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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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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종교, 그것도 기독교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둘로 갈린다. 희한할 만큼 익숙한 세계관이든지, 사회악에 준하는 이익집단이든지. 와중에도 가톨릭은 이 극동아시아나 저 멀리 발원지인 동네에서나 비교적 조용한 이미지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가. 비교적 점잖고 온화한 태도나, 교황 중심의 일관성이라든지. 오래 살아남은 집단이 으레 그러하듯이 따지고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건 의외로 가까이서, 오래 봐야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곧 신의 뜻이었고, 이제는 회의와 검증의 칼날 위에 선 교리가 연일 쇄신과 고수의 생사기로에 놓인 때에 교황이 죽었다. '우리에겐 교황이 없습니다'. 그러니 콘클라베가 단순한 종교적 행사가 아닌 나날이 더해가는 위기에 가톨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말 그대로 생사여부에 결부된 일종의 '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31 "교회가 스스로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때, 교회는 자기 참조적이 되고 병들게 됩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동료 추기경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악의 뿌리는 바로 자기 참조성과 일종의 신학적 자아도취에 있습니다."
p.71 교황 재위 말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 커플 축복에 대한 결정이 불러일으킨 파장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자신의 교회관에 비판적인 이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들의 반발을 소수이지만 지나치게 완강한 집단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결국 죽을 것인가? 상징을 넘어 구심점과 정체성 그 자체일 '교황'은 죽었는가? 가장 보수적인 집단을 이끄는 '진보적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콘클라베가, 바티칸을 바라보는 신도들은 물어야 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아래에 앉아 있는 추기경들이 선종한 교황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지혜로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71)?" 결국, 무엇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인가?
그 모든 회의에도, 신도가 존재하는 한 교황은 가톨릭 신앙을 표방하는 국가와 신도 개개인에 충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다. 흔들리는 믿음의 시대에 여전히 오래된 믿음을 말하는, 살아있는 신성의 증인. "Habemus papam!" 신도는 환호했고, 교황은 평화를 말했다.
p.101 콘클라베에 앞서 역시 공개적으로 논의된 문제는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 필요한 친교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 여지를 어떻게 남겨 둘지에 대한 것이었다. (...) '일치'를 중시하는 진영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영 사이의 균열이 드러남에 따라, 교회를 이끌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p.134 레오 13세는 급변하는 사회를 틈타 세상을 재편하려는 여러 세력들을 바라보며, 이러한 혁명이 대중에게 초래한 고통을 교회가 증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뒤 또 다른 교황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이 역할을 맡은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카고 남부 출신의 69세 남성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침탈, 보편가치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기천년 묵은 종교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 숨쉬는 세계관이자 가치이며, 모든 논리에 앞서는 믿음이자 "말씀"이다. 새로운 교황은 사랑이 남아있느냐 묻는 세계에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고. 그 사랑이 정말 사랑이겠느냐는 물음에 믿는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 믿는다고. 안으로부터 열려야만 하는 문이 있다. 교회 또한 그렇다.
믿음과 사랑을 깨부수지 않고도 우리, 다양한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은 믿지 않아도 저자와 같이 달라지고 나아가려는 교황과 그의 어린양들이 지닌 가능성만은 믿는다. 함께 살아가는 길에 보다 크고 넓은 '사랑'이, 베풀지 않아도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에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하리라. Habes papam.
p.216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렇게 강론을 마무리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형제자매로 만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p.228 어떻게 지금 시대에도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가? 이는 설사 역사적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교회 역시 과거를 들여다보고 반성하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을 실행할 것인지,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성실히 따르고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황이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