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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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임신, 출산, 정체성. 혹자는 이 주제 시작부터 진절머리를 낼 지 모른다. 지겹게 알려진 주제가 아니냐고, 자기가 더 잘 안다며 숫제 마이크를 이리 내라고 재촉할지 모른다. 많은 경우에 그는 모른다. 만일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자리처럼 점찍혀 있다면, 그곳에서 가장 '애매하게 먼' 이들이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당신은 틀렸어요. 내가 알기로는-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연설을.

모든 이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일단은 귀기울여 듣는 게 먼저라는 보편도덕적 명제는 이 익숙한 가로채기에 번번이 힘을 잃는다. 주인공 리즈를 보라. 그의 탐닉적 일상은 자기파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를 원한다. 사랑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싶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 그의 정체성과 맞물리는 순간 "변태적 퇴행"으로 이름지어진다. 그의 욕망은 매끄러운 정상 사회의 벽 앞의 실패로만 존재할 수 있다.

p.19 트랜스 여성을 뮤즈로 삼을지언정 예술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트랜스 여성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트랜스 여성들은 미래 없는 삶에 갇히게 되지만, 또 어떤 트랜스 여성들은 그러한 삶의 아이러니와 기쁨을 자축하다가 트랜스 여성들이 종종 서둘러 들어서곤 하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신이 통계적으로 확률 높은 죽음(타살)이 아닌 본인의 처절한 선택(자살)일 때. 미래 없는 삶은 훨씬 더 화려해 보였다.

p.288 "변방의 여성들, 그들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어요. 하지만, 아이를 원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진 않았죠. 아이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전세계의 모든 여성에게 허용된 일인 것 같아요. 트랜스만 예외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트랜스에겐 상황이 달라요. (...) 시스 여성들한테는 그게 자연스러운데, 내가 그걸 원한다고 하면 변태로 보잖아요. 마치 '드레스 입은 남자'가 아이들 옆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결코 좋은 것일 리가 없다는 듯이."


다른 주인공 에임스를 보자. 어떤 독자에겐 가장 큰 혼란일 그를. 디트랜지션으로 "정상성에 복귀한" 그의 연인 카트리나가 임신했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를 원한다. 안정적인 미래를 그린다. 선택해야 한다. 그가 될 수 없는 것과, 줄 수 없는 것과, 그럼에도 원하는 것들 사이에서. 혹자는 물을 것이다. 숨기면 되지 않냐고, 말만 안 하면 지금처럼 아무도 모를텐데, 참고 살면 되지 않냐고.

정말 그럴까.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걸까. 나로 산다는게 뭔지,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내던져졌던 그 시간들은, 어째서,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나 쉽게 지울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는 의문했다. 내 고통은 진짜일까. 스스로와 주변을 파괴했던 상처에도 의심했고, 물었고, 울었다. 그리고, 지금에 도달해있다. 지쳤으니까. 이 또한 삶의 방식이고 선택이니까.

p.55 트랜스 여성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고달프고,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포기한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성전환 환원의 가능성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트랜스 여성들이 모두 환원하기를 바라는 편파적인 사람들의 광기에 희망을 준다는 점이다. 그들은 트랜스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단해주기를 바란다.

p.163 트랜스 여성들은 트랜스 여성이 무엇인지 알고 트랜스 여성이 되는 법도 알지만,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트랜스들 간의 싸움만 보아도 그렇고, 그들이 시스 여성들과 벌이는 논쟁만 보아도 그렇다. 전부 다 트랜스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혹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정의할 뿐이다. 막상 트랜스 여성이 되면, 트랜스 여성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혹자는 이 파괴적이고 자해에 가까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히기를 자처하는 이들을 지겨워하다 떠나버릴지 모른다. 그 사이에서 어떤 피해자, 그래, 이혼한 여성으로 살아온, "트랜스들" 사이에서 "피해자가 된 여성"을 동정할지 모른다. 그의 말과 행동에 나라도, 이 정도는, 그럴 수밖에... 속삭이며 안전한 무리로 돌아가고 싶어할지 모른다.

어쩌면 조금쯤 억울할지 모른다. 결코 선택한 적 없이 요구되는 '여성성'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여자-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위협이자 퇴보일지 모른다. 그런데요, 어떤 삶은 삶이 아닌가요. 건실하고 발전적으로 정상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부적격자들"은, 자기 자리마저 파괴하는 충동과 열정과 자해와 혐오가 뒤범벅된 삶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질 수는 없는 건가요.

p.359 그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듯 트랜스들을 존중하면 될 일인데. 그러다 보니 어떤 여자는 즉석에서 트랜스젠더 표본 집단을 구성한 다음 트랜스가 아닌 사람들의 문제였다면 당연히 알았을 대처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또 어떤 여자는 에임스 자신이 원했을 직접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로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어서 성중립 화장실 문제를 엄한 데서 떠들고 다닌다.

p.481 그러나 분명히 얘기하는데, 에이즈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명칭의 탄생은 불가분의 관계다. 트랜스젠더는 질병의 매개체를 확인하기 위해 선택된 명칭이다. (...) 상처는 치유된 적이 없었다. 그저 상처 위에 건물을 세우고 상처를 지나쳤을 뿐이다. 그들은 고급화(젠트리피케이션)되었다.


이 답답하고 출구 없이 맴도는 이야기, 타협 불가능으로 지저분하게 얽힌 설움과 질투와 거짓의 관계를 이끄는 것은 "규격 외"의 존재들이다.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남성으로 "돌아온", 스스로가 여성임을 의심치 않는, 제1성원이 아닌 여성들이다. 이 혼란하고 "불결"하고 단일하지 않은 존재들이 새로운 관계와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오롯이 그려낸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 과정은 물론 험난하다. 좀 참고 살아라, 너도 노력을 좀 해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는다고 참아지면 그게 존재던가요. 어떤 삶은 존재만으로도 선을 넘지 않나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리즈, 에임스, 카트리나, 마야. 모든 자격없고 적당하지 않은 모든 존재들과 함께 경계를 넘나들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가 선례 없고 이름 없는 이들과 서로를 초대하는 물음이 되기를 바란다.

p.367 "난 당신에게 뭘 주겠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에요. 나와 함께해보자고, 함께 책임지고 함께 노력해보자고 당신을 초대하는 거예요. (...) 저건 당신이 만들어가는 광경이지 다른 사람한테서 빼앗아 오는 광경이 아니에요. 저게 내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은 광경이에요. 아이들과 엄마들과 함께."

p.526 "혹시 이게 우리의 해결책은 아닐까? 이게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재창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만의 독창적인 해결책을 상상해낸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기괴하고, 딱히 선례도 없는 건 아닐까? 우리가 어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신발을, 입고 있는 바지를 본다. "어떤 종류의 여성들이건 말이야."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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