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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ㅣ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평점 :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매일 아침 생각한다. 어제보다 나을 수는 없어도 못하지는 말아야지. 반성할지언정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그러고 나면 으레 따라붙는 생각, '그게 마음처럼 되면 내가 이러고 사는가?', '아니 근데 그 인간이 먼저'.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사람은 사람 틈에 부대껴 살도록 생겨먹은 탓에 사는 일은 고통, 살아내는 일은 고생인 동물이다. 두 배로 괴롭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 곁에 철썩 들러붙은 "고통" 이 두 글자를 보는 것 또한 괴롭기 짝이 없다. 똑 떼어다 버리면 좋으련만, 사랑에, 삶에, 기쁨에 고통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쉽게만 살아가면... 최고. 너무 좋지. 완전 대박 짱.
특히나 나처럼 자다가도 화가 차올라 벌떡 일어나는 사람은, 해묵은 기억 속 실패에 이불을 걷어차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고통의 ㄱ자만 봐도 속이 꼬이는 느낌에 사람 놓고 ㄱ자! 를 외치기 마련이다.
새삼스레, "시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대가도 스승도 신도 아닌, 그저 사람이라는 글자가 시 옆에 나란히 선 모양이 참 좋다. 소박하니 살아가면서도 사람됨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 같아 더욱 좋다. 시인, 하고 가만히 말해보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로부터도, 시인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숨이 밭아서, 눈 뜨고 지내는 시간이 벅차기만 해서, 버티기에도 급급한 삶이라서. 이래저래 여유를 찾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시는, 말은, 세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를 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등단만 50년을 넘긴 노장, 학창시절 그의 시를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가며 읽은 이로서 노시인이 된 그의 시상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크나큰 복이요 배움이었다.
동시에 과욕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어린 나이기 때문에, 살 날이 한참인 주제에 살 만큼 살아봤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노장은 말한다. 고통이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그런 내가 그의 글에 조금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적어두는 건 그저 치기인가. 그러나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것은, 고통이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잔인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삶은 비로소 버틸만한 것이 된다. 아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서 반짝이는 의미를 발견한다면, 또다른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금이 간 곳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숨 쉴 틈을 찾아낸다면, 그리하여 어떤 마디 같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삶은 더이상 고통덩어리가 아니게 된다.
p.166 스테인드글라스는 맑은 통유리로 만들지 않는다. 조각조각 난 색색의 유리를 붙여서 만든다. 그 조각조각 난 색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채의 문양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 산산조각 난 까닭 또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삶을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했으나, 나는 물길과도 같다고 말하고 싶다. 상선약수.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자연히 흐르고 변하게 하는 동시에 변하는 것, 멈추면 죽는 것, 고요하고 또 세찬 것, 움켜쥘 수도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만히 몸을 내맡겨야 하는 것.
위도 아래도 없는 물은 흐르지 않는다. 새로이 솟아나지 않으면 그대로 고여 썩거나 말라붙어버릴 것이고, 솟거나 비가 내려 더해지기는 하나 흘러갈 곳이 없으면 넘쳐버릴 것이다. 어느 쪽도 썩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맑은 물이 솟아나 굽이치는 길을 따라 거친 돌을 깎으며 흘러내려와, 종내에는 바다에 이르는 것, 모든 순간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다 언젠가는 형태를 잃고 숨으로 돌아가는 것. 그 양태는 삶과 다르지 않다. 나와 타인 모두.
알지 못하는 삶, 겪어본 적 없는 슬픔과 고통과 기다림과 낭만에 대해 고개를 저으며 읽었다. 그러고나니 빈 손만 남았다. 아무것도 없는 손을 힘껏 쥔 모양으로.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놓지도 껴안지도 않겠다는 고집만 남았다. 오만이었다.
알고나서야 놓을 수 있었다. 아직 무소유의 경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 덜어내는 것, 홀가분해지는 것, 담백해지는 것. 그러나 몇 번을 결심해도 쉽지 않다. 당장 움켜쥔 손을 풀어내기에도 벅차다.
수많은 시로, 글로. 나의 갑절은 더 산 저자도 사는 내내 깨지고 나서야 깨친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차 한 잔에 가라앉힌 마음을 보고 나서야 그저 현재에 머문다고 하니.
p.26 나는 요즘 차를 들면서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지금 현재를 생각하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때가 많다. 그럴 때 굳이 과거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 차는 내 마음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듯 내 과거를 현재의 세계와 중화시킨다.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면 결국 바닷물이 되어버리듯 차를 드는 동안 나는 과거에 있는 듯하지만 늘 현재에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수밖에, 모르고 어렵다면 흉내라도 내는 수밖에. 풋내기에게는 풋내기의 길이 있다 이거야. 아무도 해주지 않을 말이니 혼자서라도 하는 수밖에.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마음, 툭하면 콩밭 나들이에 바쁜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그라들기엔 너무 어린가보다. 하는 수밖에.
'어리다'는 말에는 본시 '어리석다'는 뜻이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아직도 어리다. 앞으로도 한참을 더 어릴 참이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지혜롭다니 설익은 어른인 나는 어린이보다도 어린 셈이다. 이마저도 그러려니 해야한다.
여전히 배울 것이 태산이다. 일단은 듣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돌아보는 지금, 어깃장부터 놓을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월을 몸으로 쌓아올린 이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자, 갈 길이 멀다. 차 한 잔으로는 택도 없으니.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가라앉는 마음이 있으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