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만든 사람들 - 과학사에 빛나는 과학 발견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
존 그리빈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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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고 쓰고, 매운맛 위인전이라고 읽는다.

*출판사 진선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과학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과거에 현재를 쌓아 올린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정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에 속한다는 책 속의 문장처럼, 과학은 인간 지성의 위업, 정수, 경우에 따라 쾌거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표준화된 정규교육과정과 넘쳐나는 과학 교양서를 통해 우리는 번뜩이는 이론과 커다란 업적을 남긴 과학자의 이름을 알고 있으나 그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앞선 이와 그 연구가 후대의 연구자와 그 이론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개개인의 삶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며,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합해 현대로 이어져온 통합된 역사로 이해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그런 와중에 르네상스, 코페르니쿠스의 말 그대로 세상을 뒤집어놓은 지동설부터 현대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사를 시대와 주제별로 엮고 또 그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생애와 연결점을 짚어볼 수 있는 책을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르네상스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서양 과학 발달사"를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다(그렇다. 과학의 기원도 아니고 개략적으로 소개했지만 본문만 쳐도 900쪽에 달한다. 벽돌책이란 뜻이다. 출판사 공식 계정도 인정했다). 과학의 암흑기라 불리던 중세시기가 이후 과학기술과 연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흐름을 따라가면서 파악할 수 있으니,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속도가 붙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흐름과 그 배경이 된 주인공들의 삶과 비하인드 스토리같은 이야기들을 숨가쁘게 따라갈 수 있는 구성과 내용, 풍부한 참고문헌을 특장점으로 꼽고 싶다. 제목과 부제 모두에서 과학을 만든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본문은 과학자의 간략한 생애와 그들의 이론, 기술이 발표되기까지의 배경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시대 및 후대의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연유와 결과와 이론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방대하고 포괄적인 내용에 가깝다. 어렵지 않게 전달하면서도 결코 헛되지 않은 분량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

여기까지는 이 책과 함께했던 기쁨을 전달하기 위한 점잖은 이야기였고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과학분야 위인전 매운맛이라고 생각하시면 잘 와닿을 듯 합니다. 단정하게 잘 짜여진 문체지만 생각 이상으로 신랄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또, 생각 이상으로 평탄하게 살았던 사람은 많지 않으며, 불세출의 천재! 위인!으로 알았던 그 이름들이 사실 썩 고운 성격은 아니었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을 견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세요...("뉴턴이 훅에 대해 품은 적의는 편집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p.251) 암담한 비난으로 가득차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웃을 일이 아닌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짠해서 웃음을 참지 못할 부분들도 수두룩합니다. 예를 들면 혜성에 붙여진 이름으로 유명한 핼리가 존 이블린의 집에 머무르던 표트르 대제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가 외발 손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달리다 산울타리에 처넣어 통과하게 하는 놀이를 즐긴 탓에 재무부에서 저택 수리비로 거액을 지불했다든지(p.309)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존 톰슨은 남들은 쩔쩔매는 실험을 고안해내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마이너스의 손이라서 동료들이 그의 통찰력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실험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든지(p.736)하는 것들 말이지요. 아, 이건 저자가 아니라 역자의 작은 유머 코드가 아닌가 싶은 것도 있는데, 아니 멘델의 유전법칙도 좋지만 매끈 유전자와 쭈글 유전자를 굳이 매쭈로 줄이셔야만 했나요!(p.804) 덕분에 한밤중에 눈물이 나도록 웃었습니다. 진지한 내용이어서 더 웃기다고요! 여러분들도 매매 쭈쭈 매쭈에서 웃을 일은 아니지만 웃을거라고 생각해! 나만 그런거 아니지!
학계가 늘 그렇듯 줄 서서 순서 기다렸다 차례대로 손 들고 나올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앞에서 나온 이름과 이론이 한참 뒤에 다시 나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대나 주제가 같은 내용은 가급적 이어 읽으며 표를 그리는 독서 방식을 추천합니다. 과학 분야 전반에 개략적인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에게 추천할만한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내용은 아니니 걱정 말고 일단 펼치세요. 그 오랜 시간의 숙고와 논쟁을 거쳐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거대한 우주부터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서양과학사의 흐름, 아니 여정에 함께하세요. 긴긴밤 당신의 세상을 넓혀줄, 이 행성과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는 진리에 이르기까지의 열정과 논쟁, 끈기와 통찰의 역사의 강 같은 책, "과학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진선북스와 담당자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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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매매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2
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 논형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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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논형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위안부". 전쟁범죄의 피해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학술서부터 생존자 문학까지 다양하게도 접했던 단어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접할 때마다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새발의 피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깨닫게 되는 주제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근대 이성의 실패라는 양차대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나 참혹하고 잔인한 일이 있을까. 이렇게까지 억울하고 원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시리즈의 2권으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VAWW RAC의 대표와 운영위원이 책임편집을 맡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글과 "위안부"당사자의 사례들을 모은 책이다. 에세이나 담론집보다는 자료집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다. 한국에서 주로 접할 수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에 대한 기록과 분석은 피식민국 국적자의 증언 또는 연구인 이유로, 가해국의 국민이자 인신매매 혹은 애국 선전의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중잣대에 억압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다소간 낯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학창시절 내내 주입식 교육으로 들어왔던 "위안부"의 역사는 "나쁜 일본군이 조선 사람을 끌어가 노예처럼 부리고 살해했다" 정도였으니 내가 아는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해봐야 수요집회 정도였다는 사실이, 생각해보면 이걸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은 일본 내 피해자의 기록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제로 알 수 있듯 일본인 "위안부"의 사례는 인신매매와 애국 선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 국가-남성권력의 기만으로 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다. 그 중 애국 선전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것을 여성주의적으로 설명한 것이 눈에 띈다.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죽으면 군인과 마찬가지로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갈 수 있다", "전사하면 군속으로 야스쿠니에 모셔진다"는 말은 당시 전쟁 내셔널리즘이 사회에서 소외되어온 여성의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동시에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는 압력이 얼마나 공고히 작용하는지 아주 잘 아는 것을 넘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2013년 오키나와 위령의 날에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오키나와 여성이 방파제가 되어 진주군의 강간을 저지해 주었다"는 망발을 치사랍시고 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성의 방파제' 이론과도 맞닿아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느니, 공적이 있다느니 추어올리는 것 또한 여성을 성욕처리 도구로 여기며, '정숙한 부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위안부"가 된다는, '"위안부" 필요론'과 다르지 않은 기만이요 폭력이다.

겉으로나마 자발적이었던 이들에게도, 팔려가고 속아 끌려간 이들에게도, 후일에서야 알게되어 그 참담함에 눈을 감는 이들에게도 끔찍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폭력이고 범죄이다. "위안부" 범죄에 누가 '창부'였고 누가 '무고한 처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피해자다. 모두가 국가권력에, 기득권에, 공고한 가부장사회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피해자요 약자다. 모든 범죄가 그렇듯 전쟁범죄 또한 생존자가 곧 증거이자 역사다. 전쟁이라는 비일상적 재난에서 극소수의 주모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개인은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가 되고, 그 중 더욱 소외되고 이용되는 약자는 혼란이 수습되고 '정상으로 돌아온' 세상에서도 밀려나고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특히나 본인의 자유가 지고의 선이며 '냉철한 분석'이랍시고 망언을 내뱉고 모욕을 일삼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지 못한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티끌만한 지적에도 들보에 매달린 것 처럼 난리를 친다. 피해자를 손쉽게 매도하고 배제하는 이들과 가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가족을 겨냥해 그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며 저주하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혹자는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 책을 읽고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서야 겨우 우겨볼 수 있을 것이다. 참혹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사람 탈을 쓰고도 사람이 아닌 이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겨우 우겨보는 이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록하고 외치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살아남은 이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살아야했던 이들에게 지는 의무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연대해야 할 것에 연대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세상에 내어주신 도서출판 논형에게 감사드린다. 잘 읽었습니다.

#일본인위안부 #위안부문제해결 #논형 #서평단모집 #서평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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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 Belief of Flower
김윤호 지음 / 바른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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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 Belief of Flower. 제목을 보고 한참 고민했더랜다. 대체 무슨 뜻일까. 식물, 그 중에서도 꽃을 소재로 한 이야기겠거니 싶어 집어든 이 책으로 인해 기대 이상의 이야기꾼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추천사도 홍보문구도 없고 이렇다 할 일러스트도 없어 조금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지에서 쉬이 유추하지 못할 삶, 성장과 용기, 그리고 죽음까지 아우르는 이 소설은 차가운 도시의 벽 틈에 피어난 한줄기 덩굴을 닮았다. 왜 하고많은 것 중에 덩굴이냐 묻는다면 꼬리에 꼬리를 이어져 어지러이 얽혀나가 끝내 새 잎을 틔워내고 또다시 끈질긴 생명을 이어나가는 듯한 이야기, 그래서 삶을 닮은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육체는 흙의 것이요, 마음은 자연의 것이라. 네가 죽은 것은 어둠이 아니라 하나의 빛이며 희망이다. 자연의 품에서 행복하길." (p.102)*

작품의 배경은 기후위기로 인한 대재앙과도 같은 시기를 지나, 자연을 인간에게서 배제하고 아예 기록에서까지 지워버리려고 하는 "세계정부"의 지배 하에 있는 미래세계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 개인은 강대국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결국 빈곤은 빈곤으로 이어져 저조한 소비는 자본주의의 파멸을 불러왔다. 극소수의 정상들은 은밀히 "우리처럼 우월한 자들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p.55)며 가난한 자들을 제거해 인구를 줄일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동안 배를 불린 것은 강대국이었다. 그렇게 반토막이 난 인구는 "세계정부"의 지배 아래 놓여 자연과 감정을 빼앗겨 삭제당한다. 그렇게 기계와도 같은 세상이 탄생한다.
주인공 에쉬는 어느날 손에서 꽃이 돋아난 소년이다. 이야기는 두려움에서 시작해서 희망으로 끝난다. 전반적으로 분량은 다소 있지만 소설보다는 동화에 가까운 분위기이다. 동화는 쉬운 내용이나 문체라고 깎아내리는 건 아니고,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다음 장에선 어떻게 등장하려나 싶으면 바로 다음 문장에서 죽어나가는 전개이지만 상당히 희망찬 대사와 묘사가 두드러져 콘크리트 벽 내지는 색을 뺏기고 말라 부서지기 직전의 파피루스를 닮은 회색 표지의 삭막한 거절에 이끌려 집어든 어른을 잠자리에 눕혀 토닥여주는 듯한 희한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디까지 내용을 소개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배경 외의 정보 없이 직접 읽어보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각 장의 제목인 꽃 이름과 꽃말이 어떻게 작품을 구성하는지, 몸에서 꽃이 돋아난다는 꿈같은 설정이 독자를 어디로 이끄는지는 갈라진 벽 틈에 돋아난 작은 풀포기에 홀린 이에게 숨겨진 들판같은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찬바람이 불면 곧 겨울이 다가오고 숨죽인 생명은 봄을 기다릴 때에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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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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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는 액션 활극인가 했다. 뻔하게 주먹이며 돈이며 오가는 이야기려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끝을 봤다. 제목이, 아, 그래서 제목이.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덮은 이 책은 제법 발랄한 표지와 현대판타지라는 장르의 선입견을 놓고보면 꽤나 정석적인 액션소설이다. 영화로 개봉하면 화려하게 돌아가는 카메라에 눈을 번득이는 배우가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장면이 쿵쿵 울리는 음악과 함께 암전되며 로고가 뜨는 그런 광고를 낼 것 같은, 정석적인 능력자 배틀을 주제로 하는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 않다. 소설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얇지는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잘 만든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쾌한가 하면 머뭇거리게 하고, 질척이는가 하면 말마따나 관리 잘 된 "올드 카가 아니라 클래식 카"를 타고 질주하는 문체가 저자의 기량을 가늠케한다.
욕망이 모여 고이는 곳,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곳. 잠깐의 일탈부터 삶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이들과 그것을 가장 잘 아는 돈줄, 관리자 혹은 방관자, 거부하지 못할 유혹으로 끌어당겨 뼛속까지 빨아먹고나면 뱉어버리는 늪의 수하들. 변두리에서 조장도 협력도 그렇다고 구원하지도 않는 전당사가 있다. 한때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하고 돌다 돌다 결국 마지막 남은 인간성까지도 저당잡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바닥에는 흰 캐딜락을 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성 사장과 그의 직원들이 있다. 홀연히 나타나 자리잡았다는, 거금을 다발로 들고 다녀도 아무도 건드릴 생각 한 번 하지 못한다는 성 사장, 어디고 주먹질을 일삼는 일수꾼, 악당의 표본같은 험악한 저 옆 전당사 직원이 눈길 한 번 받아보려 오매불망 좇는다는 그 성 사장, 차만큼은 절대 저당잡지 않는다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아도 모두가 설설 긴다는 바로 그 성 사장이 다친 새를 돌보듯 무심하게, 그렇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게 싸고 도는 이가 바로 주인공 장진이다. 진아. 진아 네가. 하고 불리는 그 진이.
이 소설에 행복한 이는 아무도 없다. 대체 결혼한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생활을 하면서도 재혼할 생각을 않는 아버지와 어느날 나타나 함께 사는 정희 아줌마, 경쟁업체-라고 쓰고 인근 전당사-현수막을 찢어발기고 유유자적 복귀하는 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성 사장, 삶을 저주해야 할지 아득바득 붙잡아야 할 마지막 보루로 여겨야 할지 입을 꾹 다물고 속내를 감추는 배준과 카지노의 주인, 그리고 불길한 그림자처럼 언뜻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심 경장이라 불리는 사내까지. 저마다의 불행과 저마다의 늪에 발을 담그고 살아간다. 고작해야 잠시 들렀다 떠났다는 묘사로만 존재하는, 흐릿한 배경 속 무늬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와중에 나름대로 적응해 살아가고 저마다의 비밀을 감춘 채 지키기 위해, 빼앗고 파멸시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시공간 이동이라는 만만찮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있는 문체로 독자를 붙잡고 결말까지 질주해내는 솜씨가 상당하다. 분량의 한계보다는 내 욕심 탓이겠지만,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좀 더 풀어주었다면 훨씬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시리즈로 이어가려는 과욕 없이 캐딜락을 타고 찾아온 그에게 울듯 말듯 한 웃음을 보내며 딱 덮을 수 있어 약간의 시원섭섭함을 남기는 최선의 결말이었다.
슬슬 찬 바람이 부는 지금부터 코가 떨어지게 추운 겨울까지 읽기 딱 좋은 배경이니, 때를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 없이 쓰려니 어렵네요. 덕분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추정경 #그는_흰_캐딜락을_타고_온다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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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잊어야 하는 밤
진현석 지음 / 반석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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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반석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머리말 이후 추천사도 해제도 없는 책은 참 오랜만이다. 더불어 전업 작가가 아닌 저자의 작품도 참 오랜만이다. 문외한의 고루한 편견일지는 몰라도, 날로 창작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음을 실감하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선 "추천사도 해제도 없다"도 없다는 평은 달리 말하면 "내용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 350쪽에 가까운 분량을 오롯이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내용으로 채운 저자의 지구력과 서술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었다. 스릴러, 추리 장르의 한계상 내용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장르소설을 추천하는 일이 늘 그렇듯 이 책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번 서평은 작품에 대한 소감으로 갈음하기로 하자.

이 책의 주인공은 take로 나누어진 파트의 서술자인 김성균, 김성찬, 임강철로 나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서술자에 따른 시점을 장으로 나누지 않고 한 챕터 내에서 분할된 take로 구분해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교묘하게 교차하는 시점과 사건 서술이 결말까지 숨가쁘게 따라가도록 만든다. 능숙한 서술트릭에 기시감이 들어 찾아봤더니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시공사, 2007)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지 않는 기량을 이렇게 좋은 기회로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
작품은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로 시작해 뒤통수를 치는 충격을 남기며 끝난다. 읽는 내내 초현실적인 존재가 개입한걸까? 타임패러독스를 이용한 내용일까?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 사람의,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점이 서술력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다소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소설보다는 시나리오에 가까운 느낌이 들며, 인터넷 분할 연재였으면 딱 알맞을 정도인 글의 짜임새나 밀도가 아쉽다. 이 점은 저자의 장편 출판 경험이 쌓임에 따라 이런 시절이 있었다. 정도로 회자될 부분이니 벌써부터 가능성을 닫아두고 싶지 않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저자의 시선 또한 다소 아쉽다. 저자가 중년 남성이라는 한계를 부딪힌 탓이 아닐까 싶지만, 이 또한 앞으로의 숙고와 경험에 달려있으니 쉽사리 선을 긋고 싶지 않다.
전반적으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이디어이며 초반 서술은 작품 전체를 끌고 나가는 동력이 되고,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결말은 집을 다 지어놓고 문은 달지 않고 가버리는 것과 같다. 초반부의 흡입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잃지 않고 질주해 마지막 문을 닫는 순간 뒤돌아보게 하는 작품, 여름의 무더운 시간까지 잊게 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출판사 바른북스에게 감사드린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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