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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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상관으로 한국사 교과서 심의 문제로 소란하다. 툭하면 애국과 민족을 부르짖는 나라답게 온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느냐 하면 역시나 그렇지는 않고, 조용히 소란하다. 아는 사람만 알고 이상한 줄 아는 사람만 그냥 두면 안 된다고 성토할 뿐 대체로 유야무야 넘겨질 분위기다.

아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차츰차츰 붕괴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주변에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1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p.96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콰이강의 다리, 자유인의 긍지를 그린 영화로도 남은, 실상은 무자비한 착취의 현장이었던 그곳에서 조선인은 ある(사물이 '있다')였을까, いる(생명, 마음이 있는 것이 '있다')였을까. 새까만 김상사와 "맹호"와 "청룡". 한때는 조선인이었고 언젠가는 한국인이었을 그들은, 그곳에 '가 있었던'걸까, '보내졌던' 걸까.

혹자는 대중을 개돼지라 한다. 혹자는, 심지어 독재정권을 겪은 적 없는 이가, 총칼이 시민을 겨누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엄격한' 피해자 상에서 벗어나는 '우리'를 부정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가난하고 힘없던 시절을 깡그리 잊는 일에 힘쓴 나머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지배자라는 환상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한다.

p.255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24 사할린 한인의 삶을 그저 소수의 예외 사례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작은 일이라고, 국민국가에서 태어나 단일 민족으로 자라는 삶이 당연하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이 만들어지기 위해 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폭력이 있었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다. 무심히 던지는 상처들도 여전하다. 경계해야 할 우리 모습이다. 작은 것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 하겠다고 다짐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과연 지워진 기억 속에서 순박한 피해자이기만 했나.

스스로가 글을 쓸때만 자유롭다던 저자는 역사와 개인을 분리하는 떠내려가기 식의 책임 회피 대신, 역사와 개인을 끊임없이 '연루'되어온 관계로 재조명한다. 간결명료한 가해와 피해, 선과 악의 이분법 대신 답 없이 고민하고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요구한다.

p.62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p.162 이광수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심지어 선진국이 됐다는 21세기 한국인데 집단 열병처럼 과학 천재에 대한 숭배가 폭발하곤 한다. (...). 황우석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였다.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희생된 우리시대의 이순신이었다. 저 불의의 무리에 비하면 그의 공인된 조작조차 찬란하게 빛난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 식민의 한이 퍽이나 서럽게 쌓여 있었나 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은 복잡하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사람의 역사 또한 필연히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기어코 사람의 자리, 책무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다시금 부끄럽게 한다. 표면상으로 이 책은, 문화예술로 보는 격동의 세계사다.

그러나 파고 들어갈수록, 흔들리는 인간, 비열하거나 평범했던 평범한 인간, 번민하는 인간이 드러난다.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름과 땅과 시간의 기억이다. 무겁고 심란하게 읽히길 바란다. 책임을 떠안는, 휘말리고 엮이는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거듭날 독자들에게.

p.6 "우리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 이 인간의 실존 조건이, 한 인간을 두고도 그 선악을 쉽사리 가늠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는 인간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에 대한 질문을 놓을 수 없다. '연루됨', 그 자체가 인간의 실존 조건이고,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일', 그 자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p.187 동정과 연민이 절실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게 늘 아름답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이 되기 일쑤였고,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덮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성정이 불처럼 뜨거웠던 경성의전 부속의원 의사 유상규가 동정심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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