 이 책, 내가 찾아낸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지워진 이 책이 더 좋아. 깨달음의 짧은 시들로 가득한 이 책 말이야. (...) 순서대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 페이지나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과거로부터 솟아오른 어떤 삶의 스케치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가 등장한 인물이 극복했거나 극복하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단 하나의 증언인 것을.」

p.223 「맞아요. 후안. 하지만 그 시절엔 누가 날 사랑하게 만드는 법은 그것밖에 몰랐어요. 몸부림치는 것.」 「몸부림? 멋진 말이구나… 털어 내는 게 지닌 쓸모와 망가뜨리는 게 가진 낭비와 폭력의 중간 어디쯤. 그게 바로 요령이지? 내가 그걸 좀 일찍 알았더라면…」 「침대 위에서도, 밖에서도, 늘, 몸부림쳤죠.」


쓴 사람의 글을 책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그 모양과 질감에 어떤 해석을 담았다면, 읽는 사람이 그 물성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하고 또 어쩌면 응답하는 일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가름끈의 색이라든지, 금이 그인, 지워진, 가려지고-실패된 이름들, 글자들이라든지… 번쩍, 하고 잠시 스쳤다 사라져버리는 빛을 닮은.

까슬한 표지를, 있는 힘껏 긁어내려서, 상처 내고 싶었다. 긁어내리고 찢어벗기고 싶었다. 그 아래에 무언가 있다고, 분명 이 아래에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그 다음은, 찰칵. 다음 장면. 잊어버렸어요. 침묵.

p.302 〈제5장: 백인 여성들이 말하는, 흑인 포주 밑에서 일하는 이유〉에서, 폴린, 에이다, 팬지는 자신들의 포주가 예전에 만난 백인 포주보다 더 잘해 준다고 말했어. 아니면 그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난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전 알거든요.」

p.329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 줘요, 후안.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떠나라 간청하지 마시옵소서? 모든 결말은 지저분한 결말이란다, 네네. 앞날에 놓인 모든 것은 위대한 망각이다. 이제 언제라도 암전이 찾아올 거다. 그리고 몸은… 네네, 모든 끝은 지저분하지.」 「떠나라 간청하지 마시옵소서.」


이것은 젊은 날의 혈기도, 눈부신 청춘도 아니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살갗으로의 회복을 도모하지 않는다. 대의를 품고 한 발 한 발 어떠한, 품위랄지, 긍지라고 할만한 영광으로 향하지도 않는다. 대신 죽음, 쇠약해져가는 것, 폭력과 울부짖음의 단편을 내보인다. 상처내고 비틀어지기를 선택하는 것. 여전히 철철 벌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

그게 당신이 할 말의 전부냐고 묻는다면, 어쩌면요. 모르겠어요. 들어봐요, 나는, 이 다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일렁이는 울대. 다음 장면. 완전한 어둠. 커튼을 치고 문을 닫는다. 멀어지는 등, 화면을 덮어 가리는 손. 찰칵. 암전. 침묵. 적막. 고요.

p.207 그리고 나는 소리 없는 검보랏빛 하늘을 보며 느꼈다. 아니. 감지했다. 언젠가 날이 밝아 올 것이라고 믿기조차 어려운 그때, 우리는 밤의 반대편 가장 깊은 바닥에 있었노라고.

p.366 「네가 이 이야기 좋아할 줄 알았다! 상상해 보렴! 오로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까다롭게 굴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전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요. 영원히.」 「그런 생각은 버려, 네네. 그저 흘려보내.」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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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소년 - 미시마 유키오 단편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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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이름. 알아도 보이는 신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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