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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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식간 허기를 달래거나 식후 마무리를 위해 조금씩 먹는 음식. 대체로 단 맛에 치중되어 요즘에 와서는 식사와는 별 관계 없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 그것, 에 의미를 두었던 게 언제적인가? 해가 갈수록 이전부터 썩 즐기지 않던 단맛이 숫제 고역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있어도 그다지,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로 여기게 되지 않았나.

이러나 저러나 인간사에 구복이 반이라. 맛의 즐거움, 맛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음미하듯 가만히 입안에 굴리다보면 마음이 술렁이고 묻어둔 이야기를 툭, 내뱉게 되지 않는가.

p.125 너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저 보통 수준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과 매 순간 맞대면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p.195 비로소 생각났다. 나는 자주 어머니의 속됨을 비꼬았고, 어머니는 내 다리를 비꼬았던 시절이. 나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무엇보다 불공정하다고 생 각했다. 속됨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다리는 내 의사와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에 알았다. 못된 것도, 이상한 성격도 절뚝거리는 다리처럼 타고난다는 걸.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알아도 바꿀 수 없다.


당황과 황당 그리고 충격, 미묘한 슬픔과 애증 비슷한 것을 지나 도달한 곳에서 독자는 해묵은 상처, 시간에 기대어 익어가는 마음, 미뤄왔던 끝, 어쩌면 뜻밖의 선택지를 마주할지 모른다. 보기 좋은 모양새 아래, 내내 모르는 척 미뤄뒀던 것을, 혀가 아린 단맛 뒤에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시큼하고 씁씁한 맛을, 입 안을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단면을.

결국엔, 이를테면, 디저트는 추가제공 같은 존재다. 무심코 지나쳐버릴지도 모를, 한 번 더 주어진 기회같은 것이다. 어쩌면 즐거움을 위해, 살며시 딛고 건너가는 디딤돌처럼, 가끔은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을 위해. 이유야 어쨌건 모양새 자체는 사랑스럽지 않은가.

p.91 먹혀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어. 젤리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어,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줄은. (...) 그저 조금만 더 살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작고, 금방 먹힌다 해도 난 지금이 좋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이런 태도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p.116 그런데 젤리는 달콤하고, 사랑스럽잖아.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고. 게다가 빛을 받으면 투명해져. 나는 그렇게 투명하고 가뿐하게 살아본 적이 잘 없어서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빛 아래에선 투명하게 빛났다가 빛이 사라지면 다시 어두워지고, 빛이 투과하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투과하진 않고, 그런 점도 매력적이었어.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쓴 사람도 주제도 내용도 제각기인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모두가 같은 것을 묻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잘 아는 삶에 기꺼이 잠겨들 수 있습니까? 어느 노랫말이 그러했듯 "내가 날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파삭, 하고 부서지는 것 아래를. 무섭지 않으냐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으냐고, 시고 쓰고 떫지 않냐고, 오래도록 다문 입이 쩍 벌어지고 베어문 맛이 달기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통증에 가까운 맛에 속을 게워내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148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p.151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눈을 보면서 나는 선영은 정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쩐지 불편해졌다. (...) 우리가 절교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영과 내가 연주를 잘 몰랐던 것처럼, 선영도 나도 서로를 모른다고, 이제는 정말 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디저트의 본질은 이전의 것을 지우고 새로이 인상을 남기는 데에 있다. 그것이 들척지근하게 들러붙는 맛이든, 상큼하게 코끝에 맴도는 향이든, 무엇이든 간에.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해 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각기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박하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한 단편 다섯 편을 모았다. 소재로 불려온 음식들에 달콤하니 귀여운 내용을 짐작했다가는 필경 치미는 무언가에 입귀를 비틀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리라 장담한다. 어쩌면... 비명과 함께 덮어버릴 수도 있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p.171 괜찮아. 선영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녹기 시작했을 뿐이야.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서로의 혀를 바라보았다.

p.208 "간암이 꼭 한약 먹는다고 더 심해지고 그런 건 아니래. 속설이라더구나. 해나가 많이 알아봤어. 그렇다고 그렇게 무정하게 떠날 건 뭐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이제 돌아오라고 하기엔 그곳의 삶이 있겠지.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건 알고 있으라고."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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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 -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찾은 가슴 벅찬 7가지 깨달음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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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나이에 벌써부터 이런 걸 읽어도 되나 싶었다.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때를 지나 요즘 세상에 대강 젊은이 정도로 퉁쳐지는 나이에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삶에, 인생에 대해 뭘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남은 날이 구만리에 대체로 평탄하게 살아온 내가 제목처럼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기에는 경험의 다양성도, 경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영 일천하지 않은가, 고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차에 저자 약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민하는 중에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인생은 계속되고 있으니. 삶의 고민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한다. 그러던 차에 저자 약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민하는 중에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인생은 계속되고 있으니. 어린이에게도, 청년에게도, 노인에게도 나름의 혼란과 공허함이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 있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흔들림의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온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전자는 '안다'에, 후자는 '이해한다'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평화로운 나라, 비경쟁적이고 삶에 충실한 사람들로 가득하리라고 기대되는 나라, 노르웨이의 노학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직접 체득한 삶의 지혜를 각 장에 담았다. 저자는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핵심이 되는 일곱 가지를 주제로 순간에서 영원까지, 삶의 순간들과 삶 이후를 잇는 사유를 풀어놓는다.

p.11 삶의 의미라는 주제는 언제나 존재했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과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대체로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나, 저자 자신의 배경으로 인한 한계인지 다소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 혹자에게는 경험 바깥의 세계보다는 익숙한 안전함을 선택하려는 태도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성별이나 종차별이라든지,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사회적으로 작용해왔을 압력에 대해. 삶이 투쟁의 장일 수밖에 없는 이에게는 저자의 느린 삶, 소박함과 숙고에 대한 태도가 일종의 사회적 권력과 지위에 기반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저자 또한 그를 잊지는 않으나, 결국 나는 너와 다르고 그와 당신은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다르고, 그런만큼 각자의 삶은 제각기 고유하다. 세상에 나와 완전히 같은 생각과 경험을 갖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것을 욕망하고 '이질적인 것'을, 사람이든 종교든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 배척하는 세상에 이는 퍽 난감한 진리가 아닌가. 이에 저자는 말한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라고.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한계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본다.

p.15 초점을 어디에 두든, 눈길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해야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을 비추고 인간은 섬이 아니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다.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일 뿐이다.


내게 와닿지 않는 사유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은 지금껏 무심코 나의 세계에서 지워냈던, 혹은,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비동의'의 지각에서 넓어지는 세계가 있다고. 나는 당신과는 다른 사람이고 당신 또한 그렇다. 나는 당신의 다름을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는 공통 근원 위에 자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포기될 수 없는 것을 위해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난감함만큼이나 기꺼운 일이다.

p.58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식해야만 타인에게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키우고 지원하고 작은 호의와 오랜 우정을 베풀고 절망이나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겸손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고 깊은 뜻을 배울 수도 있다.

p.249 의미있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공허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

p.300 나는 인간이 언제든 역사를 다시 바꿀 수 있으며, 생태계가 망가진다고 해서 곧바로 어두운 원초적 본능이 세상을 지배할 뚜렷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벌거벗은 유인원도, 세력을 주장하는 존재도, 연대하는 생물도, 잔인한 포유류도 아니다. 무엇 하나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존재다.



**추천하는 독자**

1. 빠르고 정신없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멈춰설 필요를 느끼는 독자
2. 최선을 다해 미래를 대비하고 있지만 동시에 견딜 수 공허감에 시달리는, 자극적이고 풍족한 일상 가운데 떨칠 수 없는 불만을 안고 있는 독자
3. 하루종일 타인의 말에, 텍스트와 소리에 파묻혀 살지만 정작 자신과의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독자
4. 유행어와 숏폼컨텐츠의 홍수 속에서 사람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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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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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자른 머리에 양장을 하고, 맵시 좋게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 최신 유행과 고학력으로 무장한 여자. 직업을 갖고, 이름을 대고, 고립되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여자. 욕망과 의견이 있는 여자. "현모양처"가 되어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의무에 순종하지 않는 여자.

"모던 걸이 아니라 못된 걸". 사치와 허영에 빠져 돈 쓰기를 허투루 하는 여자. 연애며 낭만에 넋을 빼고 달려드는 여자. "소박하고 순진한" 도덕을 버리고 외제 사치품에 남자만큼이나 밝은 여자. 욕심도 많아 더 배우고 더 돌아다니기를 원하는 여자. "감히"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제강점기, 조선 아닌 조선에, 경성 거리 한복판을 누볐던 신세대 여성들, 이른바 '신여성'을 칭했던 말들이다. "여자다운 맛"이 없는, 사회악인 동시에 계몽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새 시대를 열어갈 변혁의 아이콘이었던 여성들. 선망과 폄하를 한몸에 받았던 그들, 그 많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p.11 1920년대 초반 《신여성》의 첫머리에 실린 논평•논설류 기사들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나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밖'에 등장한 신여성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 사회의 이중적 잣대, 강력한 여성혐오, 노동 기회의 원천 봉쇄 등으로 신여성은 '밖'에 자리하지 못하고 점차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그 많던 신여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폐간된 《신여성》은 제목처럼 '신여성'을 주독자로 삼은 최신 유행 잡지였다. 여성의 계몽과 사회참여, 변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공고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었던 잡지, 외모를 가꾸고 유행을 좇는 여성은 천박하지만 탈성화된 노동자로서 공적 영역에 나선 여성은 여자다운 매력이 없다고 반성을 요구하던 잡지.

여성을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보호대상으로 그림과 동시에 탐욕스러운 간계로 남성을 유혹하는 사회악으로 치부했던, '신여성'을 꾸짖는 《신여성》의 엘리트 남성집단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압력, 더 완벽하고 더 무지할 것을 요구받았던 100년 전 '신여성'과 이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p.131 식민지 여성교육은 소수의 여성에게 교육자 에이전트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상상 속의 근대 가정,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주부를 유통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학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증식되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핍진한 현실 속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욕망이기도 했다.

p.248 '아동'만 있고 '여성'이 없었던 《신여성》의 과학적 양육법은 신여성에게 '막힌 출구'와 다름없었다. (...) 스위트 홈은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좋은' 어머니와 그 품속에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구체화되었으나, 가정이 '스위트'하게 되면 될수록 여성은 어머니로, 아내로, 주부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스위트 홈이란 고립된 섬에 갇히고 만다.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여성혐오와 계몽일지 이상향 주입일지 모를 것이 뒤섞여있던 《신여성》의 명확한 한계와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막막한 장벽의 균열을 볼 수 있다. 가리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금처럼. 강력한 부정과 통제의 다른 말은 명징한 증거다. 오래 닫혀 벽으로 착각되더라도, 문은 문이듯이. 벽을 부수고 나가면 그것이 곧 문이 되듯이.

《신여성》의 창간으로부터 근 100여 년이 흘렀다. 《신여성》과 '신여성'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끝없이 태어나고 자라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신여성'들은 100년 전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의 희망, 이상, 한계와 비판은 바라던 대로 '구시대의 한계'로 흘러갔는가?

p.98 강력한 남성의 '시선' 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p.180 신여성의 대중문화 소비가 단순히 여성의 지갑을 여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남성들이 여성의 문화소비와 즐거움 추구를 그렇게 맹렬하게 공격하며 위험과 경계의 담론을 오랫동안 반복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문화소비는 분명 남성적 사회 질서에 틈을 만드는 지점으로 작용했고, 그녀들의 욕망이 표출될 수 있는 적극적인 기제였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러하거나 더 처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말그대로 매일 여성혐오로 점철된 사건, 기사, 언동이 사회로 배설된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 완벽해지고 더 새로워지는 동시에 더 구시대적이고 더 연약해지기를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 이전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있어 인간인 동시에 여자여야 한다는 듯이, 곱절로 촘촘한 틀에 꼭 맞게 생산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달라졌다. 참지 않는 여자들,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 여성인 동시에, 여성이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마녀의 후손들, "못된 걸". 이 시대의 '신여성'들은 다음 세대의 '신여성'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한 걸음에 희망이 있다.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천장은 없으니.

p.249 우리는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한 출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출구는 열려 있을까? 설마 막힌 출구를 또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만든 출구를 100년 후 세대들은 어떻게 평할까? 당시 《신여성》을 읽던 신여성들처럼 막힌 출구를 진정한 출구라고 믿으며 열심히 만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출구를 만드는 일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드는 출구는, 우리가 그러했듯이 뒤 세대들의 교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91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일하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일 수 없고, 남성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일을 해야만 자유든 해방이든 논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 1920-1930년대 '직업부인'들은, 슈퍼우먼이 되지 못할 바에는 직장 생활을 포기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는 현대 직업여성들의 원형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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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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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상관으로 한국사 교과서 심의 문제로 소란하다. 툭하면 애국과 민족을 부르짖는 나라답게 온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느냐 하면 역시나 그렇지는 않고, 조용히 소란하다. 아는 사람만 알고 이상한 줄 아는 사람만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성토할 뿐 대체로 유야무야 넘겨질 분위기다.

아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차츰차츰 붕괴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주변에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1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p.96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콰이강의 다리, 자유인의 긍지를 그린 영화로도 남은, 실상은 무자비한 착취의 현장이었던 그곳에서 조선인은 ある(사물이 '있다')였을까, いる(생명, 마음이 있는 것이 '있다')였을까. 새까만 김상사와 "맹호"와 "청룡". 한때는 조선인이었고 언젠가는 한국인이었을 그들은, 그곳에 '가 있었던'걸까, '보내졌던' 걸까.

혹자는 대중을 개돼지라 한다. 혹자는, 심지어 독재정권을 겪은 적 없는 이가, 총칼이 시민을 겨누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엄격한' 피해자 상에서 벗어나는 '우리'를 부정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가난하고 힘없던 시절을 깡그리 잊는 일에 힘쓴 나머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지배자라는 환상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한다.

p.255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24 사할린 한인의 삶을 그저 소수의 예외 사례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작은 일이라고, 국민국가에서 태어나 단일 민족으로 자라는 삶이 당연하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이 만들어지기 위해 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폭력이 있었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다. 무심히 던지는 상처들도 여전하다. 경계해야 할 우리 모습이다. 작은 것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 하겠다고 다짐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과연 지워진 기억 속에서 순박한 피해자이기만 했나.

스스로가 글을 쓸때만 자유롭다던 저자는 역사와 개인을 분리하는 떠내려가기 식의 책임 회피 대신, 역사와 개인을 끊임없이 '연루'되어온 관계로 재조명한다. 간결명료한 가해와 피해, 선과 악의 이분법 대신 답 없이 고민하고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요구한다.

p.62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p.162 이광수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심지어 선진국이 됐다는 21세기 한국인데 집단 열병처럼 과학 천재에 대한 숭배가 폭발하곤 한다. (...). 황우석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였다.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희생된 우리시대의 이순신이었다. 저 불의의 무리에 비하면 그의 공인된 조작조차 찬란하게 빛난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 식민의 한이 퍽이나 서럽게 쌓여 있었나 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복잡하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사람의 역사 또한 필연히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기어코 사람의 자리, 책무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다시금 부끄럽게 한다. 표면상으로 이 책은, 문화예술로 보는 격동의 세계사다.

그러나 파고 들어갈수록, 흔들리는 인간, 비열하거나 평범했던 평범한 인간, 번민하는 인간이 드러난다.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름과 땅과 시간의 기억이다. 무겁고 심란하게 읽히길 바란다. 책임을 떠안는, 휘말리고 엮이는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거듭날 독자들에게.

p.6 "우리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 이 인간의 실존 조건이, 한 인간을 두고도 그 선악을 쉽사리 가늠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는 인간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에 대한 질문을 놓을 수 없다. '연루됨', 그 자체가 인간의 실존 조건이고,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일', 그 자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p.187 동정과 연민이 절실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게 늘 아름답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이 되기 일쑤였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덮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성정이 불처럼 뜨거웠던 경성의전 부속의원 의사 유상규가 동정심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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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전쟁 - 세계화, 제국주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향신료 탐욕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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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회사는 어디일까? 기준이야 여럿이겠다만. 구글? 애플? 미쓰비시? 삼성? 다 틀렸다. 오래전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교과서나 사료 속 연도로 더 익숙할 17세기 초,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유럽의 각국들이 넓어진 세계와 팽창하는 제국주의 경제에 막 익숙해졌을 무렵, 지리보다는 신비의 영역이었을 이른바 "오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거점을 두고 지금으로서도 엄청난 수백명 규모의 직원을 고용한 방대한 조직 말이다. 그 전성기의 시가총액은 현재 화폐 가치로 8조억을 훌쩍 넘는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합산이 6조 4천 가량임을 보았을 때,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난 부와 패권을 휘두르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어째서 200년 역사에도 불구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뻔하다면 뻔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할 경위로,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더니, 뛰는 날강도 위에 나는 도적패가 있는 셈이다.

p.61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진 배의 숫자는 다른 모든 유럽 국가의 배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 선박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업이 발달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네덜란드 선박 건조비는 영국의 반에도 못 미쳤다. 대량 생산 체제의 기본인 표준화 작업이 앞서 있었기에 원가를 절감한데다 설계 능력도 뛰어났다.


17세기 이전 유럽의 식문화는, 적어도 위생과 향신료 부분에서는, 지금에 비해 가히 처참한 수준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강렬한 향미와 부패방지 효능을 가진 각종 향신료들이 그네들의 땅에 자라지 못하는 탓이다. 나름 먹을 것에 진심인 편에서 보건대, 심심하고 느끼하기만 해서 어찌 먹나,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앞서 말했듯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배 타고) 나가면 도달할 "미개척지"에 대한 환상과 팽창하는 제국주의의 야망이 콱, 들이박힌 사회에, 빈부격차가 극심한 사회에도, 아니, 그렇기에 부자가 있기 마련이니, 돈 많고 욕심은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것'에 눈독을 들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던 차에 산 넘고 물 건너, 말그대로 이국의 향취를 품고 실려온 낯선 향신료에 온 "문명 사회"가 들썩인 것도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용감하게 깃발을 펄럭이며 "야만인"과 "미개척지" 정복에 성공하면 돈이며 땅이 줄줄이 쏟아져나온다는 눈부신 "희망"을 본 이들이 어디 가만히 있을까.

p.192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러한 도전은 '대항해'란 말로 표현 되는데 그로부터 수백 년에 걸쳐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폭풍우에 휩쓸려 수장되었고, 먹을 것이 떨어져 굶어 죽었고, 괴혈병과 이질 등에 걸려 죽었다. 풍토병,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도 있었다. 마침내 미지의 육지에 닿았다가 그곳 원주민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소통이 안 되어 오해가 생기면 곧바로 위험에 빠졌다. 북방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북극으로 향한 사람들은 얼음에 갇혀 죽었다.


한 번 돈맛을 보니 두 번은 더 쉬웠다. 낯선 선박과 사람, 무기에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환대했던 선주민들은 어차피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으니, 무주공산에 말뚝 하나 콱 박고 깃발부터 찌르면 제 땅이 된다고 믿던 때였으니 "문명인"이라도 냅다 밀어내고 통나무집 하나 새로 지으면 그만이었다.

항로 개척, 새로운 향신료와 안정적인 공급처를 차지하기 위한 무력 충돌로 끝없이 심화되는 경쟁은 도적이 도적을, 강도가 강도를 털어가는 꼴이었다. 자기들끼리 털고 털리는 때가 아니면 "야만인"을 짐승몰이하듯 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부렸다. 환상과 낭만으로 부풀려진 야망은 각국이 묵인하는 학살과 약탈로 꽃피우기 일쑤였다.

p.35 유럽의 패권국들이 패권을 유지하는 필요 충분 조건은 바로 '부'였다. 그리고 이는 찬탈로 시작됐다. 그들은 자원과 노동력을 찬탈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부를 키워 나갔다. 믈라카도 그랬다. 정복자들이 들이닥치면서 평화롭던 경제 활동은 중단되었고 그로부터 440년을 식민지가 되어 살아야 했다.

p.159 1605년 어느 날, 암본에 네덜란드 선박이 나타났다. 갤리언선으로 보이는 배 한 척이 수평선에 나타나더니 점점 해안으로 다가왔다. 얼핏 보아도 위용이 대단했다. 돛을 달아맨 마스트가 몇 개인지 세어 보기도 전에 갑판 밑에 촘촘히 입을 벌리고 있는 대포들이 보였다. 갑판에는 머스킷 총을 둘러메고 서 있는 병사들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밝히듯, 저자는 학술적 연구 대상이 아닌 실제 생활의 경험을 엮어냄으로서 생생함을 더한다. 보다 흥미롭게, 현장의 눈으로. 그러면서도 부제에서 말하듯, 이 모든 과정이 수탈의 역사임을 잊지 않는다. 제목처럼 미지의 식재와 영토를 향한 탐욕은 익히 알려진 폭력의 역사를 여는 서막이었다.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도 쉽게 쓰였으나 내용만큼은 무겁다. 흥미로운 무역사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 일상에 스며든 맛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향긋하고 강렬한 순간에 언뜻, 연기와 신음이 들려올지 모르는 일이니.

p.227 1만 5000명으로 추정되는 반다제도 전체 인구에서1000여 명만 살아남고 일부는 바타비아에 노예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항해 도중 상당수가 사망했다. 반다에서 바타비아는 돛배로 달포를 넘겨야 갈 수 있는 거리다. 아이섬의 학살, 런섬의 학살, 이제는 론토르섬의 학살, 그리고 곧 이어질 암본 학살. 그럼에도 기록은 쿤이 반다 주민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p.279 향신료는 이미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었다. 가격도 많이 내려가고 새로운 향신료들이 발견되어 음식 조리법도 달라진 상황이었다. 영국은 향신료 말고도 돈벌이가 될 상품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 지역을 떠날 것이니 영국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바로 그들의 식민지에 정향과 육두구를 옮겨 심는 것이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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