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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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으레 단편집이라 하면 여러 작가가 모였든 한 작가의 작품들이든 도서명과 같은 작품, 대표격인 표제작이 있기 마련인데 목차를 아무리 살펴봐도 누가 대표하는지 알 수가 없어 영 알쏭달쏭한 마음을 안고 읽었지요.

그런데 웬걸. 모든 작품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제목을 겨냥하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동시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저 상상이려니,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지부터요.

게다가 "모험"이라 함은 무릇 일말의 유쾌함이나 호방함을 품기 마련 아닙니까? "어쨌든간에 행복해졌다" 내지는 원하던 것을 얻어내야 모험이지. 냅다 떠밀린 세계에서 단결투쟁! 피땀으로 이룩한 해방!을 외치면 모험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투쟁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것만 모험일까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이를테면 일자리 같은 것들, 자기 자신의 안위마저 내걸고 나서는 길이 모험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절박함은 공명심이나 영움심리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의 아니겠습니까?


제목은 『어느 노동자의 모험』 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대다수의 인류가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정말이지 "보통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상상은 현실에 기반하고, 판타지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내용을 담는다고 내내 말해왔듯이, 이 책의 수록작들 또한 현실 그 자체를 고통스러울 만큼 선명하게 내보입니다. 다섯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름답지도, 고귀한 혈통이나 대단한 용기를 타고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멸시받는, 하나도 아니고 수백 명씩 죽어나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노동자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러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차마 그렇게 밀어낼 수는 없어서, 차마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가 없어서, 차마 돌아서고 포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어서, 삶에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서. 살고 싶어서.

p.59 "최태수 씨! 그냥 밀려드는 물살을 거슬러 가! 그곳에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나올 거야. 걱정하지마. 여기도, 거기도. 당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 돕고 살면 돼!" 후회하지 말고, 살기 위한 투쟁을 위해 가!


2023년도 2분기 산업재해 누적 사망자 수는, 조사 후 인정된 것만 해도 289명입니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사람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조사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이들의 수를 합하면...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수많은 이름을 모릅니다. 가려졌기 때문에, "불법"으로, 사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어느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하는(response) 능력(ability)이라고. 타자의 호소를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바로 책임이라고.

부디 소리 없이 부르는 이름, 불리지 못하는 이름을 기억하기를, 온 마음으로 응답하기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당연하기를, 응답이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지는 희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일까요.

p.100 나는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그는 소리 내어 나를 불렀다.

p.196 소장은 말끝마다 따박따박 '불법'을 갖다붙였다. '불법 시위자', '불법 시위자 가족', 압류품에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듯 사람을 범죄자로 이름 붙이는 솜씨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알고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을 결국 하지 못하는 사람, 나보다 더한 놈도 떵떵거리고 사는데 나는 왜 못 하냐고 울고불고 해도 결국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 부끄러운 줄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은 그 '보통의'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세상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당연한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 책은 보통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영웅과 투사의 모험입니다. 그 이름들이,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이들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그런 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흘러간 기억으로 불릴 만큼 우리의 부당한 현실이 당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150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랑 행복하더라도 정말 괜찮아. 진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제 더는 행복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아름다움 아래에 우리가 있는 걸 이미 네가 아는데, 정말로 행복할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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