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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디저트, 식간 허기를 달래거나 식후 마무리를 위해 조금씩 먹는 음식. 대체로 단 맛에 치중되어 요즘에 와서는 식사와는 별 관계 없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 그것, 에 의미를 두었던 게 언제적인가? 해가 갈수록 이전부터 썩 즐기지 않던 단맛이 숫제 고역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있어도 그다지,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로 여기게 되지 않았나.
이러나 저러나 인간사에 구복이 반이라. 맛의 즐거움, 맛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음미하듯 가만히 입안에 굴리다보면 마음이 술렁이고 묻어둔 이야기를 툭, 내뱉게 되지 않는가.
p.125 너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저 보통 수준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과 매 순간 맞대면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p.195 비로소 생각났다. 나는 자주 어머니의 속됨을 비꼬았고, 어머니는 내 다리를 비꼬았던 시절이. 나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무엇보다 불공정하다고 생 각했다. 속됨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다리는 내 의사와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에 알았다. 못된 것도, 이상한 성격도 절뚝거리는 다리처럼 타고난다는 걸.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알아도 바꿀 수 없다.
당황과 황당 그리고 충격, 미묘한 슬픔과 애증 비슷한 것을 지나 도달한 곳에서 독자는 해묵은 상처, 시간에 기대어 익어가는 마음, 미뤄왔던 끝, 어쩌면 뜻밖의 선택지를 마주할지 모른다. 보기 좋은 모양새 아래, 내내 모르는 척 미뤄뒀던 것을, 혀가 아린 단맛 뒤에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시큼하고 씁씁한 맛을, 입 안을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단면을.
결국엔, 이를테면, 디저트는 추가제공 같은 존재다. 무심코 지나쳐버릴지도 모를, 한 번 더 주어진 기회같은 것이다. 어쩌면 즐거움을 위해, 살며시 딛고 건너가는 디딤돌처럼, 가끔은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을 위해. 이유야 어쨌건 모양새 자체는 사랑스럽지 않은가.
p.91 먹혀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어. 젤리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어,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줄은. (...) 그저 조금만 더 살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작고, 금방 먹힌다 해도 난 지금이 좋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이런 태도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p.116 그런데 젤리는 달콤하고, 사랑스럽잖아.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고. 게다가 빛을 받으면 투명해져. 나는 그렇게 투명하고 가뿐하게 살아본 적이 잘 없어서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빛 아래에선 투명하게 빛났다가 빛이 사라지면 다시 어두워지고, 빛이 투과하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투과하진 않고, 그런 점도 매력적이었어.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쓴 사람도 주제도 내용도 제각기인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모두가 같은 것을 묻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잘 아는 삶에 기꺼이 잠겨들 수 있습니까? 어느 노랫말이 그러했듯 "내가 날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파삭, 하고 부서지는 것 아래를. 무섭지 않으냐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으냐고, 시고 쓰고 떫지 않냐고, 오래도록 다문 입이 쩍 벌어지고 베어문 맛이 달기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통증에 가까운 맛에 속을 게워내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148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p.151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눈을 보면서 나는 선영은 정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쩐지 불편해졌다. (...) 우리가 절교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영과 내가 연주를 잘 몰랐던 것처럼, 선영도 나도 서로를 모른다고, 이제는 정말 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디저트의 본질은 이전의 것을 지우고 새로이 인상을 남기는 데에 있다. 그것이 들척지근하게 들러붙는 맛이든, 상큼하게 코끝에 맴도는 향이든, 무엇이든 간에.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해 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각기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박하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한 단편 다섯 편을 모았다. 소재로 불려온 음식들에 달콤하니 귀여운 내용을 짐작했다가는 필경 치미는 무언가에 입귀를 비틀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리라 장담한다. 어쩌면... 비명과 함께 덮어버릴 수도 있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p.171 괜찮아. 선영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녹기 시작했을 뿐이야.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서로의 혀를 바라보았다.
p.208 "간암이 꼭 한약 먹는다고 더 심해지고 그런 건 아니래. 속설이라더구나. 해나가 많이 알아봤어. 그렇다고 그렇게 무정하게 떠날 건 뭐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이제 돌아오라고 하기엔 그곳의 삶이 있겠지.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건 알고 있으라고."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