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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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삶, 나무처럼 살리라,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정작 "나무 같은 것"이 무어냐 묻는다면 딱 부러지게, 아니 나무 입장에서 좀 너무한 표현인가? 그렇다면, 꼭 집어 표현할 말이 없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나무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내게 나무의 이미지는 폭심지의 거대한 고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Little Boy"가 시속 320km의 속도로 떨어졌을 때, 쌩쌩 달리던 자동차도, 이리저리 내달리던 사람도 짐승도 흔적 없이 사라진 그 땅에 시속 0km의 은행나무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던 세상, 숨가쁘게 생동하던 것들과 쇳덩이들이 순식간에 타오르고 녹아 없어진 곳에 고요히, 끝없이 침묵하는 오래된 나무만이 남아있는 그 기묘한 사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나이가 제법 들었다 싶은 나무를 보면 가만히 그 표면에 손을 대보게 된다.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온기. 그럴 리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손 아래로 박동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살아있는 것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를 죽어서도 품고 있는 것은 나무가 유일하지 않을까.

누군가 부러 옮겨 심지 않는 한 처음 그 자리에서 뿌리내려 평생을 살아가는 나무는 얼핏 생각하기엔 한없이 느리고 고요하기만 한 존재다.

그러나 나무는 쉬는 법이 없다. 일 년 내내 자란다. 버거운 계절에는 다음을 준비하며 느리게 느리게 숨쉬며 기다린다. 죽지만 않으면, 살아만 있다면 자라고 또 자란다. 위로, 아래로, 안과 밖으로.


나무만큼 바쁘고 부지런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가로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은 가로수(라고 불리우는 도시 나무들)에게 유독 가혹한 편이다. 간판을 가린다고, 열매가 떨어진다고, 낙엽이 쌓인다고 철마다 아주 민둥산, 아니, 민둥나무를 만들어버린다.

매년 여름 내내 녹음을 드리우던 나무가 채 봄이 되기도 전에 앙상한 작대기가 되어버리는 꼴을 보노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게 딱 이런 짝인가 싶다. 물건에도 정이 들기 마련인데, 고마운 줄 모르고 숭덩숭덩 베어낸 자리를 보면 내가 다 속이 상한다.

그 흉참한 자리에도 두어 주나 지나면, 무심코 올려다본 자리에 새 가지가 돋아있다. 한겨울만 아니라면 그 변화가 제법 눈에 띌 정도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게 조그마한 돌기 꼴이던 것이 며칠 상관으로 어린 짐승 모양으로 살그머니 꼬다리를 내민다.

시속 0km의 나무를 해치는 시속 4km의 인간과 칼날들, 그렇게 해코지를 당하고도 살겠다고 내미는가. 언젠가는 몸통이 아기 손목만한 나무까지 무참하게 밀어놓은 꼴이 그저 짠해서 미안해, 속삭였던 기억도 있다.


저자가 멀쩡한 이공계 전공을 내던지고 느닷없이 사진 작가가 되기까지, 카메라와 전국을 누비던 시간 내내 함께했던 오래되고 어린 나무들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나가다보면 아, 이 사람도 적잖은 풍파를 겪었겠구나, 싶어진다.

내게는 그만한 세월은 없으나, 태어나고 죽어가는 이들을 살펴본 나무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언젠가는 폭풍우치는 밤엔 꼭 파도처럼 보이던 나무와 때 맞춰 새빨간 열매를 맺던 나무를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소중한 이에게, 그가 살아온 시간을 이런 말로 묻게 되리라. 당신에게는 친구같은 나무가 있나요. 당신이 오가는 길에도 눈에 익은 나무가 있을까요. 모퉁이를 돌면, 저 멀리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깊고 넓은 뿌리를 뻗어내는 나무가 있나요. 당신과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당신이 거쳐온 길을 알 수 있게.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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