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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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으레 단편집이라 하면 여러 작가가 모였든 한 작가의 작품들이든 도서명과 같은 작품, 대표격인 표제작이 있기 마련인데 목차를 아무리 살펴봐도 누가 대표하는지 알 수가 없어 영 알쏭달쏭한 마음을 안고 읽었지요.

그런데 웬걸. 모든 작품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제목을 겨냥하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동시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저 상상이려니,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지부터요.

게다가 "모험"이라 함은 무릇 일말의 유쾌함이나 호방함을 품기 마련 아닙니까? "어쨌든간에 행복해졌다" 내지는 원하던 것을 얻어내야 모험이지. 냅다 떠밀린 세계에서 단결투쟁! 피땀으로 이룩한 해방!을 외치면 모험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투쟁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것만 모험일까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이를테면 일자리 같은 것들, 자기 자신의 안위마저 내걸고 나서는 길이 모험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절박함은 공명심이나 영움심리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의 아니겠습니까?


제목은 『어느 노동자의 모험』 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대다수의 인류가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정말이지 "보통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상상은 현실에 기반하고, 판타지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내용을 담는다고 내내 말해왔듯이, 이 책의 수록작들 또한 현실 그 자체를 고통스러울 만큼 선명하게 내보입니다. 다섯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름답지도, 고귀한 혈통이나 대단한 용기를 타고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멸시받는, 하나도 아니고 수백 명씩 죽어나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노동자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러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차마 그렇게 밀어낼 수는 없어서, 차마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가 없어서, 차마 돌아서고 포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어서, 삶에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서. 살고 싶어서.

p.59 "최태수 씨! 그냥 밀려드는 물살을 거슬러 가! 그곳에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나올 거야. 걱정하지마. 여기도, 거기도. 당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 돕고 살면 돼!" 후회하지 말고, 살기 위한 투쟁을 위해 가!


2023년도 2분기 산업재해 누적 사망자 수는, 조사 후 인정된 것만 해도 289명입니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사람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조사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이들의 수를 합하면...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수많은 이름을 모릅니다. 가려졌기 때문에, "불법"으로, 사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어느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하는(response) 능력(ability)이라고. 타자의 호소를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바로 책임이라고.

부디 소리 없이 부르는 이름, 불리지 못하는 이름을 기억하기를, 온 마음으로 응답하기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당연하기를, 응답이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지는 희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일까요.

p.100 나는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그는 소리 내어 나를 불렀다.

p.196 소장은 말끝마다 따박따박 '불법'을 갖다붙였다. '불법 시위자', '불법 시위자 가족', 압류품에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듯 사람을 범죄자로 이름 붙이는 솜씨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알고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을 결국 하지 못하는 사람, 나보다 더한 놈도 떵떵거리고 사는데 나는 왜 못 하냐고 울고불고 해도 결국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 부끄러운 줄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은 그 '보통의'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세상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당연한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 책은 보통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영웅과 투사의 모험입니다. 그 이름들이,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이들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그런 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흘러간 기억으로 불릴 만큼 우리의 부당한 현실이 당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150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랑 행복하더라도 정말 괜찮아. 진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제 더는 행복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아름다움 아래에 우리가 있는 걸 이미 네가 아는데, 정말로 행복할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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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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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매일 아침 생각한다. 어제보다 나을 수는 없어도 못하지는 말아야지. 반성할지언정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그러고 나면 으레 따라붙는 생각, '그게 마음처럼 되면 내가 이러고 사는가?', '아니 근데 그 인간이 먼저'.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사람은 사람 틈에 부대껴 살도록 생겨먹은 탓에 사는 일은 고통, 살아내는 일은 고생인 동물이다. 두 배로 괴롭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 곁에 철썩 들러붙은 "고통" 이 두 글자를 보는 것 또한 괴롭기 짝이 없다. 똑 떼어다 버리면 좋으련만, 사랑에, 삶에, 기쁨에 고통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게만 살아가면... 최고. 너무 좋지. 완전 대박 짱.

특히나 나처럼 자다가도 화가 차올라 벌떡 일어나는 사람은, 해묵은 기억 속 실패에 이불을 걷어차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고통의 ㄱ자만 봐도 속이 꼬이는 느낌에 사람 놓고 ㄱ자! 를 외치기 마련이다.


새삼스레, "시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대가도 스승도 신도 아닌, 그저 사람이라는 글자가 시 옆에 나란히 선 모양이 참 좋다. 소박하니 살아가면서도 사람됨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 같아 더욱 좋다. 시인, 하고 가만히 말해보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로부터도, 시인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숨이 밭아서, 눈 뜨고 지내는 시간이 벅차기만 해서, 버티기에도 급급한 삶이라서. 이래저래 여유를 찾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시는, 말은, 세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를 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등단만 50년을 넘긴 노장, 학창시절 그의 시를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가며 읽은 이로서 노시인이 된 그의 시상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크나큰 복이요 배움이었다.

동시에 과욕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어린 나이기 때문에, 살 날이 한참인 주제에 살 만큼 살아봤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노장은 말한다. 고통이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그런 내가 그의 글에 조금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적어두는 건 그저 치기인가. 그러나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것은, 고통이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잔인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삶은 비로소 버틸만한 것이 된다. 아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서 반짝이는 의미를 발견한다면, 또다른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금이 간 곳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숨 쉴 틈을 찾아낸다면, 그리하여 어떤 마디 같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삶은 더이상 고통덩어리가 아니게 된다.

p.166 스테인드글라스는 맑은 통유리로 만들지 않는다. 조각조각 난 색색의 유리를 붙여서 만든다. 그 조각조각 난 색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채의 문양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 산산조각 난 까닭 또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삶을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했으나, 나는 물길과도 같다고 말하고 싶다. 상선약수.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자연히 흐르고 변하게 하는 동시에 변하는 것, 멈추면 죽는 것, 고요하고 또 세찬 것, 움켜쥘 수도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만히 몸을 내맡겨야 하는 것.

위도 아래도 없는 물은 흐르지 않는다. 새로이 솟아나지 않으면 그대로 고여 썩거나 말라붙어버릴 것이고, 솟거나 비가 내려 더해지기는 하나 흘러갈 곳이 없으면 넘쳐버릴 것이다. 어느 쪽도 썩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맑은 물이 솟아나 굽이치는 길을 따라 거친 돌을 깎으며 흘러내려와, 종내에는 바다에 이르는 것, 모든 순간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다 언젠가는 형태를 잃고 숨으로 돌아가는 것. 그 양태는 삶과 다르지 않다. 나와 타인 모두.


알지 못하는 삶, 겪어본 적 없는 슬픔과 고통과 기다림과 낭만에 대해 고개를 저으며 읽었다. 그러고나니 빈 손만 남았다. 아무것도 없는 손을 힘껏 쥔 모양으로.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놓지도 껴안지도 않겠다는 고집만 남았다. 오만이었다.

알고나서야 놓을 수 있었다. 아직 무소유의 경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 덜어내는 것, 홀가분해지는 것, 담백해지는 것. 그러나 몇 번을 결심해도 쉽지 않다. 당장 움켜쥔 손을 풀어내기에도 벅차다.

수많은 시로, 글로. 나의 갑절은 더 산 저자도 사는 내내 깨지고 나서야 깨친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차 한 잔에 가라앉힌 마음을 보고 나서야 그저 현재에 머문다고 하니.

p.26 나는 요즘 차를 들면서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지금 현재를 생각하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때가 많다. 그럴 때 굳이 과거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 차는 내 마음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듯 내 과거를 현재의 세계와 중화시킨다.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면 결국 바닷물이 되어버리듯 차를 드는 동안 나는 과거에 있는 듯하지만 늘 현재에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수밖에, 모르고 어렵다면 흉내라도 내는 수밖에. 풋내기에게는 풋내기의 길이 있다 이거야. 아무도 해주지 않을 말이니 혼자서라도 하는 수밖에.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마음, 툭하면 콩밭 나들이에 바쁜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그라들기엔 너무 어린가보다. 하는 수밖에.

'어리다'는 말에는 본시 '어리석다'는 뜻이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아직도 어리다. 앞으로도 한참을 더 어릴 참이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지혜롭다니 설익은 어른인 나는 어린이보다도 어린 셈이다. 이마저도 그러려니 해야한다.

여전히 배울 것이 태산이다. 일단은 듣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돌아보는 지금, 어깃장부터 놓을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월을 몸으로 쌓아올린 이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자, 갈 길이 멀다. 차 한 잔으로는 택도 없으니.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가라앉는 마음이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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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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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삶, 나무처럼 살리라,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정작 "나무 같은 것"이 무어냐 묻는다면 딱 부러지게, 아니 나무 입장에서 좀 너무한 표현인가? 그렇다면, 꼭 집어 표현할 말이 없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무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내게 나무의 이미지는 폭심지의 거대한 고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Little Boy"가 시속 320km의 속도로 떨어졌을 때, 쌩쌩 달리던 자동차도, 이리저리 내달리던 사람도 짐승도 흔적 없이 사라진 그 땅에 시속 0km의 은행나무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던 세상, 숨가쁘게 생동하던 것들과 쇳덩이들이 순식간에 타오르고 녹아 없어진 곳에 고요히, 끝없이 침묵하는 오래된 나무만이 남아있는 그 기묘한 사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나이가 제법 들었다 싶은 나무를 보면 가만히 그 표면에 손을 대보게 된다.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온기. 그럴 리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손 아래로 박동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살아있는 것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를 죽어서도 품고 있는 것은 나무가 유일하지 않을까.

누군가 부러 옮겨 심지 않는 한 처음 그 자리에서 뿌리내려 평생을 살아가는 나무는 얼핏 생각하기엔 한없이 느리고 고요하기만 한 존재다.

그러나 나무는 쉬는 법이 없다. 일 년 내내 자란다. 버거운 계절에는 다음을 준비하며 느리게 느리게 숨쉬며 기다린다. 죽지만 않으면, 살아만 있다면 자라고 또 자란다. 위로, 아래로, 안과 밖으로.


나무만큼 바쁘고 부지런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가로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은 가로수(라고 불리우는 도시 나무들)에게 유독 가혹한 편이다. 간판을 가린다고, 열매가 떨어진다고, 낙엽이 쌓인다고 철마다 아주 민둥산, 아니, 민둥나무를 만들어버린다.

매년 여름 내내 녹음을 드리우던 나무가 채 봄이 되기도 전에 앙상한 작대기가 되어버리는 꼴을 보노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게 딱 이런 짝인가 싶다. 물건에도 정이 들기 마련인데, 고마운 줄 모르고 숭덩숭덩 베어낸 자리를 보면 내가 다 속이 상한다.

그 흉참한 자리에도 두어 주나 지나면, 무심코 올려다본 자리에 새 가지가 돋아있다. 한겨울만 아니라면 그 변화가 제법 눈에 띌 정도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게 조그마한 돌기 꼴이던 것이 며칠 상관으로 어린 짐승 모양으로 살그머니 꼬다리를 내민다.

시속 0km의 나무를 해치는 시속 4km의 인간과 칼날들, 그렇게 해코지를 당하고도 살겠다고 내미는가. 언젠가는 몸통이 아기 손목만한 나무까지 무참하게 밀어놓은 꼴이 그저 짠해서 미안해, 속삭였던 기억도 있다.


저자가 멀쩡한 이공계 전공을 내던지고 느닷없이 사진 작가가 되기까지, 카메라와 전국을 누비던 시간 내내 함께했던 오래되고 어린 나무들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나가다보면 아, 이 사람도 적잖은 풍파를 겪었겠구나, 싶어진다.

내게는 그만한 세월은 없으나, 태어나고 죽어가는 이들을 살펴본 나무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언젠가는 폭풍우치는 밤엔 꼭 파도처럼 보이던 나무와 때 맞춰 새빨간 열매를 맺던 나무를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소중한 이에게, 그가 살아온 시간을 이런 말로 묻게 되리라. 당신에게는 친구같은 나무가 있나요. 당신이 오가는 길에도 눈에 익은 나무가 있을까요. 모퉁이를 돌면, 저 멀리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깊고 넓은 뿌리를 뻗어내는 나무가 있나요. 당신과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당신이 거쳐온 길을 알 수 있게.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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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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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참담하고 역겨워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래요.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사람을 그렇게 악랄하게 해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대체 얼마나 지독한 마음을 먹으면 그럴 수가 있어.

지금에 와서는, 남의 일이라면, 지어내는 말도 적당히 하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면박이나 들을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구석기나 고대 왕국 시절처러 퍽이나 오래 전도 아니고, 말 안 통하고 낯선 어딘가에서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곳, 사람이 수시로 오가는 곳, 불과 수십 년 전에.

사람이 사람을 끌고가 무릎을 꿇리고,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이고, 태워 죽였다. 산사람을 파묻은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적군이었는가. 흉악무도한 괴물이었는가.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동네서 오가던 이들, 평소처럼 살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손짓 하나로, 때로는 벼락같이 들이쳐 짐짝처럼 끌어갔다.


군인이었대도, 하다못해 최악의 흉악범이래도 이렇게는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군인의 이름으로, 경찰의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으로, 애국이요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애국이며 자유는 없다. 그렇게 이뤄지는 것은 살인, 도살, 그 이상의 값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떳떳하게 불려왔다.

때로는 부역자, 때로는 간첩. 때마다 사람마다 제각기 상상 속의 적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그마저의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그저 손발 달린 기구와도 같았을 것이다. 죽도록 부려먹다 마침내 죽어버리면 대강 묻어버리는 짐승만도 못한 것. 사람도 존재도 아닌 그저, 것.

그러나 그 자리에서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법은 없다고, 당신들은 대체 누구며 피도 눈물도 없느냐고, 내게도 삶이 있다고, 나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어떻게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대하느냐고 따져묻고 악을 지르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아무런 값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죄 하나 덜자고, 제 몸만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겁먹은 사람들을 산채로 바닷속에 가라앉혔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쇳덩이와 함께 가라앉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죽은 이들의 죄는 단 하나, 믿었다는 것. 안전하게 데려다줄 의무가 있는 사람의 책임을, 국민을 보호할 국가의 책임을, 내가 탄 배가 불시에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그 누구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도 당연한 상식을.

그마저도 잘못이 아니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핑계로 침묵을 강요당한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서 영원한 유죄를 선고받았다.

누군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단 한 명만이라도 목숨을 가진 존재를 이런 식으로 파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의 손끝에는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죽은 자 앞에서는. 어쨌거나 죽인 자는 어쩌면 살았고 죽은 자는 돌이킬 바 없이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산 자의 틈에 함께 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자의 죽음이 그러하다. 그들의 흔적은 무엇보다도 많은 말을 한다. 부서진 뼈로,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삭고 바스러진 옷가지와 닳아빠진 신발로, 손발을 옭아맨 아군의 흔적으로.

뼈를 부수고 살점에 박혔을 총탄 자국으로, 뜯어먹힌 살점으로, 잊혀진 기록 한켠의 "불령선인", "불순분자", 혹은 사망자 1. 이 책에서 재구성된 목소리들과 오래된 뼈, 죽은 이의 흔적에서 생의 시간을 찾아내는 이의 기록으로 우리는 믿음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숱하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의 이름으로 현재에 도사리고 있는, 고함과 사탕발림으로 뭉뚱그려지는 증오로, 비참으로. 언제고 누군가의 목숨은 값어치가 없다고, 어떤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날만을 기다리는 그것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금,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이는 산 자에게 속삭인다. 나를 보라고, 네가 밟고 선 땅과 네가 마시는 물과 공기에 피와 뼈가 있을 것이라고, 사라질 수 없다고. 죽은 자는 언젠가 살아있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라고.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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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 이문영 장편소설
이문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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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젠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시한 괴담이었을 수도,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할 일이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한동안 그 말이 입에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명이 시작되었을 때, 처음에는 잠결의 입면환각인 줄로만 알았고, 다음엔 단순한 외부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나도 모르는 새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린 결과인지, 아니면 이게 들어서는 안 될 소리인지 한동안 시덥잖은 생각을 했더란다. 증상이 사라진 후 자연스레 잊고 살았으나, 때때로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명, 귀울음이라는 뜻이다. 몸 밖의 소리가 없는데도 무언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들은 것과 다르게 느끼지 않으니 소음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쳐봐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그것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소리의 원인이 바깥이 아닌 안에 있는 탓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기가 곧 소리길인 탓이다.

p.146 서로의 고통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추락이었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길 멈춘 사람이 괴물이 됐다. 괴물은 내 안에 있고, 당신 안에, 우리 안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밖에도 있었다. 지독한 적막으로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짐승의 심장 박동을 들은 것도 같았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에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해서는 안 될 말이 전해지는 경우뿐만 아니라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아야 내가 무사할 수 있기에 그 존재를 알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소리 같은 것들. 슬프게도, 많다. 너무 많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과학보다는 사견에 가까웠겠지만, 사람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울음소리와 비명소리라고, 생존수단인 아기의 울음은 그 두 영역에 걸쳐있어 유난히 잘 들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p.20 날씨나 피로 때문이 아니라 묽거나 묽어질 것들의 몸에 새겨진 시끄러운 표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만히 묽어지면 억울하니까. 조용하면 보려 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으면 없는 줄 아니까.

p.120 질문하는 직업을 가진 자가 질문해야 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답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스스로 국가를 향해 질문하고 있었다. 눈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너는 왜 여기서 묻고 있냐’고 묻는 듯했다. 질문할 권리와, 질문할 책임과, 질문하는 폭력 사이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뿌린 질문들이 어디쯤 굴러다니고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선 의문을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겠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아니라 들려야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리지 못해서, 길을 찾지 못해 곪아터지는 말이 속으로 울리는 게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이명은 누구의 울음일까. 누가 누구에게 전하는 비명일까.

유난히 희미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어떤 사람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고 존재는 희미하며 그의 소리는 작디작다. 마치 한 사람 분을 차지할 주제도 못 된다고 누가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는 주로 셋방에, 재개발단지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에, 고분고분하기를 요구받는 곳에, 살려달라는 외침에 수갑과 욕설과 중장비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이 밀려드는 곳에 자리한다.

p.225 평형을 잃은 내가 게워 올린 바닥, 평형 잡는 물조차 채우지 않고 출항한 배가 침몰하며 노출한 바닥, 평형을 잃은 배가 가라앉자 평형이었던 적 없는 국가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바닥, 배는 인양됐지만 뜰채로도 건져지지 않는 찌꺼기들이 여전히 그 바닥에 수북했다.


출발한 것은 모두 어딘가에 도달한다. 울음도, 분노도, 책임도 마찬가지이다. 그 당연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니 갈 곳을 잃은 마음과 존재가 맴돌고 부딪다 결국 곪아버린다.

Listen carefully.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해야 할 일에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작아지고 묽어지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길을 잃고 갇혀버린다. 그러나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금, 일단 출발한 것은 어디엔가는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주워 담긴 이미 늦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요.

p.316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걸쳐 있었다. 차라리 소설이길 바라는 이야기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때가 많았고, 현실은 정말 현실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소설 같을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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