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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이야기 ㅣ 비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평점 :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에 앞서 유구한 역사의 고백.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기시 유스케의 작품은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찝찝해하고 있어요...
싫었느냐 묻는다면, 아니요. 좋으니까 몇 번이고 찾아 읽었겠지요? 그렇다면 좋았는가? 네. 그치만 좋다고 하고 싶지 않아! 불쾌해! 음습하고 집요해! 좋은데... 좋기는 한데!!!
이번에도 기대가 컸지요. 고전 기담집에서 영감을 얻었다니, 800만 신의 나라에서 이어져 내려온 심연은 얼마나 거대하고 환상적일까요! 아 예...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읽기 전에 소개 좀 자세히 볼 걸 그랬다고, 기담이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지 말 걸 그랬다고 울어봤자 소용 없었습니다. 이 작가는 출구를 주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세요. 영원히.
엄밀히 따지자면 공포와 불안은 다르고, 불쾌감을 주는 요소는 아주 다양하지요. 전작들에서 주로 인간, 그것도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인물이 마음 깊이 지닌 심연,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도, 하고싶지도 않은 욕망을 지나치게 생생하게 그려내왔다면, 이번 작품의 규모는 세계입니다.
어떤 신화 생물-개체나 단일한 힘 그 자체가 아닌 말 그대로 이면의 세계, 일렁이는 웅덩이 아래 얼핏 스쳐지나간 위화감으로만 간신히 눈치챌 수 있는 무언가. 알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것, 파멸 또는 굴복을 목전에 두고서야 겨우 알아차리는 것.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은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인간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공포는 얼마든지 늘어나죠. 사회가 존재하는 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작중 네 편의 이야기는 각각 절박함에서 출발합니다. 기이한 숙명을 짊어지고 평생을 결핍에 시달릴 사람, 실종된 작가가 남긴 초자연적 붕괴의 기록, 기적을 불러오는 저주, 마지막 순간에 구원처럼 내밀어지는 경멸.
어리둥절한 등장인물들과 독자가 겨우 사태를 파악할 쯤엔 짠, 암전되듯 이야기는 끝나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출구 없는 무대, 끝없는 공포와 불안 위에 놓이게 되지요. 그곳이 현실입니다. 돌아보는 순간, 아니, 어쩌면눈 깜짝할 사이에 낯설어지는 공간이죠.
작가는 후기에서 처참한 운명에 농락당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둘째,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거나 운명에 저항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운다. 셋째,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중 가장 두려운 것은 아마도 세 번째겠지요. 2로 시작해 1을 거치지도 못하고 곧장 3으로 향했다면 더더욱. 작가가 마주한 세계는 근원적으로 그런 곳입니다.
p.89 아아, 틀렸다. 이곳은 정답이 아니다. 이것은 봐서는 안 된다. 이곳에만큼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되었다.
p.233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면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이 앞에서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모르겟지만,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연신 써내는 당신은 대체 무엇이냐, 무슨 악의로 독자를 이런 고난에 몰아넣느냐 묻는다면, 어쩌면 그 나름의 발버둥이라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절망을 바랄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힘, 세계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규모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한 혼신의 싸움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나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을 때, 헛수고라는 걸 알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기를 바란다고.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기에.
아니 그럼 졸지에 무서워진 독자는요? 글쎄요, 뭐든 혼자보단 여럿이 낫지 않겠어요? 하는 김에 같이 좀 극복해보면 좋지 않겠어요?
p.310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사람, 몸을 움직일 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는 사라람, 괴물의 손에 목이 잡혀서 숨도 쉴 수 없는 사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사람,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