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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상상해보라. 신새벽의 상쾌한 여명도, 한낮의 정직하게 내리비추는 광채도 아닌, 해가 넘어가는 때의 잔열같은 빛을. 게으르고, 부도덕하고, 형태를 흐리게 하는 색채를. 찰칵. 다른 장면. 쿰쿰한 살냄새, 땀 배인 샅의 냄새가 짙게 깔린 방 안, 문틈새로 스며들어오는 가느다란 조명의 색. 눅눅하고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공간에 고인, 살아있는 자의 열기.
찰칵. 차르륵.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나지막하지만 선명하게 파고드는 목소리.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검열된 몸, 퇴락과 쇠약 사이 어딘가를 부유하는 몸짓을 들려줄테니. 말해봐라. 그때의 너는 무엇이었지? 후안, 나는요, 익명의 남자가 입을 연다. 찰칵. 또다른 장면.
p.36 「그리고 이제 당신은 제게 보여 주고, 말해 주며 틈을 메워 주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 틈이 다 메워지기에 너무 많다면? 그럼 어쩌지?」 (...) 「내일은 내가 이야기할 차례가 올 거야.」 「그 말만 자꾸 하시잖아요.」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먼지 쌓인 죽음의 길로.」
p.76 후안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오직 빛 속에서만, 오직 몸속에서만 그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예리하며 생기로 충만하게 방 안을 채웠다. 매일, 해뜨기 전, 동들녘 찰나의 여명 속에서, 사막이 푸르고 한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물들면, 나는 커튼을 열었고 후안은 매트리스 위에 포개진 채 잠들어 죽음을 바라보았다.
한 권의 책, 필연적으로 순서를 갖는 언어. 그러나 두서없이 얼크러지고 때로는 말하는 사람조차도 말이 되게 말할 수 없는 그런 기억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비규범, 혹은 탈규범의 존재들. 이탈되고 모순하는 이들. 비정상이야. 태생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탈선해 도착에 도착하는 사람들. 이해의 폭력.
이것은 이야기이다. 기억인 동시에. 이 책은 소설인가? 손끝으로, 무딘 혀끝으로 더듬어 올라가는 기억의 시원. 청년과 노인. 구부러지고 부딪히고 배회하던 몸들의 역사. 검은 책에 담긴 증언들. 검게 지워진, 혹은 덮어씌워진. 어둠은 침묵을 닮았지.
p.116 「하지만 나는 우리가 가진 이 책, 내가 찾아낸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지워진 이 책이 더 좋아. 깨달음의 짧은 시들로 가득한 이 책 말이야. (...) 순서대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 페이지나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과거로부터 솟아오른 어떤 삶의 스케치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가 등장한 인물이 극복했거나 극복하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단 하나의 증언인 것을.」
p.223 「맞아요. 후안. 하지만 그 시절엔 누가 날 사랑하게 만드는 법은 그것밖에 몰랐어요. 몸부림치는 것.」 「몸부림? 멋진 말이구나… 털어 내는 게 지닌 쓸모와 망가뜨리는 게 가진 낭비와 폭력의 중간 어디쯤. 그게 바로 요령이지? 내가 그걸 좀 일찍 알았더라면…」 「침대 위에서도, 밖에서도, 늘, 몸부림쳤죠.」
쓴 사람의 글을 책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그 모양과 질감에 어떤 해석을 담았다면, 읽는 사람이 그 물성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하고 또 어쩌면 응답하는 일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가름끈의 색이라든지, 금이 그인, 지워진, 가려지고-실패된 이름들, 글자들이라든지… 번쩍, 하고 잠시 스쳤다 사라져버리는 빛을 닮은.
까슬한 표지를, 있는 힘껏 긁어내려서, 상처 내고 싶었다. 긁어내리고 찢어벗기고 싶었다. 그 아래에 무언가 있다고, 분명 이 아래에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그 다음은, 찰칵. 다음 장면. 잊어버렸어요. 침묵.
p.302 〈제5장: 백인 여성들이 말하는, 흑인 포주 밑에서 일하는 이유〉에서, 폴린, 에이다, 팬지는 자신들의 포주가 예전에 만난 백인 포주보다 더 잘해 준다고 말했어. 아니면 그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난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전 알거든요.」
p.329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 줘요, 후안.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떠나라 간청하지 마시옵소서? 모든 결말은 지저분한 결말이란다, 네네. 앞날에 놓인 모든 것은 위대한 망각이다. 이제 언제라도 암전이 찾아올 거다. 그리고 몸은… 네네, 모든 끝은 지저분하지.」 「떠나라 간청하지 마시옵소서.」
이것은 젊은 날의 혈기도, 눈부신 청춘도 아니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살갗으로의 회복을 도모하지 않는다. 대의를 품고 한 발 한 발 어떠한, 품위랄지, 긍지라고 할만한 영광으로 향하지도 않는다. 대신 죽음, 쇠약해져가는 것, 폭력과 울부짖음의 단편을 내보인다. 상처내고 비틀어지기를 선택하는 것. 여전히 철철 벌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
그게 당신이 할 말의 전부냐고 묻는다면, 어쩌면요. 모르겠어요. 들어봐요, 나는, 이 다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일렁이는 울대. 다음 장면. 완전한 어둠. 커튼을 치고 문을 닫는다. 멀어지는 등, 화면을 덮어 가리는 손. 찰칵. 암전. 침묵. 적막. 고요.
p.207 그리고 나는 소리 없는 검보랏빛 하늘을 보며 느꼈다. 아니. 감지했다. 언젠가 날이 밝아 올 것이라고 믿기조차 어려운 그때, 우리는 밤의 반대편 가장 깊은 바닥에 있었노라고.
p.366 「네가 이 이야기 좋아할 줄 알았다! 상상해 보렴! 오로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까다롭게 굴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전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요. 영원히.」 「그런 생각은 버려, 네네. 그저 흘려보내.」
*도서제공: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