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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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전쟁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 아니, 전쟁이 끊이지 않게 함으로써 권력을 쥐는 이들의 나라에서 내몰린 사람이 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직장인이었고, 가족의 일원이며... 빨갱이. 불순분자. 그러므로 망명자가 된, 빠리의 택시운전사, 세계평화를 이름에 담은, 삶의 궤적이 곧 역사인, 이방인이 있다. 이방인의 이방인, 이방인 중에서도 또다시 낯설고 다른 자.

언젠가 이 책이 필독서인 동시에 불온서적인 때가 있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조용하기를, 나이 먹고 철들기를 거부(6)"하는 그는 빨갱이요 이단아였다. 시대의 참어른이었던 그를 기억한다. 만난 적은 없지만 낯선 '어른'에서, 무지의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학생운동이 소멸한 도시의 교육과정에서 나는 내내 부끄러웠다.

p.81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 삼켰다. 서글픔이 앞섰다.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p.193 "한국에서는 이 모든 좌파가 빨갱이가 될 수 있소. 침묵하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러므로 극우가 아닌 실존주의자는 모두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오. (...)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오. 우습지 않소?"


불과 몇 년 새에 그의 이름을 낯설어진 젊은이가 많을 것이다. 나 또한 학창시절 썩 주류가 아닌 이들 외에는 그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제법 교양서의 영역(?)으로 넘어온 그의 이름에 설핏 웃었던 적도 있다. 잊혀지는가, 했다. 나아가는 시대다.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지난 해의 끝자락에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날 밤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믿음과 관용, 다양성을 다시 한 번 말소하려는, 드디어 아가리를 드러낸 퇴행에 맞닥뜨렸다. 수많은 이들이 저항했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히 확산되는 저항과 연대의 문화에 비해 여전히 장벽은 여전히, 아니, 새로이 공고하다. "우리 편"일 때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지만, 한 끗 차이로 "그들"의 혐오와 증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p.217 한편 마을사람들은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부도 그곳에 살았고 작은아버지도 그곳에 살았다. 내가 그곳에 갔던 날도 살고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 살았다. 마을사람 모두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처럼 살았다. 죽은 사람만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p.343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았던 바보였다. (...)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한 번도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않고 그저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안락히 자란 세대로서 마주한, 겉보기로나마 잠시간이었던 내란이 이러할진대, 군부정권이 말 그대로 성원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 사회에서 이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절절한 그리움과 생존의 공포, 신념을 배반하고 동지를 외면했다는 뼈아픈 자괴감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먹고 무너뜨렸을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아주 조금.

여전히 우리 사회에 관용은 멀고 연대는 확장이 아닌 고립으로 치닫는다. 혐오는 불어나고, 단단해지며, 너무도 쉽고 강력한 유혹인 반면에 연대와 관용은 "지금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말 앞에 나중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저자가 간절한 심정으로 말하고 또 말했던 '똘레랑스'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여전히 간절하게 외쳐져야 하는가.

p.306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번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p.375 '당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라.'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똘레랑스'가 있는가. 우리는 진정 나아가고 있는가. 달라진 듯도, 여전한 듯도 하다. 희망은 멀고, 환멸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이것이 독선과 폭력의 진정한 동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 이후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려온 데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독재와 배제가 민주사회를 침범하는 지금, 한국사회는 제자리와 퇴보를 오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갔어도, 가르침은 여전하다. 차별과 혐오가 관용과 차이의 숨통을 틀어막는 지금, 과거에서 또다른 과거일 현재를 묻는다. 그를 영영 이방인으로 묶어둘텐가. 그것은 지금에 달렸다. 그 책무의 무거움에 몸을 맡긴다.

p.6 그렇다. 세상을 혐오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혐오하기보다는 분노하라. 분노하기보다는 연대하고 동참하라,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젊은 벗들과 계속 만나고 싶은 궁극적인 이유다. 설령 잘 보이지 않지만, 희망의 보금자리들이 곳곳에 있음을 안다.

p.386 권력은 항상 강력하고 더욱더 강력해지려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는 속성 또한 갖고 있음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이에, 약자인 개인이 권력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서제공: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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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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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임신, 출산, 정체성. 혹자는 이 주제 시작부터 진절머리를 낼 지 모른다. 지겹게 알려진 주제가 아니냐고, 자기가 더 잘 안다며 숫제 마이크를 이리 내라고 재촉할지 모른다. 많은 경우에 그는 모른다. 만일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자리처럼 점찍혀 있다면, 그곳에서 가장 '애매하게 먼' 이들이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당신은 틀렸어요. 내가 알기로는-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연설을.

모든 이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일단은 귀기울여 듣는 게 먼저라는 보편도덕적 명제는 이 익숙한 가로채기에 번번이 힘을 잃는다. 주인공 리즈를 보라. 그의 탐닉적 일상은 자기파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를 원한다. 사랑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싶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 그의 정체성과 맞물리는 순간 "변태적 퇴행"으로 이름지어진다. 그의 욕망은 매끄러운 정상 사회의 벽 앞의 실패로만 존재할 수 있다.

p.19 트랜스 여성을 뮤즈로 삼을지언정 예술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트랜스 여성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트랜스 여성들은 미래 없는 삶에 갇히게 되지만, 또 어떤 트랜스 여성들은 그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기쁨을 자축하다가 트랜스 여성들이 종종 서둘러 들어서곤 하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신이 통계적으로 확률 높은 죽음(타살)이 아닌 본인의 처절한 선택(자살)일 때. 미래 없는 삶은 훨씬 더 화려해 보였다.

p.288 "변방의 여성들, 그들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하지만, 아이를 원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진 않았죠. 아이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전세계의 모든 여성에게 허용된 일인 것 같아요. 트랜스만 예외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트랜스에겐 상황이 달라요. (...) 시스 여성들한테는 그게 자연스러운데, 내가 그걸 원한다고 하면 변태로 보잖아요. 마치 '드레스 입은 남자'가 아이들 옆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결코 좋은 것일 리가 없다는 듯이."


다른 주인공 에임스를 보자. 어떤 독자에겐 가장 큰 혼란일 그를. 디트랜지션으로 "정상성에 복귀한" 그의 연인 카트리나가 임신했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를 원한다. 안정적인 미래를 그린다. 선택해야 한다. 그가 될 수 없는 것과, 줄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원하는 것들 사이에서. 혹자는 물을 것이다. 숨기면 되지 않냐고, 말만 안 하면 지금처럼 아무도 모를텐데, 참고 살면 되지 않냐고.

정말 그럴까.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걸까. 나로 산다는게 뭔지,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내던져졌던 그 시간들은, 어째서,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나 쉽게 지울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는 의문했다. 내 고통은 진짜일까. 스스로와 주변을 파괴했던 상처에도 의심했고, 물었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에 도달해있다. 지쳤으니까. 이 또한 삶의 방식이고 선택이니까.

p.55 트랜스 여성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고달프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포기한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성전환 환원의 가능성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트랜스 여성들이 모두 환원하기를 바라는 편파적인 사람들의 광기에 희망을 준다는 점이다. 그들은 트랜스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단해주기를 바란다.

p.163 트랜스 여성들은 트랜스 여성이 무엇인지 알고 트랜스 여성이 되는 법도 알지만,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트랜스들 간의 싸움만 보아도 그렇고, 그들이 시스 여성들과 벌이는 논쟁만 보아도 그렇다. 전부 다 트랜스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혹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정의할 뿐이다. 막상 트랜스 여성이 되면, 트랜스 여성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혹자는 이 파괴적이고 자해에 가까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히기를 자처하는 이들을 지겨워하다 떠나버릴지 모른다. 그 사이에서 어떤 피해자, 그래, 이혼한 여성으로 살아온, "트랜스들" 사이에서 "피해자가 된 여성"을 동정할지 모른다. 그의 말과 행동에 나라도, 이 정도는, 그럴 수밖에... 속삭이며 안전한 무리로 돌아가고 싶어할지 모른다.

어쩌면 조금쯤 억울할지 모른다. 결코 선택한 적 없이 요구되는 '여성성'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여자-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위협이자 퇴보일지 모른다. 그런데요, 어떤 삶은 삶이 아닌가요. 건실하고 발전적으로 정상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부적격자들"은, 자기 자리마저 파괴하는 충동과 열정과 자해와 혐오가 뒤범벅된 삶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질 수는 없는 건가요.

p.359 그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듯 트랜스들을 존중하면 될 일인데. 그러다 보니 어떤 여자는 즉석에서 트랜스젠더 표본 집단을 구성한 다음 트랜스가 아닌 사람들의 문제였다면 당연히 알았을 대처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또 어떤 여자는 에임스 자신이 원했을 직접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로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어서 성중립 화장실 문제를 엄한 데서 떠들고 다닌다.

p.481 그러나 분명히 얘기하는데, 에이즈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명칭의 탄생은 불가분의 관계다. 트랜스젠더는 질병의 매개체를 확인하기 위해 선택된 명칭이다. (...) 상처는 치유된 적이 없었다. 그저 상처 위에 건물을 세우고 상처를 지나쳤을 뿐이다. 그들은 고급화(젠트리피케이션)되었다.


이 답답하고 출구 없이 맴도는 이야기, 타협 불가능으로 지저분하게 얽힌 설움과 질투와 거짓의 관계를 이끄는 것은 "규격 외"의 존재들이다.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남성으로 "돌아온", 스스로가 여성임을 의심치 않는, 제1성원이 아닌 여성들이다. 이 혼란하고 "불결"하고 단일하지 않은 존재들이 새로운 관계와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오롯이 그려낸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하다. 좀 참고 살아라, 너도 노력을 좀 해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는다고 참아지면 그게 존재던가요. 어떤 삶은 존재만으로도 선을 넘지 않나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리즈, 에임스, 카트리나, 마야. 모든 자격없고 적당하지 않은 모든 존재들과 함께 경계를 넘나들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가 선례 없고 이름 없는 이들과 서로를 초대하는 물음이 되기를 바란다.

p.367 "난 당신에게 뭘 주겠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에요. 나와 함께해보자고, 함께 책임지고 함께 노력해보자고 당신을 초대하는 거예요. (...) 저건 당신이 만들어가는 광경이지 다른 사람한테서 빼앗아 오는 광경이 아니에요. 저게 내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은 광경이에요. 아이들과 엄마들과 함께."

p.526 "혹시 이게 우리의 해결책은 아닐까? 이게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재창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만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상상해낸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기괴하고, 딱히 선례도 없는 건 아닐까? 우리가 어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신발을, 입고 있는 바지를 본다. "어떤 종류의 여성들이건 말이야."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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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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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은 어떻게 도래할까.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 누구라도, 감히 '절대로' 알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죽음일 것이다. 심장이 멎고 더 이상 이 다음에 내쉬는 숨을 떠올릴 수 없다는 그 감각 말이다. 평생을 함께한 이가 바로 곁에서 그 순간을 맞이한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감각할 수 없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재의 감각일 뿐이다. 아, 그렇지. 이젠 없지, 하고. 멈춰서게 하는 그 느낌.

언제 어떤 형태로 도래할지 알 수 없는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살아 숨쉬는 것이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멈추지 못하는 채 나아갈 뿐이다. 그 시간은 마치, 어느 시기엔 으레 그렇듯, 한순간에 변신하거나 이전까지의 모습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 살이 돋고 두께를 더하는, 그래, 마치 조개나 나무의 테와도 같이 쌓여가는 것이다.

p.41 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예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104 바움가트너에게는 애나와 함께 산 그 모든 세월 내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 것 이상이었다. 지금도, 자식들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면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여전히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충분한 것 이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다.


제목인 동시에 주인공인 바움가트너, 평범한 노인이자 은퇴를 앞둔 교수, 그의 일상은 대개 그러하듯 단조롭고 고요하다. 이상하게도 크고 작은 사고가 연달아 일어난 어떤 날, 그래, 평범한 날만 빼고. 까맣게 태워먹은 냄비를 바라보던 그에게 탁, 하고 불이 들어오듯, 아니,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점화된 빛이 순식간에 줄을 잇고 번져나가듯 세상을 떠난 아내의 기억이 밀려온다.

가진 것이라곤 젊음 뿐, 당장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벅차던 나날, 그럼에도 이 사람이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어떻게든 내일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을 함께한 평생의 사랑.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p.141 왜 다른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진 반면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은 기억 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지 살펴본다든가.

p.184 어떤 사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진실이어야 할까, 아니면 설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떤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알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지금에서, 한순간의 사고를 아내를 잃은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진짜 현재'가.

새로이 도전하는 사랑, 아내의 업적을 존경한다는 젊은 학자, 아, 맞아, 냄비, 그리고 오래 비워둔 집... 그렇게 이야기는 그 자신의 것처럼, 제목에서 시작해 다시 처음으로, 아니. 생의 한가운데, 어느 날에서 시작해 처음으로 돌아나온다. 착시를 일으키는, 현실에 존재할리 없다는 어떤 형체처럼. 이것은 막다른 길이 아니다. 하모니다. 하나씩, 살며시 쌓여가는 멜로디처럼.

p.197 그러자 이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장을 성큼성큼 달려가는, 버려진 도시에서 먹이를 찾아 작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이리 수십 마리. 이리가 악몽의 종료점이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전쟁의 참화를 낳은 어리석음의 가장 마지막 결과물이다. 이 경우에 그 참화란 동부의 그 피의 땅에서 유대인 3백만 명이 다른 종교를 가진 또는 종교가 없는 다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나 군인과 함께 살해당한 것. 학살이 끝나자 흉포한 이리들이 도시의 문을 통해 밀고 들어온다. 이리는 단순히 전쟁의 상징이 아니다. 전쟁이 낳은 것이자 전쟁이 이 땅에 가지고 오는 것이다.


어떤 마음은 너무 무거워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꿈결과 상상의 힘을 빌어서만 간신히 '이렇게', 속삭이며 희미한 형태로 내보일 뿐이다. 그러니 작품 전체에 들릴 듯 말 듯 이어지는 멜로디는 슬픔이다. 의식의 얕은 수면 아래에서 파도에, 바람에 문득 떠오르는 상실과 부재의 감각이다. 깊고 길고 느리게 이어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4 3 2 1』에서 드러낸 초장편의 기백에 매달리는 독자에게 삐뚜름한 웃음 한 주먹을 건네듯 짧은 이야기에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뜨겁게 달아올라 흐려진 상태로는 알 수 없는, 가만히 가라앉히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리는 마음이. 자전에 가까운 이 이야기가 결국, 오래된 자리, 희미한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는 마음이려니, 한다.

p.74 바움가트너는 전화에서 수화기를 들어 올리고 당황하여 자신 없는 목소리로 여보세요, 를 내뱉어 본다—마지막에 물음표가 붙은, 여보세요. 정적이 뒤따르자,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깨어 있으니 꿈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혼잣 말을 한다. 그때 애나가 그에게 말을 한다, 살아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 다름 아닌 그 울림이 큰 목소리로 말을 한다.

p.242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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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3 - 가볍게 친해지는 서양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3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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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에게 예술은 어렵다. 정론이다. 현대예술은 더 어렵다. 이 또한 정론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이해 못 하겠다고 하면 순식간에 무식쟁이가 된다. 그뿐인가? 간신히 마음에 든 작품 하나 찾으면 사방에서 야! 그건 다섯살짜리도 하겠다! 는 시비가 쏟아진다. 이 또한 눈물의 경험적 정론이다.

이 피눈물 반 물음표 반의 진입장벽은 미술이라고 다르지 않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미술관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한가한 날 홀로 찾은 전시관을 거닐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그래서 이게 뭔데...' 라든지, '뭔 말이야...' 하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가 부지기수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전시 설명을 봐도 '그러니까 뭘 어쨌다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으니.

p.176 자코메티는 자신이 '실제'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의 전신을 고스란히 조각에 복제한 것입니다. (...) 당시 그 누구도 자코메티의 이런 작업을 이해하거나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이쑤시개로 쓸 법한 크기의 볼품없는 석고 덩어리를 의미 있는 작품으로 볼 사람은 없었던 것이죠.

p.300 로스코는 자기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평론가, 미술사가 등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로 인해 작품의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화가는 회화를 통해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채로운 색면의 색채 관계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평론가들을 보며 "천박한 식견과 무능한 자들의 잔혹성"이라며 일갈합니다.


어떻게 하면 미술이 재밌어질까? 그린 사람이든 만든 사람이든 다 똑같은 사람인데, 수단이 작품일 뿐 세상에 뭔가 말을 던지고 있다는 점은 다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 외계어에 가까운 메세지를 이해하고 심장이 쿵 쿵 뛰는 감동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방구석 미술관을 써낸 게 아닐까. 싶다. 알고 갑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봅시다. 왜 그걸 만들고 그리고 내보일 수밖에 없었냐면요... 이렇게 말하기 위해. 난해하고 황당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나 아름답고 충격적이라고, 치열한 고민과 작업 끝에 나온 작품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p.183 매일 작업을 마치며 "내일은 더 좋아질 거다. 진짜 시작은 내일부터다"라고 말하던 그는 매일매일 티끌만큼 조금씩 성취하며 작업을 진전시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대했고, 그렇게 희망을 품고 있던 낙관주의자였죠. 내가 완벽하게 이해한 사물의 실체를 조각과 회화 형태로 완벽하게 복제하겠다는 목표가 실현하기 불가능한 꿈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작고 허름한 작업실에서 자신과의 씨름을 벌인 자코메티.

p.300 "그림은 예민한 감상자의 눈에서 점점 확대되고 보조가 빨라지는 동반자 관계를 식량으로 삼아 살아간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죽는다. 따라서 그림을 세상 속에 내보내는 일은 위험하고 무정한 행위다. 천박한 식견과 무능한 자들의 잔혹성으로 인해 그림이 영원히 손상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 그런 자들은 고통을 전세계로 퍼뜨릴 것이다!"


잠시, "미술"을 '예술'로 확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예술이 사회참여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것에 내 마음이 이렇습니다. 하고 말하는 예술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전시관 어딘가에 말 없이 존재하는 작품 하나만으로 그 뜻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해설이 필요하다. 작품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탄생하기까지와 그 이후의 말이라는 우회로를 따라 창작자의 내면에 가닿는 길도 있다는 뜻이다.

일례로, 자코메티의 예술관과 그 형성 과정을 알고 그가 나면 두려워하고 연약하면서도 굳센 인간이었다는 것을, 무대에 올린 나무 한 그루는 그저 소품이 아닌 부서질 것 같이 가녀린 믿음이었고, 절망이나 권태가 아닌 용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예로, 작가의 행적은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무겁고, 고요하고, 깊어진 걸까. 이래서구나. 마음이 가로막히고 끊겼구나, 그 자신에게조차, 라고.

p.190 매일 작업을 마치며 "내일은 더 좋아질 거다. 진짜 시작은 내일부터다"라고 말하던 그는 매일매일 티끌만큼 조금씩 성취하며 작업을 진전시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대했고, 그렇게 희망을 품고 있던 낙관주의자였죠.

p.310 66세의 로스코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비전만이 찬란히 넘쳐흐르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심리 속 로스코의 내면에 남겨진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직 검정과 회색뿐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례없이 도발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자도 있다. 소비중심사회에도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던 고급 문화로서의 예술을 정면으로 걷어차는 동시에 그 자신을 스펙타클, 뉴 룰, 아이콘으로 "팔아먹은" 앤디 워홀처럼. 세간의 인식에 반기도 모자라 불도저를 밀고 들어가 신성이란 이런 것이라고, 세계를 뒤엎은 그처럼.

각 장을 따라 작가와 그 작품의 맥락과 배경을 톺아보노라면 결국 예술을 이해하는 길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현대미술은 곧 현대인의 미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작품의 면면을 살피다보면 어느샌가 미술관은 더이상 어렵고 지루한 곳이 아니게 될 것이다.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만나게 될까?

p.364 "돈은 더러운 것이다" 또는 "일하는 것은 추하다"라고 말하며 사업하는 것을 비하하는 사람들에게 워홀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 버는 일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잘되는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그는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를 세웁니다. 그리고 '예술하는 사업가'이자 '사업하는 예술가'로 성공하는 가장 환상적인 예술을 향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p.372 끝없이 자신을, 세상을, 시대를 복제했던 '20세기 가장 문제적 예술가'는 안녕을 고하며 살아 있는 우리에게 '예술'을 남기며 묻습니다. '예술로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도서제공: 블랙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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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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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치고 이 질문에 말 그대로 밥, 쌀을 익혀 그릇에 담아낸 딱 그것만을 생각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딱히 고운 때깔도 아니면서 떼먹힌 돈은 참아도 밥을 굶기는 건 못 참는 희한한 정서와 숱한 관용구에서 알 수 있듯 삶 면면에 밥에 대한 집념이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한국 사람은 밥에 진심'이다.

'밥'으로 대표되는 식사는 그저 한 끼 허기를 달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살기 위한 행위인 동시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재확인하는 일련의 의식이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누군가에게 식사는 그저 고역에 다름아니다. 어떤 일은 생각만 해도 식욕이 가시고 살기 위해 꾸역꾸역 밀어넣고 삼키기를 반복해야 한다. 못 입고는 살아도 못 먹고는 살 수 없는데. 끼니가 고통이 된 사람, 그렇게 만드는 사회가 있다.

p.12 "애들이 '선생님 선생님' 한다고 진짜 선생이라도 된 줄 알아? 우리는 숙제 검사나 잘하면 돼."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거친 사포를 들고 은심의 얼굴이며 손발을 민숭민숭해질 때까지 마구 밀어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너는 그저 신규 회원이나 유치하면 그만이라고. 너에게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입회시킨 회원의 성적이 오르고 말고는 알 바 아니라고.

p.52 "여기 진짜 이상한 데예요. 팀장님 모르시죠? (...) 젊은 직원들 그만두고 나갈 때마다 다들 그러시죠. 사기업은 여기보다 더 안 좋은 데도 많고, 월급 밀리는 데도 있는데 이런 것도 못 참다니 철이 없다고. 근데요, 여기보다 더 안 좋은 데가 있다고 해서 여기가 멀쩡한 건 아니에요. 이상하고 불합리하고, 사람을 아무런 보람도 없게 만든다고요."


밥에 환장한 사회에서 차마 밥이 안 넘어가게,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걸로 서럽게 하는, 차마 밥이 안 넘어가게 하는 게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이 말은 곧 모르는 사람, 몰라도 되게끔 사는 사람은 곧 죽어도 그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니, 알아야 한다는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설령 알더라도 문제가 된다.

관습이라는 이름의 치졸함과 그 설움이 망가뜨린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지난 세월만큼이나 지난하므로. 그렇게 차마 넘길 수 없는 밥 한 술은 돌덩이가 되어 오래도록 마음에 얹힌다. 그 무게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각자의 마음에 사무친 외로움이 크기를 대체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몇 끼를, 무엇을 눈물로 꾹꾹 눌러삼켜야 비로소 개운하게 아, 잘 먹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될까.

p.165 한국인 직장 동료들은 한국 시부모에게 잘 보이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자신은 김태길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평등한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것뿐인데,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당연히 한국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라는 듯, 모두가 시부모 노릇을 하려 드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p.147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가족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수가 어떤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남들이 눈치채더라도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평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까지도. 그들은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다음 일을 계속 걱정해야 할 만큼.


읽기 전에 언뜻 보았던 홍보에는 '이 작가 치고는 그나마 덜 죽는다' 비슷한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일단 나부터 경험에서 끓어오르는 홧병으로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뜻이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걷어채인 밥상을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는 걸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 상 차릴 줄도 모르면서 입은 처먹는 데만 쓰는 사람, 그저 저만 잘 먹고 마음 편하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총출동하니.

그런 사람들은 자기에 그치지 않고 주변을 온통 파괴하고 더럽힌다. 그에 갈려나가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밥심이네 주워섬기는 건 또다른 폭력일 뿐이다. 이 작가를 좋아하는 건, 그가 이 추저분하고 지긋지긋한 폭력의 존재를 말끔하게 지운 무균실을 그려놓고 안도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p.273 정말 그럴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별 일 아니라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괴로워하지 말고, 그 일이 내 인생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멈춰서지도 주저앉지도 않은 채 다음 걸음을 옮기며 살 수 있는 걸까. 그러기를 바랐다. 이 일이 겨우 손에 넣은 안정적인 삶을 뒤흔들지 않길 바랐다. 두고두고 기분 더러운 악몽으로 남더라도, 꿈은 현실을 갉아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p.335 임산부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초과근무를 시키면 불법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야근을 해야 하니 수당도 못 받고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신 기간 내내, 뭔가 부족한 사람, 짐짝 취급이었다. 남자는 애 아빠가 되면 책임질 게 늘어난다고 고과도 승진도 더 잘 받던데, 그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던 여자는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반쪽어치도 일을 못 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했다.


나도 살아봐서 안다고, 더럽고 치사하고 구역질이 나는 그 마음을 잘 안다고, 숨통 트일 곳 하나 없는 외로움을 안다고, 힘주어 맞잡는 손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굶어죽을 게 아니라, 혹은 지워버릴 게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 일단 먹어야 울지, 하고, 홀로 울고, 굶고, 설움을 반찬삼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24시간 분식집, 안 파는 게 없는 이동식 그릇과 온갖 메뉴가 있는 그 친숙한 곳에서 스쳐지나가고 머무르는, 평범하고 낯선 이들을 그려내는 열 편의 단편을 읽은 모두가 모르는 사람에게 괜스레 다정해지길 바란다. 눈물진 얼굴을 하고도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면 좋겠다. 소리내어 코 한 번 훌쩍이고선 다시금 툭툭 털고, 오늘이니까, 오늘은 한 번 뿐이니까.

p.69 낯익은 로고와 함께, 야채와 계란이 든 저렴한 김밥이 갑자기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은 IMF가 온 나라를 강타하고, 사람들이 겨우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던 2000년 무렵이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돈이 없던 시기, 김밥이나 라면, 비빔밥이나 국수 같은 간단하지만 따뜻한 음식들을 24시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었던 김밥천국은 인천 여기저기로, 대학가로, 다시 골목골목으로 퍼져나갔다.

p.239 그날 이후로 오징어덮밥을 보면 서장 생각이 났다. (...) 서장이 밥 사 먹으라고 돈을 주거나 카드를 맡겨놓으면 그 생각에 오징어덮밥을 곧잘 사 먹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고 호되게 가르칠 때는 또 세상 누구보다 호되게 굴면서도, 사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조용히 챙기고 제일 말단이 밥을 굶고 다니진 않나 걱정하는 그런 서장이 떠오르는 맛이어서.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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