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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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자른 머리에 양장을 하고, 맵시 좋게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 최신 유행과 고학력으로 무장한 여자. 직업을 갖고, 이름을 대고, 고립되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는 여자. 욕망과 의견이 있는 여자. "현모양처"가 되어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의무에 순종하지 않는 여자.

"모던 걸이 아니라 못된 걸". 사치와 허영에 빠져 돈 쓰기를 허투루 하는 여자. 연애며 낭만에 넋을 빼고 달려드는 여자. "소박하고 순진한" 도덕을 버리고 외제 사치품에 남자만큼이나 밝은 여자. 욕심도 많아 더 배우고 더 돌아다니기를 원하는 여자. "감히" 여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제강점기, 조선 아닌 조선에, 경성 거리 한복판을 누볐던 신세대 여성들, 이른바 '신여성'을 칭했던 말들이다. "여자다운 맛"이 없는, 사회악인 동시에 계몽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새 시대를 열어갈 변혁의 아이콘이었던 여성들. 선망과 폄하를 한몸에 받았던 그들, 그 많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p.11 1920년대 초반 《신여성》의 첫머리에 실린 논평•논설류 기사들은 여성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거듭나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밖'에 등장한 신여성을 끊임없이 비난했다. (…) 사회의 이중적 잣대, 강력한 여성혐오, 노동 기회의 원천 봉쇄 등으로 신여성은 '밖'에 자리하지 못하고 점차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그 많던 신여성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폐간된 《신여성》은 제목처럼 '신여성'을 주독자로 삼은 최신 유행 잡지였다. 여성의 계몽과 사회참여, 변혁을 요구하는 동시에 공고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되었던 잡지, 외모를 가꾸고 유행을 좇는 여성은 천박하지만 탈성화된 노동자로서 공적 영역에 나선 여성은 여자다운 매력이 없다고 반성을 요구하던 잡지.

여성을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보호대상으로 그림과 동시에 탐욕스러운 간계로 남성을 유혹하는 사회악으로 치부했던, '신여성'을 꾸짖는 《신여성》의 엘리트 남성집단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압력, 더 완벽하고 더 무지할 것을 요구받았던 100년 전 '신여성'과 이 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p.131 식민지 여성교육은 소수의 여성에게 교육자 에이전트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상상 속의 근대 가정,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주부를 유통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학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증식되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핍진한 현실 속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욕망이기도 했다.

p.248 '아동'만 있고 '여성'이 없었던 《신여성》의 과학적 양육법은 신여성에게 '막힌 출구'와 다름없었다. (...) 스위트 홈은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좋은' 어머니와 그 품속에 안긴 아기의 모습에서 구체화되었으나, 가정이 '스위트'하게 되면 될수록 여성은 어머니로, 아내로, 주부로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스위트 홈이란 고립된 섬에 갇히고 만다.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여성혐오와 계몽일지 이상향 주입일지 모를 것이 뒤섞여있던 《신여성》의 명확한 한계와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막막한 장벽의 균열을 볼 수 있다. 가리려 애쓸수록 드러나는 금처럼. 강력한 부정과 통제의 다른 말은 명징한 증거다. 오래 닫혀 벽으로 착각되더라도, 문은 문이듯이. 벽을 부수고 나가면 그것이 곧 문이 되듯이.

《신여성》의 창간으로부터 근 100여 년이 흘렀다. 《신여성》과 '신여성'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끝없이 태어나고 자라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신여성'들은 100년 전의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때의 희망, 이상, 한계와 비판은 바라던 대로 '구시대의 한계'로 흘러갔는가?

p.98 강력한 남성의 '시선' 체제가 작동하는 담론의 장이 잡지 《신여성》임에는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 체제를 탄생시킨 불온한 신여성의 존재감 또한 분명하다. 여우털 목도리 때문에 한껏 조롱당할지언정 비로소 자기 몸을 보살필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고, 교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사랑을 꿈꾼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p.180 신여성의 대중문화 소비가 단순히 여성의 지갑을 여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면, 남성들이 여성의 문화소비와 즐거움 추구를 그렇게 맹렬하게 공격하며 위험과 경계의 담론을 오랫동안 반복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문화소비는 분명 남성적 사회 질서에 틈을 만드는 지점으로 작용했고, 그녀들의 욕망이 표출될 수 있는 적극적인 기제였다.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러하거나 더 처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말그대로 매일 여성혐오로 점철된 사건, 기사, 언동이 사회로 배설된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 완벽해지고 더 새로워지는 동시에 더 구시대적이고 더 연약해지기를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 이전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있어 인간인 동시에 여자여야 한다는 듯이, 곱절로 촘촘한 틀에 꼭 맞게 생산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달라졌다. 참지 않는 여자들, 순종하지 않는 여자들, 여성인 동시에, 여성이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마녀의 후손들, "못된 걸". 이 시대의 '신여성'들은 다음 세대의 '신여성'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한 걸음에 희망이 있다.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천장은 없으니.

p.249 우리는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한 출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출구는 열려 있을까? 설마 막힌 출구를 또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만든 출구를 100년 후 세대들은 어떻게 평할까? 당시 《신여성》을 읽던 신여성들처럼 막힌 출구를 진정한 출구라고 믿으며 열심히 만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출구를 만드는 일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드는 출구는, 우리가 그러했듯이 뒤 세대들의 교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91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일하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일 수 없고, 남성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일을 해야만 자유든 해방이든 논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 1920-1930년대 '직업부인'들은, 슈퍼우먼이 되지 못할 바에는 직장 생활을 포기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는 현대 직업여성들의 원형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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