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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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부당히 탄압받는 사회에 저항하는 것. 이상하지 않은가. 무릇 사회란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가상의 공동체인데, 누군가는 사람임에도 사람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나버리기에 애써 그 지위를 되찾으려 싸워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타인을 죽이고 가두고 때리고 착취해도 괜찮은,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누군가는 다른 이들보다 더 사람이거나 덜 사람이라는 것이. 또한,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제 삶에 앞서 타인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어 나서고야 만다는 것이.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어 절명한대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

어떤 '죽음'은 죽음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삶은 그가 사람임을 증명하려 애쓰느라 온 생을 갈아넣어야만 한다. 이것은 부당하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처참이 당연하다 말한다. 어떤 이름은 굴종의 값으로 하사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도 오래, 당연하게 이어져왔다. 그것은 익숙하기에 당연하다 말해진다. 그러므로 더욱 부당하다.

p.18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말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인권운동 하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생각 정도이다. 억지로 답을 말한다면 '사람들' 때문이다.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또 하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다.


저자 박래군의 삶은 경청의 연속이었다. 나는 그에서 연대의 실마리를 본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어떤 이가 매맞고, 쫓겨나고, 죽임당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람됨을 부정당했다. 그들은 필연히 침묵을 강요당한다. 연대는 말해지지 못하는 말,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어떤 싸움은 너무도 패배로 기울어져 있다.

그가 섰던 현장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죽임당했다. 그러나 정녕 죽으려고 죽는 사람은 없었다. 살려달라고, 살게 해달라고 부르짖던 이들만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진면목일 것이다. '누구의 죽음도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쉽게도 말해진다. 이 말은 어떤 죽음도 그 자체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운다.

p.84 초로의 엄마, 아빠들이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의문사를 알렸다. "의문사를 아시나요?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몰라요. 군대에서, 경찰서에서, 동굴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시체로 돌아왔는데, 모두 자살이라고 해요." 낮이면 유인물을 돌리고, 마이크를 잡느라 지친 그들은 농성장 바닥에 누위 밤늦도록 아이들 얘기를 했다. "내 아들은요"로 시작되는 끝도 없는 얘기를 하다가 울었다.

p.116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 지금도 나는 김영균의 눈물이, 그리고 천세용의 동생이 종종 생각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진땀이 흐르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증세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랑은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은 자들을 사랑한 것일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까?


모든 죽음은 그, 혹은 그들의 죽음이다. 죽은 자가 있다. 죽음은 단지 드러난 사실일 뿐이다. 쉽게도 말해지는 그 말은 역설적으로 가장 '죽음'을 지우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지 않은가. 어떤 죽음은 남겨진 이를 투사로 만든다. 싸우는 사람만이 그들의 존재를 사람의 존재에서 벗겨지지 않도록 붙든다. 부당하고, 미력하나 무의미하지 않다. 적어도, 이런 세상에 누군가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지는 싸움을 질 테니 시작도 않는 싸움으로 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의 고통이 곧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참사는 반복되고, 유언은 유령처럼 떠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익숙한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에 의지해 느리고 더디게 나아가지 않는가.

p.291 시민사회의, 인권운동가들의, 그리고 나의 평화적 생존권 투쟁은 패배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싸움에서만은 꼭 이기고 싶었다. 갯벌을 맨손으로 간척해서 만든 마을이고 들이지 않은가.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 나는 늘 지는 싸움만 하는 것 같다.

p.437 내가 해온 인권운동은 죽은 자들이 죽어 가면서도 외쳤던 '유언'을 현실에 접목해서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물론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서 한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간절했던 바람을 안다. 그 바람 또한 유언일 것이다. (...) 내 싸움은 앞서 죽어간 이들이 가르쳐준 인간 존엄의 길을 따라왔던 것이다. 달리 길이 있지 않았다.


다시, 경청이 곧 연대의 씨앗이다. 연대란 누구도 외로이 두지 않는 일이다. 그의 삶에 숭고나 놀라움이 아닌 '그럼에도'를 말하고 싶다. 찬사는 쉬이 흩어지는 타자의 사건이나, 후자는 나와 우리의 가능성인 탓에. 그러므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 익숙하고 당연한 폭력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믿는다. 누구도 홀로 살아가지 않으므로. 타인에 지는 존재 자체의 책무란 바로 그런 것이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곁이 될 수 있음을, 가슴을 맞대고 끌어안는 마음을. '나빠지는' 세상과 폭력의 권력은 그런 이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나아지고 있다고.

p.399 "이례적인 일은 사실 언제나 이례적이지 않다는 걸. 너희를 보내고 남은 우리가 해온 건, 슬픔의 강요가 아니라는 걸. 너희의 죽음만 특별하게 기억하려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모든 죽음이 위로받을 일이고 모든 생명이 귀함을 알아주길 원했다는 걸. 나라는 언제나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담보로 서 있다는 걸. 그리고 대규모 참사는 그 약속에 뚫린 큰 구멍을 보여주는 일이란 걸. 여기에 '놀러 가서 죽었는데' '적당히 해야 하는데' 같은 말은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걸."

p.489 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폭력은 있다. 구조적 폭력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직접 폭력만 사라졌을 뿐이다(물론 아직도 시민들의 시선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직접 폭력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리적인 공격과 방어가 필요한 때가 아니라 문화적인 방법으로 차별과 혐오, 폭력을 넘어가야 하는 때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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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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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 여러 상황에 웃는다. 아기처럼 입을 활짝 여는 웃음이든, 잔잔히 퍼져나가는 미소든, 입귀를 비트는 쓴웃음이든, 차마 울지도 못하고 실성해 터트리는 웃음이든. 뭐였더라. 울어라, 너만 울 것이다. 웃어라, 온세상이 웃을 것이다... 라던가. 아무튼. 야. 웃어. 분위기 뭐 만들지 말고.

관음과 무관심의 적절한 배합으로 범벅된 지금 사회는 서로가 컨텐츠로 취급하다 못해 태어나자마자 느닷없이 광대로 기능하기를 요구받는 꼴이다. 서로를 오징어 게임이 다른 게 아니라 꼭 사회의 축소판 아닌가. 맡겨 놓은 재미를 긁어짜내고 뼛속까지 쥐어짜이는 도파민의 왕국. 뭐 없어요? 아, 재미 없어. 구독 취소, 싫어요 콱.

p.20 누군가는 장난, 누군가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을 모든 살인 예고를 보면서 이 거대한 쇼 같은 상황은 언제 막을 내리는 거지? 생각했다. (...) 땅에 발을 붙이고 서서 이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자 하는 다짐은 엎질러진 마음만큼 크고 무겁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이것보다 명확한 블랙코미디 쇼는 없을 것 같다.

p.64 그럼에도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묻는다. 도저히 대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한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죽어왔던 이들에게, 자꾸만 부인가를 죽이고 파괴하려는 이들에게 말한다. 이곳이 바로 끔찍함이라고, 당신 서 있는 이곳이 언제나 피와 살의 한가운데라고, 전쟁의 끔찍함이 바로 여기라고. 그냥 이런 것을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고 또 말해본다.


이 360도에 1도쯤 더 돌아 얼핏 보면 정상으로 보이는 돌아버린 세상에 그들이 불려나왔다. 자, 웃겨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웃긴다는 건 뭘까요? '웃기는' 사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큰 박수로 맞이합시다. 웃음이 있으라. 첫 박수가 터지기도 전에 독자는 되묻게 된다. 그런데, 방금 말한 거 누구야? 난 아닌데.

어느날 나타난 귀는, 마치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낯익은 폭력을 불러온다. 듣지만 말할 수 없다. 무결의 수용기에 속삭여지는 말들은 차라리 배설이다. 그것은 우습다. 공연-하/되-ㄹ 수 없는 웃음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헛웃음에의 응답은 조소일 뿐인가? 그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p.141 모든 이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용서가 만약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건 용서라고 할 수 없죠. 용서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의지로만 가능한 것이니까.

p.212 속삭이는 귀는 여전히 자살 절벽으로 가는 길목의 커다란 은행나무 앞에 서 있는데, TV에 나오는 사람들도, 울타리를 괴롭히던 애들도, 같은 반 아이들과 선생님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째서?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 모두 아무렇지 않은 거야?


다시, 처음으로. 사람들은 제각기의 이유로 웃음을 터트린다. 새어나오든, 뭐 지리듯 흘러내리든, 파! 하고 고함처럼 내지르든. 그 모든 웃음조차 자유가 아니라면. 방금까지의 뜨거운 분투에서 작위를 발견하는 순간 어색하게 삐걱대는 우리 존재들을 알아차린다면.

세 차례의 종막 후에 남겨진 독자는 정처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묻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요? 웃어요, 말아요? 몰라 나도... 날카롭게, 파렴치하게, 추잡하게 직조된 이야기들은 그렇게 누군가를 불 꺼진 세상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다. 적어도 꼭 한 사람의 몫만큼은. 웃어라. 너만 웃지는 않을 것이다.

p.141 용서하는 자는 언제나 용서받는 자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돼요. 하느님이 항상 우리 위에 계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한다면, 위계는 뒤집혀요. 완벽한 계획입니다.

p.64 우리는 참 다양한 상황에서 웃고, 웃음은 너무나 다양한 맥락을 가져서, 그래서 어렵다. (...) 우리는 결국 웃는다. 때로는 그렇기에 웃음의 맥락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 무언가를 비틀어 보일 때 내가 가진 슬픔이 당신들에게 웃음과 슬픔을 함께 주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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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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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종교, 그것도 기독교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둘로 갈린다. 희한할 만큼 익숙한 세계관이든지, 사회악에 준하는 이익집단이든지. 와중에도 가톨릭은 이 극동아시아나 저 멀리 발원지인 동네에서나 비교적 조용한 이미지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비교적 점잖고 온화한 태도나, 교황 중심의 일관성이라든지. 오래 살아남은 집단이 으레 그러하듯이 따지고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건 의외로 가까이서, 오래 봐야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곧 신의 뜻이었고, 이제는 회의와 검증의 칼날 위에 선 교리가 연일 쇄신과 고수의 생사기로에 놓인 때에 교황이 죽었다. '우리에겐 교황이 없습니다'. 그러니 콘클라베가 단순한 종교적 행사가 아닌 나날이 더해가는 위기에 가톨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말 그대로 생사여부에 결부된 일종의 '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31 "교회가 스스로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때, 교회는 자기 참조적이 되고 병들게 됩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동료 추기경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악의 뿌리는 바로 자기 참조성과 일종의 신학적 자아도취에 있습니다."

p.71 교황 재위 말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 커플 축복에 대한 결정이 불러일으킨 파장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자신의 교회관에 비판적인 이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들의 반발을 소수이지만 지나치게 완강한 집단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결국 죽을 것인가? 상징을 넘어 구심점과 정체성 그 자체일 '교황'은 죽었는가? 가장 보수적인 집단을 이끄는 '진보적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콘클라베가, 바티칸을 바라보는 신도들은 물어야 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아래에 앉아 있는 추기경들이 선종한 교황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혜로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71)?" 결국, 무엇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인가?

그 모든 회의에도, 신도가 존재하는 한 교황은 가톨릭 신앙을 표방하는 국가와 신도 개개인에 충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다. 흔들리는 믿음의 시대에 여전히 오래된 믿음을 말하는, 살아있는 신성의 증인. "Habemus papam!" 신도는 환호했고, 교황은 평화를 말했다.

p.101 콘클라베에 앞서 역시 공개적으로 논의된 문제는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 필요한 친교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 여지를 어떻게 남겨 둘지에 대한 것이었다. (...) '일치'를 중시하는 진영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영 사이의 균열이 드러남에 따라, 교회를 이끌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p.134 레오 13세는 급변하는 사회를 틈타 세상을 재편하려는 여러 세력들을 바라보며, 이러한 혁명이 대중에게 초래한 고통을 교회가 증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뒤 또 다른 교황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이 역할을 맡은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카고 남부 출신의 69세 남성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침탈, 보편가치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기천년 묵은 종교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는 세계관이자 가치이며, 모든 논리에 앞서는 믿음이자 "말씀"이다. 새로운 교황은 사랑이 남아있느냐 묻는 세계에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고.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이겠느냐는 물음에 믿는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 믿는다고. 안으로부터 열려야만 하는 문이 있다. 교회 또한 그렇다.

믿음과 사랑을 깨부수지 않고도 우리, 다양한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은 믿지 않아도 저자와 같이 달라지고 나아가려는 교황과 그의 어린양들이 지닌 가능성만은 믿는다. 함께 살아가는 길에 보다 크고 넓은 '사랑'이, 베풀지 않아도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에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하리라. Habes papam.

p.216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렇게 강론을 마무리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형제자매로 만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p.228 어떻게 지금 시대에도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가? 이는 설사 역사적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교회 역시 과거를 들여다보고 반성하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을 실행할 것인지,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성실히 따르고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황이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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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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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던 때가 있었다. 어째서 이 답할 길 없는 물음을, 나를, 남겨진 나라는 그 커다란 물음을 나와 함께 내동댕이치고 떠나버렸는지. 어떤 죽음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죽이기를 택하는 것은, 내 안의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내 묻고 싶었다. 내가 정말 쪽팔려서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대체 왜 그랬냐고. 왜 나를 두고 가버렸냐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살아있는 채로, 초라하게, 남겨두고, 그렇게, 왜, 누구 마음대로, 뺏어갔느냐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다음에는 물어봐야지. 언젠가 마주치거든 꼭 따져야지. 그렇게 다짐만 몇 번을 하고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부재는 말이 없다. 부재는 있-었-던 자리로 말을 한다. 흔적으로 말한다. 푹 패여 눌린 자국, 켜켜이 쌓인 먼지와 시간의 냄새로 말한다.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에겐 말할 이 없이 들어야 할 책임만이 남겨져있다.

p.28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죽는가? 살 이유가 없을 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살아 있다면 살아지지만, 살아갈 동력이 없어진 사람은 살 수 없다. 그자리에 붙박여버린다. 어쩌면 살아 남겨진 사람은 멈춰선 사람을 두고 나아가기를, 내일로 떠밀려버리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따라서 모든 말은 산 사람, 살아 남겨진 사람이 짜맞추고 기워낸 결과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였지, 하고.

그들의 흠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어떤 일들은, 살아있었다면 따져 묻거나 하다못해 멱살이라도 틀어잡았을 모든 순간들은 죽음과 함께 침묵이 된다. 저 깊이 잠겨버려 흔적도 자취도 남기지 않는 영영 닫힌 문, 덮어씌워지는 수면. 어떤 죽음은 이해마저도, 하지 않은 말조차도 살아 남겨진 이에 떠넘겨버린다.

그렇게 삶에로 떠-밀린 이들에게 사는 일은 마른 익사와도 같다. 살 이유를 알아내든 찾아내든 쥐어짜내든, 뭐든 손에 쥐이지 않는 멀끔한 꼴로 고요히 죽어가는 것이다. 살만해서, 괜찮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건 그대로 두고, 웃기면 웃고, 좋으면 좋다 하고, 간간이 마음 저 아래서 출렁이는 소리가 나면, 그래,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아니라 꾹 참고 하나, 둘, 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p.309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도와달라고 손 내밀어야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서로의 손을 잡은 거지. 길이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아무것도, 너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허부적대며 천천히 잠겨 죽어가다 이제는 티도 안 나게 출렁, 하면 하나, 다시 하나, 둘은 영영 오지 않을 테니까, 또다시 하나… 좀처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초침처럼 주저앉는 법, 마른 땅에서 조용히 우는 법을 알아야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이 불가해한 가해를 억지로 용서의 틀에 욱여넣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음에 집중할 뿐. 살아 남겨진 이의 생에 여전히 긴 시간이 남아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함을, 그럴 수 있음을 말할 뿐.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손을 잡아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다. 그냥 말없이 꾹 잡았다 놓고 싶은 그런 마음. 이 이야기가 말하는 용서는 거창하지 않다.

남겨졌음의 수치, 상처가 단단히 달라붙어 엉긴 존재라는 모욕 대신 사랑했던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 것, 오직 그뿐이다. 모든 미련을 꽁꽁 끌어안고 잠겨 죽어버리는 대신, 저 아래 둘 것은 두고, 살아있으므로 들이마실 숨을 향해 떠오르는 일. 막다른 길에 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일. 다시, 뒤늦은 회복은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일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막다른 길로 여기게 하지 않는 일.

p.209 눈가가 뜨거워졌다가... 엄마 귀에 대고 미안하다고 속삭였다가···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모든 비극-아님은 뻔하고 진부하다. 클라이맥스에서 장렬히 산화하지 않으니. 그러나 살아있다는 건, 살아 남겨져 기억을 되씹으며 그런 순간도 있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은 그렇게 밍밍하고 시시하다. 그래야 산다. 살아내는 일은 그 지난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에이, 살아버렸네, 들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

그래, 살아라. 살아서… 계속 살아. 숨도 쉬고, 밥도 먹고, 어떤 날엔 숨막히게 그리워하고, 말을 하고, 웃고… 때때로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날엔 새처럼 대가리를 처박았다가, 폐를 쥐어짜내어 숨을 토해내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렇게 살라고, 열없이 어깨나 툭 쳐주고 싶다. 혹시 아나. 그러다 어떤 날엔 뒤늦은 알라뷰! 라도 터져나올지. 그렇게 살아지는 삶도 있는 법이다. 남겨진 마음에도.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키는 숨에, 기다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 있었다고, 잊혀지고 지워져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그런 시간이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다시, 여기 있겠노라고. 살기 위해 아래로, 더 깊이, 침잠하다 마침내 숨과 함께 떠오르는 그런 삶이. 닫힌 수면을 헤치고 나오면, 젖은 얼굴로 마주할 삶이. 세계를 관통해 단단히 맞잡아오는 손.

p.335 "떠나고 나면 내가 사랑을 줬던 순간은 다 잊고 잠시 지쳐서 했던 생각, 그 생각 하나에만 매몰되더라고요. 죄책감. 후회.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고, 밉고. 겪어보니까 이 감정들이 모순이 아니더라고. (...) 그 일로 나까지 죽이지는 말자고 새기고 또 새기면서. 그래서 다 정리하고 여기로 온 거예요. 살려고, 살아보려고."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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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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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낯설지 않은 "**깡". SPA브랜드를 포함한 글로벌 저가 의류 산업의 범람으로 옷은 크게 품 들일 필요도 없이 흔하고 또 흔한 재화가 되었다. 수천 수억을 호가하는 명품 의류보다 싸게는 만 원도 안 되는 돈에 최신 유행을 누릴 수 있고, 더구나 SNS와 유튜브에서 보이는 필수템! 추천템! 온갖 템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왕 사는 김에 하나 더... 꽉 찬 옷장, 산더미같은 옷을 가질 수 있다.

패션은 더이상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렴한 가격과 높아진 접근성, 빠르게 흘러가는 유행은 누구에게나 부담없는 접근을 선사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쉽게 사고, 빨리 질리며, 금세 쓸모 없어진다. 버리자니 영 찝찝한 당신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재활용. 필요한 사람이 쓰겠지. 버리는 것보단 덜 해롭겠지. 그 값싸고 손쉬운 위안이라니.

p.8 패스트패션이든 울트라 패스트패션이든, 이 유행의 뒤안길에 남는 건 그저 헌 옷뿐이다. 산 옷을 모두 입을 수 없고, 집에 쌓아둘 수도 없다. 그러니 헌 옷 수거함에 넣는다. 수거함에 옷을 넣을 때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좋은 곳에 기부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 반면, 쉽게 '버린다'는 마음을 갖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버려지는 옷은 어디로 가게 될까?

p.44 수출업계 관계자들 말을 들어보면, 재판매되는 의류는 전체 중고의류의 1퍼센트 안팎이다. (...) 수출되지 않고 국내에 남은 옷은 소각됐고, 재활용이나 재사용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출된 헌 옷들 또한 대부분은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등 개발도상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재판매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매립지와 소각장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살 땐 물건이었으나 버릴 땐 쓰레기다. 문제는 쓰레기로 뒤덮인 땅에도 사람이 산다는 점이다. 그 쓰레기가 정말로 '사라질' 때까지 파묻히는 삶이 있다. 쓰레기가 버려지는 땅에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 쓰레기로 먹고 사는 이들이 쓰레기가 아니라는 점, 그들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부담없이 사라는 광고는 곧 '부담없이 버리라'는 메시지를 준다. '친환경'을 표방하는 산뜻한 이미지와 공격적인 마케팅은 소비자의 책임을 한없이 가볍게 한다. 그렇게 버려진 옷들이 '재활용'되기 위해 속수무책으로 오염되는 땅과 물, 공기에 노출되는 삶 또한 버려지고, 태워지며, 표백되어 말끔한 로고 너머로 숨겨진다. 그 많은 헌 옷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라지는 걸까.

p.149 한국을 포함해 선진국들이 수출하는 중고의류는 점포가 1400곳이나 되는 중고 시장에서도 모두 소화하지 못한 채 버려지고 있었다. (...) "(매립되거나 소각된 옷들은) 대부분 쓸 만한 거였거든요. (매립지로 들어온) 중고 모자를 100개까지 모아서 친구들 나눠주고, 버려진 바지도 좋은 것을 직원들에게 주기도 했어요. 그래도 롱끌르아에는 옷이 너무 많이 들어와요."

p.191 "몇 가지 쓸모 있는 옷 아래에는 손상되고 얼룩져 팔 수 없는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바로 글로벌 패스트패션 산업에서 버려진 옷들입니다. (...) 이건 자선이 아닙니다. 낭비적인 식민주의입니다. 우리는 북반구의 패션 실수를 버리는 곳이 아닙니다."


세 저자가 추적한 옷들의 행방은 사뭇 충격적이나 놀랍지 않다. 만드는 사람 따로, 사는 곳 따로, 버려지는 나라 따로. '우리'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한국의 패션 시장 규모는 세계 5위 안에 든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사지로 몰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혹자는 일개 소비자가 무슨 힘이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권리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세워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권리라 말할 수 없다(260)." 바다를 건너는 추적과 폭로의 끝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할 것이다. 증언의 응답은 책임이다. 무엇을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이제는 저렴하지도, 가볍지 않은 책무가 남았을 뿐.

p.176 "재활용하는 것처럼 하다가 수출해서 우리 국경 밖으로만 내보내면 그만인가? 오히려 그것이 전 지구적으로 볼 때 비환경적이며 폐기물 기반 열회수 관련 환경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비위생적 소각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기억으로 금기시되고 있는 폐기물 기반 에너지회수를 넓은 의미의 재활용으로 인정하고, 기술개발과 적용을 고려할 때라고 본다."

p.259 새하얀 천 뒤에서, 누군가의 삶도 지워져 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이런 열악한 환경의 한가운데에는 늘 사회적 약자가 서 있는 걸까. 우리가 버린 옷의 무게를 그들이 대신 짊어진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마음을 짓눌렀다. 그 순간 '환경문제'라는 말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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