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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평점 :
밥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치고 이 질문에 말 그대로 밥, 쌀을 익혀 그릇에 담아낸 딱 그것만을 생각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딱히 고운 때깔도 아니면서 떼먹힌 돈은 참아도 밥을 굶기는 건 못 참는 희한한 정서와 숱한 관용구에서 알 수 있듯 삶 면면에 밥에 대한 집념이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한국 사람은 밥에 진심'이다.
'밥'으로 대표되는 식사는 그저 한 끼 허기를 달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살기 위한 행위인 동시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재확인하는 일련의 의식이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누군가에게 식사는 그저 고역에 다름아니다. 어떤 일은 생각만 해도 식욕이 가시고 살기 위해 꾸역꾸역 밀어넣고 삼키기를 반복해야 한다. 못 입고는 살아도 못 먹고는 살 수 없는데. 끼니가 고통이 된 사람, 그렇게 만드는 사회가 있다.
p.12 "애들이 '선생님 선생님' 한다고 진짜 선생이라도 된 줄 알아? 우리는 숙제 검사나 잘하면 돼."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거친 사포를 들고 은심의 얼굴이며 손발을 민숭민숭해질 때까지 마구 밀어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너는 그저 신규 회원이나 유치하면 그만이라고. 너에게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입회시킨 회원의 성적이 오르고 말고는 알 바 아니라고.
p.52 "여기 진짜 이상한 데예요. 팀장님 모르시죠? (...) 젊은 직원들 그만두고 나갈 때마다 다들 그러시죠. 사기업은 여기보다 더 안 좋은 데도 많고, 월급 밀리는 데도 있는데 이런 것도 못 참다니 철이 없다고. 근데요, 여기보다 더 안 좋은 데가 있다고 해서 여기가 멀쩡한 건 아니에요. 이상하고 불합리하고, 사람을 아무런 보람도 없게 만든다고요."
밥에 환장한 사회에서 차마 밥이 안 넘어가게,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걸로 서럽게 하는, 차마 밥이 안 넘어가게 하는 게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이 말은 곧 모르는 사람, 몰라도 되게끔 사는 사람은 곧 죽어도 그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니, 알아야 한다는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설령 알더라도 문제가 된다.
관습이라는 이름의 치졸함과 그 설움이 망가뜨린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지난 세월만큼이나 지난하므로. 그렇게 차마 넘길 수 없는 밥 한 술은 돌덩이가 되어 오래도록 마음에 얹힌다. 그 무게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각자의 마음에 사무친 외로움이 크기를 대체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몇 끼를, 무엇을 눈물로 꾹꾹 눌러삼켜야 비로소 개운하게 아, 잘 먹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될까.
p.165 한국인 직장 동료들은 한국 시부모에게 잘 보이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자신은 김태길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평등한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것뿐인데,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당연히 한국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라는 듯, 모두가 시부모 노릇을 하려 드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p.147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가족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수가 어떤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남들이 눈치채더라도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평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까지도. 그들은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다음 일을 계속 걱정해야 할 만큼.
읽기 전에 언뜻 보았던 홍보에는 '이 작가 치고는 그나마 덜 죽는다' 비슷한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일단 나부터 경험에서 끓어오르는 홧병으로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뜻이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걷어채인 밥상을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는 걸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 상 차릴 줄도 모르면서 입은 처먹는 데만 쓰는 사람, 그저 저만 잘 먹고 마음 편하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총출동하니.
그런 사람들은 자기에 그치지 않고 주변을 온통 파괴하고 더럽힌다. 그에 갈려나가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밥심이네 주워섬기는 건 또다른 폭력일 뿐이다. 이 작가를 좋아하는 건, 그가 이 추저분하고 지긋지긋한 폭력의 존재를 말끔하게 지운 무균실을 그려놓고 안도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p.273 정말 그럴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별 일 아니라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괴로워하지 말고, 그 일이 내 인생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멈춰서지도 주저앉지도 않은 채 다음 걸음을 옮기며 살 수 있는 걸까. 그러기를 바랐다. 이 일이 겨우 손에 넣은 안정적인 삶을 뒤흔들지 않길 바랐다. 두고두고 기분 더러운 악몽으로 남더라도, 꿈은 현실을 갉아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p.335 임산부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초과근무를 시키면 불법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야근을 해야 하니 수당도 못 받고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신 기간 내내, 뭔가 부족한 사람, 짐짝 취급이었다. 남자는 애 아빠가 되면 책임질 게 늘어난다고 고과도 승진도 더 잘 받던데, 그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던 여자는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반쪽어치도 일을 못 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했다.
나도 살아봐서 안다고, 더럽고 치사하고 구역질이 나는 그 마음을 잘 안다고, 숨통 트일 곳 하나 없는 외로움을 안다고, 힘주어 맞잡는 손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굶어죽을 게 아니라, 혹은 지워버릴 게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 일단 먹어야 울지, 하고, 홀로 울고, 굶고, 설움을 반찬삼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24시간 분식집, 안 파는 게 없는 이동식 그릇과 온갖 메뉴가 있는 그 친숙한 곳에서 스쳐지나가고 머무르는, 평범하고 낯선 이들을 그려내는 열 편의 단편을 읽은 모두가 모르는 사람에게 괜스레 다정해지길 바란다. 눈물진 얼굴을 하고도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면 좋겠다. 소리내어 코 한 번 훌쩍이고선 다시금 툭툭 털고, 오늘이니까, 오늘은 한 번 뿐이니까.
p.69 낯익은 로고와 함께, 야채와 계란이 든 저렴한 김밥이 갑자기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은 IMF가 온 나라를 강타하고, 사람들이 겨우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던 2000년 무렵이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돈이 없던 시기, 김밥이나 라면, 비빔밥이나 국수 같은 간단하지만 따뜻한 음식들을 24시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었던 김밥천국은 인천 여기저기로, 대학가로, 다시 골목골목으로 퍼져나갔다.
p.239 그날 이후로 오징어덮밥을 보면 서장 생각이 났다. (...) 서장이 밥 사 먹으라고 돈을 주거나 카드를 맡겨놓으면 그 생각에 오징어덮밥을 곧잘 사 먹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고 호되게 가르칠 때는 또 세상 누구보다 호되게 굴면서도, 사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조용히 챙기고 제일 말단이 밥을 굶고 다니진 않나 걱정하는 그런 서장이 떠오르는 맛이어서.
*도서제공: 래빗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