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국 - 김응교 장편실화소설
김응교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9월
평점 :
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로 돌아온 사람. 가족을 두고, 고향을 두고 떠밀리듯 올라가 제 발로 돌아온 고향에서 그의 이름은 빨갱이, 용공분자, 간첩이다. 38선 너머 이북의 삶을 살다 분단 이전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세상은 북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간다던 고향에 돌아온 남의 사람이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같은 나라 같은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째서 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는가.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사라져가는 전쟁 이후, 모두가 분단된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돌아갈 수도 향할 수도 없는 반쪽짜리 소원.
p.34 오늘도 그는 동해를 가로막는 철조망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사실 여기,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이 그가 태어난 고향 땅인데 마치 고향 잃은 사람처럼, 넋 나간 사람처럼 한없이 북녘 하늘만 쳐다본다. 얘기를 나누고 보면 그는 북쪽에 있을 때 남쪽을 그렇게 보았을 성싶다.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p.369 사실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죄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나 때문에 표현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정희의 눈빛, 그 눈빛에는 정희가 겪는 고통이 찐득하게 가라앉아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제는 더 만나 보려야 볼 수도 없는 필기, 샛별이도.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가 걸어온, 잡히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길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다.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도 국가의 부름 앞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의 기억 곳곳에는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폭력이 가득하다. 사람이 사람을, 이름이 사람을, 이념이 민족을.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고 말할 사람. 굴곡진 인생의 회환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한반도 현대사의 산증인이라는 수사에 모자람이 없는 생생한 기억에 빠져들다 보면 자연히 인간적인 연민에 더불어 어떤 의문이 떠오른다.
p.186 당시 인민군들은 미군에 대해서는 그 증오심이 극심해서 양키라면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국군과 맞설 때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적이 나를 죽이는 전장에서도 증오심보다는 미묘한 민족 감정이 앞서 있었다.
p.342 영문과 한글로 적힌 군사 분계선이었다. 팻말을 보자마자 갑자기 가슴 속이 흠칫했다. 분명히 여기도 나의 조국인데 하는 생각 속에, 남의 땅이라는 낯선 감정이 급습하면서 단박에 긴장되었다. 불안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옷깃에다 턱을 반쯤 묻고 계속 전진, 전진했다.
숭고에 가까운 의지와는 달리 부패는 만연하고 폭력은 언제나 정의보다 가깝다. 충성에 보답을 받았는가. 신념으로 살아온 일생의 말로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정할 수 없이 순진한 면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신이 평생을 바친 조국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한국 사회는 보수의 자리를 꿰차앉는 극우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공산당, 빨갱이, 무력진압을 만능 주문처럼 외워댔다. 콕 집어 누구만의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이 휩쓸리는 이들과 마치 그 말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들의 권좌를 공고히 다지는 이들의 사회.
p.451 나는 4기 제15차 전원회의의 결정과 김정일이 등장하는 일련의 조짐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사실 은근히 불만스러웠다. 나 말고도 다른 이들 또한 불만인 듯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p.662 창백할 만큼 핼쓱한 얼굴로 그는 되레 나를 위로했다. 그는 북한에 가족이 살고 있기에, 언젠간 돌아가리라 믿고, 전향을 거부했다고 한다. (...) 그의 발음이 꼬부라졌다. 내가 그의 손을 맞잡았을 때 얼음장처럼 싸늘한 손 마디가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를 잡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오랜 고통으로 인해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통일은 물론, 어떤 수준에서의 상생도, 공존도 불가하다. 파편화되고 끝없이 아귀다툼하는 개인들의 지리멸렬한 사회. 그것을 바라는 자가 과연 누구일지, 우리는 그 근원적인 물음의 기회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 김진계 옹의 삶을 좇는 길에서 묻는다. 누구의 소원일지 모를 통일, 멸공의 횃불 아래 스러진 이들을. 이 땅이 누구의 조국이었느냐고, 우리의 조국은 과연 무엇이겠느냐고. 끝없는 갈등의 추동 속에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향하고 있나. 민주 사회로의 길은 어디로 어떻게 얼크러지고 있으냐고.
p.112 1950년 필기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고, 나는 전쟁에 휘말려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이런 처지이면서도 나는 이 전쟁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 나에게 북침설과 남침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민족이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p.733 아직도 공공연히 남북한은 힘의 우위 확보와 힘의 역사 지배를 강조한다. 과연 힘에 따라 남북한이 지배될까? (...) 힘의 무력함과 민중의 위대함을 먼저 아는 쪽이 결국은 남북한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다. 김진계와 같은 분들의 긴 고난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위대함은 '힘'이 아닌 '민중' 때문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도서제공: 소명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