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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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뭔가 배워야 한다든지, 고난을 보상할 누군가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개인의 탓으로 떠넘겨지는가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성공담으로는 읽을 수 없다. 다 잘 되었으니 그걸로 그만이라든지, 이렇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지 못하는 이는 게으르고 ‘구제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좀처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책의 저자 임승남은 출판사 대표 출신이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출판사라니, 그것도 이제는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곳의 대표였다니 먹물 깨나 먹은 이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에게는 사뭇 다른 과거가 있다. 전과 7범, 그것도 강도, 절도, 폭행을 주로 하는. 번듯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탄식을 자아내고 마음을 울리는 명절 특선 영화처럼 대의가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숭고한 이상이라도 있었느냐 하면 글쎄, 아마 생의 절반 이상을 그렇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데도 어째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사는 일이 다 그렇듯 얼레벌레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닌가 묻는다면, 그가 처했던 현실이,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내던졌던 유년기의 세계가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고아 출신, 무학에 가까운 학력, 툭하면 사람 패고 강도질해서 교도소나 들락거리는 사회부적응자, 실패한 인간, 거렁뱅이... 그가 숱하게 받았을 멸시에는 사회의 책임이 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버려두었던 시간들이 있다.

혼란통에 누구는 안 힘들었나, 하지만 재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굶어죽는 사람을 스쳐지나간 부유한 인간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회가 묵인하는 동안 수없이 태어나 밀려나고 죽어온 사람들에 대해 사회의 책임이 없었던 때는 단연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p.26 쫓아내고 쫓아내도 배고픈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 아무데나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때리든 말든,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잡아가서 관밥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가 살아낸 시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교과서 속에서나, 어쩌면 이전 세대의 회고로나 들어왔을 재앙같은 시기였다. 수틀리면 끌려가 고문당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하루 굶으면 다행, 죽지나 않으면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숱했다. 그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가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살아왔다면, 또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었을 때 마땅히 손을 뻗지 않았다면 아마 익명의 무언가(사람도 아닌)로 남았거나 그마저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뜻이야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성공보다 도움을 읽어내기를 바란다.

저자가 낱낱이 고백하는 이전의 삶,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들에서 나는 지금을 본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내가 모른다고, 아니, 알고 싶지 않다고 외면하는 세상에 수많은 임승남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p.140 한 할머니가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소년의 손에, 그것도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몽둥이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 소년과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시인의 글에는 "아무도 온정을 베풀지 않는다면"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나는 비로소 펜이 총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정말,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떠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작은 고난들에도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또 막막했다. 하물며 사회에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은, 나라가 나서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몰아내려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저 절망만은 아니다. 두 발로, 온 몸으로, 수치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기어나오는 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저자에게서 나는,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았다. 가벼운 말로나 회자되는 것이 아닌,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터득한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함을 보았다.

p.144 인간쓰레기들은 나처럼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이들뿐인 줄 알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이 사회의 담장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담장 자체가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다.


한 해의 끝, 없는 사람 살기에 이만큼 고달픈 것도 없다는 겨울의 한가운데를 향해 가는 이 시점에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고 또 물으며 읽었다.

그 자신의 역사로, 살다보면 희망이, 그것도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희망이 있다고 몇 번이고 증명해내므로, 나또한 어두운 시대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믿어보련다.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모두의 희망,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 해봐야 한다.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믿어봐야 한다. 우리, 수많은 평범한 이름들에게 달리 선택할 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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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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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썩 옳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아, 정말 짜증나게 오만한 인간이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한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는 영원히 닿지도 알 수도 없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것은 사람의 물성, 아니, 마음의 본질적 속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뒤집어 까본대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마법같은 일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도 마음만은, 최후의 내실은 그 주인이 문을 열어 환대하지 않는 한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뿐인가, 상대를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로, 그 자체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성을 오롯이 끌어안는다고 여겨지는 사랑(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조차도 결국 나만의 것이 아닌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고 껴안아 심장을 맞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포함한다. 말해지는 마음조차도 온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가질 수 없음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혹은 그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의 소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완전히. 그것이 고통의 시발점인 동시에 사랑의 환상이다.

그러나 사랑은 환상 없이 불붙지 않는다. 이 모순들이 비끼고 부딪히며 고통의 화음을 이룬다. 시간이 흐르고 사그라들 때에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때에도 그것은 사랑인가?

아마도. 그래야만 한다면. 적당한 눈가림이 꼭 기만은 아니듯이, 알지도 못하는 새 서로가 서로를 비껴도는 별들이 꼭 이별은 아니듯이,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짜증을 내며 읽게 되었는가, 혹은 가슴을 두드려가면서도 잊지 못해 도로 집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것 좀 한 마디 해주면 안 되나? 어렵지도 않은 거, 한 번쯤 기다려주고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나? 안다. 이것이 상대의 명징하고 매끄러운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억지라는 것을. 안다. 성숙하지 못한 마음임을.

그러나 사랑은 퇴행이다. 서로에게서 어떤 안식을 찾는 것은 본능적인 퇴행이고 짐승과도 같은 욕구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또한 짐승이기 때문에.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누구도 악하지 않으나 동시에 그 누구도 성숙하지도, 자기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서로가 자기의 영역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애썼기 때문에. 그래서 끔찍하게도 오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아닌가. 합리적이나 합당하지는 않은 동물. 전자는 내면을, 후자는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논리다. 사랑은 관계의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수차례 말한 모순과 고통이 창출된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 물음에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살던 대로 살면 그렇게는 못 한다는 마음이 조금쯤 묻어있는 말이다. 할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 마주하고 끌어안아도 영영 가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삶에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주인공도, 주인공의 기록도, 그의 사랑과 고통과 좌절과 환희와... 그것을 읽는 이들의 마음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배척당한 채로 공존한다. 지고의 합일을 꿈꾸며. 이 슬픈 존재들.

마음껏 아파하고 연민하되 동정하지 말기를. 이름을 밝히지 않을 그 사람을 읽어나가기를. 그림자를 덧그리기를. 이미 떠나간 자리에서 흔적을 더듬어나가기를.

그렇게 오만한 독자가 슬픔에 홀로 남겨지기를 바라며, 먼저 걸어간 망므을 남긴다. 이만, 슬퍼하는 사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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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조르주 페렉 지음, 김용석 옮김 / 신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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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간은 새벽 3시 10분, 오밤중에에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오늘도 질 좋은 수면은 커녕 잠시간의 절전모드에도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한참을 뒤척이고 좋다는 건 다 해봐도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날엔 차라리 일어나버리는 것도 방법이지요. 깨어있는다고 퍽이나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창밖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군요. 이곳의 날씨는 자주 궃습니다. 툭하면 흐리고 땅이 젖기 마련이지요.

다시금,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5분. 새들도 아가양도 다 자는 이 시간에 아직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 밤은 하얗게 지새우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날엔 언젠가의 기억을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곤 합니다. 별 것 아니던 풍경들, 경탄이나 유별난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느리고 지루한 기억들. 오가는 사람,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 소리,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되는 엔진 소리...

비단 잠 못 드는 날뿐만 아니라 가물거리며 환상의 경계를 넘는 때에도, 문득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범람하는 시간에도 때때로 찾아오는 이 경험은, 지각 세계를 일시에 흔들어놓는 압도 혹은 붕괴와는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배경과 나의 분리, 투명한 공기방울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나와 그 밖의 모든 세계라는 유리화의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모든 것을 포착하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금 여기 이 행위에 영원히 새겨보려는 시도는, 그래요. 시선의 경쟁, 나와 타자의 영원한 줄다리기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기, 한 자리에 정물처럼 놓여 모든 것을 전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 제목처럼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는 어쩐지 슬픈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 또한 그러했는지는 알 방도가 없지만요.

어쩌면 나는 은연중에,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고 분주합니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도,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일상의 편린을 반복해 드러내보이더라도.

세상은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흘러넘치거나 채 인상이 되지 못한 잔상만을 남기고 지각 너머의 세계로 흩어져버리고는 하지요. 묻고 싶어집니다.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지각에 포 착되는 모든 것을 채집하는 것과도 같은 이 시도에는 의미가 있을까요? 찰나에 휘발되는 감각과 인상들을 그대로 모아두려는 시도는 무엇을 닮은 걸까요?


마지막으로, 지금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안 되었고요, 머지않아 해가 뜨고 하루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글도 금방 잊히고 한구석에 밀려나 존재조차 희미한 기억이 될 테고요.

언젠가, 잠들지 못하는 어느 날에 다시금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시금 이 글을 불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날도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붙잡아 내리누르고 여기에 있으라, 애를 쓸 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나 언젠가, 어느 곳에서 이 글을, 이 책을 떠올린다면 저자를 따라 어느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착지를 모른 채 힘껏 내달린 후의 나른한 탈력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모쪼록 해가 저물어가는, 도시 한 켠의 느긋한 오후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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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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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에 앞서 유구한 역사의 고백.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기시 유스케의 작품은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찝찝해하고 있어요...

싫었느냐 묻는다면, 아니요. 좋으니까 몇 번이고 찾아 읽었겠지요? 그렇다면 좋았는가? 네. 그치만 좋다고 하고 싶지 않아! 불쾌해! 음습하고 집요해! 좋은데... 좋기는 한데!!!

이번에도 기대가 컸지요. 고전 기담집에서 영감을 얻었다니, 800만 신의 나라에서 이어져 내려온 심연은 얼마나 거대하고 환상적일까요! 아 예...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읽기 전에 소개 좀 자세히 볼 걸 그랬다고, 기담이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지 말 걸 그랬다고 울어봤자 소용 없었습니다. 이 작가는 출구를 주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세요. 영원히.


엄밀히 따지자면 공포와 불안은 다르고, 불쾌감을 주는 요소는 아주 다양하지요. 전작들에서 주로 인간, 그것도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인물이 마음 깊이 지닌 심연,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도, 하고싶지도 않은 욕망을 지나치게 생생하게 그려내왔다면, 이번 작품의 규모는 세계입니다.

어떤 신화 생물-개체나 단일한 힘 그 자체가 아닌 말 그대로 이면의 세계, 일렁이는 웅덩이 아래 얼핏 스쳐지나간 위화감으로만 간신히 눈치챌 수 있는 무언가. 알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것, 파멸 또는 굴복을 목전에 두고서야 겨우 알아차리는 것.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은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인간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공포는 얼마든지 늘어나죠. 사회가 존재하는 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작중 네 편의 이야기는 각각 절박함에서 출발합니다. 기이한 숙명을 짊어지고 평생을 결핍에 시달릴 사람, 실종된 작가가 남긴 초자연적 붕괴의 기록, 기적을 불러오는 저주, 마지막 순간에 구원처럼 내밀어지는 경멸.


어리둥절한 등장인물들과 독자가 겨우 사태를 파악할 쯤엔 짠, 암전되듯 이야기는 끝나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출구 없는 무대, 끝없는 공포와 불안 위에 놓이게 되지요. 그곳이 현실입니다. 돌아보는 순간, 아니, 어쩌면눈 깜짝할 사이에 낯설어지는 공간이죠.

작가는 후기에서 처참한 운명에 농락당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둘째,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거나 운명에 저항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운다. 셋째,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중 가장 두려운 것은 아마도 세 번째겠지요. 2로 시작해 1을 거치지도 못하고 곧장 3으로 향했다면 더더욱. 작가가 마주한 세계는 근원적으로 그런 곳입니다.

p.89 아아, 틀렸다. 이곳은 정답이 아니다. 이것은 봐서는 안 된다. 이곳에만큼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되었다.

p.233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면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이 앞에서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겟지만,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연신 써내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냐, 무슨 악의로 독자를 이런 고난에 몰아넣느냐 묻는다면, 어쩌면 그 나름의 발버둥이라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절망을 바랄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힘, 세계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규모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한 혼신의 싸움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나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을 때, 헛수고라는 걸 알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기를 바란다고.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기에.

아니 그럼 졸지에 무서워진 독자는요? 글쎄요, 뭐든 혼자보단 여럿이 낫지 않겠어요? 하는 김에 같이 좀 극복해보면 좋지 않겠어요?

p.310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사람, 몸을 움직일 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는 사라람, 괴물의 손에 목이 잡혀서 숨도 쉴 수 없는 사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사람,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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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열 편의 인권영화로 만나는 우리 안의 얼굴들
이다혜.이주현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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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흔히들 사는 일도 바빠 죽겠는데 쓸 데 없는 얘기까지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이상은 이상으로 두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만큼 여력이 없다는 뜻이리라. 속된 말로 “먹고 죽을 것도 없는데”의 논리이다. 많은 경우에 “나도 힘든데 남의 일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위와 같은 말이, 혹은 눈치가 오갈 때 가장 쉽게 밀려나는 것은, 그 ‘쓸 데 없는 얘기’와 ‘남의 일’이 너무도 도처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도 현실이고, 너무도 가까이에서 매일같이, 어쩌면 평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외면하는 것,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어쩌면 바로 그 생각부터가 오류일지 모른다는 것은 쉽사리 이야기되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은 얼굴들을 면전에 들이미는데 유쾌할리가 없다.

문제는 바로 그 외면의 이유이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나의 책임을 벗을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롭다.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당장의 두려움을 외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밖으로 떠밀리고 있는 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침묵의 죄마저 외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책은 2013~2023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인권영화의 주제와 내용을 톺아보며 지금 현재, 어딘가, 어쩌면 바로 곁의 문제를 말한다. 불법촬영, 학생 인권, 공연예술노동자(아이돌), 노인 소외, 입시 경쟁, 존엄사, 고독사, 빈곤, 양심적 병역거부, 장애인 인권, 디지털 감시사회 등.

어찌 보면 중구난방일 이야기들, 열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인권, 즉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우리는 책임이 없습니까? 사람이 사람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회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까?

p.66 “통제되지 않는 일 앞에서는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다고 하는 게 가장 빠르다. 미안하지 않으면 논란이 생긴다. 논란이 생기면 이미 시험대 위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지는 게임이다.”

p.76 “누구나, 아이돌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과도하게 자기를 몰아붙이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갖는 피로감을 공유한다고 생각해요.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 손을 적절한 때 내밀었나? 하는 죄책감을 다 같이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이 도통 해결된 적도, 될 수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의 근원을 가치의 인정싸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위협받지 않고 살 권리,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권리,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고 존엄하게 생을 마칠 권리를 갖고 있다, 고 믿는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부정된다. 타자에 의해, 자본에 의해, 많은 경우에는 타자가 점유하는 거대자본에 의해. 대다수가 사람의 사람다움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꼭 그 믿음의 크기만큼 가벼운 것이 사람다움이 아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무쓸모와 무의미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 존재를 형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쓰인다. 우리 현실의 다른 의미는 절망과 폭력이다.

p.156 영화에 나오는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라는 질문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울 사람을 향한 애원처럼 들리기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손을 내밀지 않은 사회를 향한 고발처럼 들리기도 한다. 개인도 사회도 이 문제에서 구경꾼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 자신에게 여전히 가치가 있음에, 밀려날 수 없는 자리가 있음에 자격이 요구된다. 내가 나임에 인정이 필요한 세상에서 안락은, 무관심은 지금-나-아님을 외면해야만 가능하다. 나로, 너로, 우리로 돌아올 것들을 최선을 다해 외면해야만.

인권이 무엇인가. 말 그대로 사람의 권리, 사람에게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박탈될 수 없는 권리가 아닌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어쩌면 존재의 전후까지에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자리가 아닌가?

존재가 맞닥뜨리는 모든 사회적 문제가 사람답게 살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것이 곧 인권 문제가 아닌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일이 존엄의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p.87 사회적으로 일정 연령이 되면 현업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후 경제력을 잃고 사회적 영향력마저 상실하게 되면 스스로의 능려고가 사회가 판단하는 능력 사이의 괴리의 경험하게 된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나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불화한다.

p.115 관람석에 앉은 사람에게는 그저 순위로 기억될 뿐인 선수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계속 달릴 자격은 성적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열 편의 영화를 통해 두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까? 그려내진 참상을 관람하는 당신은 어디에 위치합니까? 당신은 그들의 우리가 될 수 있습니까? 너무도 잘 아는 이 비극은 영원히 반복되고 재현될 것입니까? 우리 곁에, 영원히, 낮은 곳에 임하시어.

나는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낮은 곳에 임하시어 우리를 밀어 내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해야 할 일을 찾겠다고. 이것은 모든 나의 일이지 않느냐고.

조세희 선생의 말을 빌어 쓴다.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간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말아 달라.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다 연대의 힘, 우리 사랑의 힘, 평등의 힘, 자유의 힘. 이것을 우리가 소유하도록 합시다.

p.28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 나오는 일이다.”


우리, 영화에서 만난 우리 안의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에게는 총을 부르는 총이 아닌, 꽃을 부르는 꽃을 지켜낼 책임이 있다.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외면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열 편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이 지독한 세상에서 여전히 희망을 찾아낼 의무가, 꿈이 아니게 할 책무가 있다고.

p.41 “혁명을 하기에 좋은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지금 당장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일종의 사랑의 혁명성에 대해 생각했다.” 중요한 건 과거와 미래의 사랑이 아니라 현재의 사랑이다. 사랑은 유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p.177 총을 들지 않겠다는 것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평화를 원한다는 것이다. 결국 병역 거부는 평화로 나아가는 말이 되어야 한다.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을 꽃을 부른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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