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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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라는 말을 종종 떠올린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든 낯선 사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 영원히 떠도는 미완의 존재, 자기 자신에게마저. 현시대의 이방인은 어떤 의미일까.

이민자를 말하기란 이방인에 비해 한결 쉽다고 할 수 있겠다. 후자를 구성하는 요소들, 그러니까 소외라든지 소격감을 기본 구성품으로 딸려주지 않던가. 바라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물건을 강제로 떠안겨주는 일.

숙명처럼 주어지는 영구불변의 정주지로서의 국가와 출신의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에 이민이 대수냐 물을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그것들은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떠날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떠나온 자가 새로운 곳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닫혀있지 않은가.

굳이 말하자면, 주어진 대로 살든지, 모든 보호수단을 잃고 무표의 존재,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로 격하되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를 자유 정도가 있는 셈이다. 그것도 자유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다


제각기 쓰여진 여덟 편의 작품들은 황금의 땅, 까지는 아니어도 황금빛 햇살이 아낌없이 내리쬐는 곳, 선주민과 동물을 밀어낸 이민자의 사막, 호주, 그곳에 당도한 새로운 이민자들의 일상을 그려보이고 있다.

사방이 바다인 메마른 땅, 물로 둘러싸인 대지, 그리하여 치솟은 불길을 피해 도망칠 수도 없는 곳. 사람이라고 다를까.

왜 떠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바라 이 모욕과 수치와 고난을 견디고 있는지의 문제다. 이방인의 지위에서 또다른 이방인을 배척하는 목소리에 동조하기란 적지 않은 자기부정을 요하기 때문이다. 나만은 다르다. 나는 그들이 아니다.

버릴 각오로 떠났으니, 당도한 곳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밖에, 온 힘을 다해 선택과노력과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을 수밖에. 새로운 세계로의 이식과 동화를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외로 이어진다. 자신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에게서.


옳고 그름을 떠나, 빛나는 순간이 응분의 보상처럼 주어지리라 믿기에 바쳐온 헌신을 모조리 부정당할 때 무너지는 것은 비단 자존심 만이 아니다. 이 절박한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작품 밖에, 뒤에, 행간 너머에 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해 유책이다.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죄에도 책임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우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로부터의 소외에서, 이방인의 공포에서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의 전회를 목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손 쓸 수 없는 것. 닿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서 다가오는 희망의 가능성, 아주 약하고 어리고 또 꺼지기 쉬운 것. 메마른 땅을 불태우는 거대한 불길에서도 살아남는 것. 저 낯설고 연약한 것이 나와 이어져있고 또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

이 작가에게 이른바 "유니버스"가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방법은 낯설고 나약한 피로한 존재들이 손을 잡고 함께 발을 내디디는 것, 오직 그뿐이지 않겠는가. 영원한 거부와 무정주의 두려움, 피로의 바다에서 손을 맞잡는 것, 눈을 마주치는 것.


홀로 결을 달리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말을 빌어 묻고 싶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너의 존재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게 하지 않았는지, 너의 존재가 네가 있을 곳을 없애버리지 않았는지.

언젠가의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의 사랑은 떳떳하게 울고 밝게 빛난다고, 환하게 웃고 눈치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마땅히 그래야 하고 또 그럴 것이라고, 혼자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 또한 이방인에 대한 환대, 존재의 유책과 이어질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내친 "나"들에 내미는 손,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 바로 그 책임. 내가 너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너와 나는 각자의 이방인이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죄. 경계와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낯설고 피로한 자들, 이방인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이뿐이리라. 나는 또 한 번의 희망을 본다.

p.188 은영은 희율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사랑해서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수치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았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어? 네 사랑이 너 자신을 혐오하게 하지 않았어? 네 사랑이 네 가족을 울게 하지 않았어? 네 사랑은 아프지 않지. 네 사랑은 밝고 빛나지. 너는 환하게 웃고 떳떳하게 울지. 눈치 보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지, 네 사랑은.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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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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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두려움과 설마하는 안일함이 뒤범벅된 채로 전세계가 지켜보던 그곳에서,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집권 이래 팽창주의, 신질서패권의 야욕을 숨기지 않던 러시아 정부가 인접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야 만 것이다. 기실 그 징조는 오래전부터 사그라들지 않은 채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명분 없는 일이 어디 있겠냐, 국가 간 일시적인 외교 갈등이니 그들끼리 해결하게 두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가진 것 다 내놔라 하는 마당에 넙죽 내주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명목상의 경계와 주권이나마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집단 성원, 국민의 생존까지도 좌우하는 요소이지 않은가.

말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던 양차대전, 태평양전쟁 이후로 전세계가 휘말려드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곧 비교적 지엽적 규모의 학살과 침략, 분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국, 이른바 "선진국"의 성원으로는 미디어 등의 간접경험 외의 전쟁을 겪어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p.57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배급제/기초적 복지제도와 초강력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밀경찰의 전국적 감시와 통제망으로 무장한 국가는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내몰려도 그리 쉽게 내파되지 않습니다. 탈세계 추세와 함께 앞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전쟁들이 더 빈번해질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명실공히 휴전 중인 국가이면서 노상 주적은 누구요 승리요 무력을 주문처럼 외면서 그 실상에 대한 위기감은 조금도 없다는 것이. 평화의 세대, 실제로서의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번 전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우리, 그러니까 적어도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전쟁을 모른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외의 세계를 기약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그 참상을 모른다. 지금의 전쟁은 국지적 분쟁,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갈등일까, 과연.

p.15 전쟁 시대에 평화 만들기란 국가에만 맡길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시민사회와 그 구성원 각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 무엇보다 평화는 우리 안에서의 가치 재평가부터 시작됩니다. 예컨대 '죽음 장사'라고 할 만한 한국의 방위산업 수출 폭증에 과연 우리가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봐야 합니다.

p.35 푸틴주의를 총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야만"이 있다면, 푸틴주의는 바로 그 야만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봅니다. (...) 푸틴주의가 지향하는 미래 세계는 강국들이 약소국을 지휘, 통제하는 서열적 세계이지, 평등의 세계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목처럼 나는, 우리는, 한국과 주류 선진국 사회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구축할 힘이 있을까? 지금의 인간이 빙하기의 종언이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를 살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 전쟁을 세계 어디선가 벌어지는 일 정도로만 아는 이들에게는 전쟁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능력조차 없는 형국이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일견 현대전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유무형의 폭력을 통해 타자의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는 존재-범위를 침해하는 것이 곧 전쟁의 본질이다.

작게는 신체와 물리적 공간을, 크게는 이름, 그러니까 의식체계와 존재의 근원까지도 침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전쟁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다. 힘의 논리, 남의 목숨으로 이득을 보는 이가 주도하는 것.

p.202 신권위주의 국가들은 대신 노동자 등 피통치자 사이의 연대를 파괴해 원자화된 개인이 각자도생식으로 생존을 위해 분투하게 만들고, 어용언론의 매혹적인 메시지에 홀로 노출되도록 합니다. (...) 저복지와 불안정노동, 개인의 원자화 속에서 무력해진 개인들이 호소력 높은 민족주의적 메시지에 포획된 것이 신권위주의 사회입니다.

p.221 21세기초반 홀로코스트라는 참상을 겪고 현재는 인터넷으로 모두가 하나의 '마을'로 연결된 세계이지만, 여전히 한 국가의 영토 보유나 국제적 위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바로 해당 국가의 '살인력', 즉 군사력입니다. 인류가 지난 역사로부터 본격적으로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파괴와 말살을 도모하지 않는 전쟁은 없다. 이번 전쟁 또한 그렇다. 앞서 이야기한 전세계적 규모의 전쟁 이후, 오랜 시간 질서라는 이름 아래 갈등을 키워온 평화의 시대, 그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전쟁의 시대를 상상할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시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도래했다.

저자는 묻는다. 간신히 재건한 세계가 다시금 포화와 절멸의 길로 착실히 나아가는 지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겠느냐고. 아직도 기존의 방식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 믿느냐고. 자본주의 사회의 재앙에서 진보를 주장하는 이의 책무란 무엇이겠느냐고.

소련의 몰락, 과거의 영광 그 이상을 원하는 푸틴의 신질서 이상향을 지켜본 이의 물음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침략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떤 미래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반도의 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무엇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p.262 열강 세계의 외교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반자도 없습니다. 서로 간에 아주 복잡하고 갈등으로 가득한 역사를 가진 중, 러는 지금 이해타산이 맞아 준동맹 관계가 됐지만, 타산이 달라지면 그 관계도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불확실성 혹은 가변성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 역시 앞으로의 생존 전략을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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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 -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이언주 지음 / 비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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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사람에게 관심이 많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매번 같은 말로 돌려준다. 관심이 아니라 정이 많은 거라고, 있다고 해도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수준에 그칠 거라고.

그래서인지, 토크쇼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아니,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연사가 나오는 것도 싫고, 여럿이 모여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은 종류를 막론하고 시청 시간 10분을 넘긴 적이 없다. 남이사 이런 삶을 살든 저런 삶을 살든, 괜히 훈수 둘 생각 하지 말고 알아서들 앞가림 잘하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동시에, 가까운 이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듣고 있어"다. 귀 기울여 듣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당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어주기를, 그리하여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당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

너무도 복잡해진 세상,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그 수만큼 다른 세계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커녕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빛나고 힘있는 지위가 아닌 평범한 일상의 영웅들, 그러나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애써 찾아내야만 가능할 만큼 귀한 일이 되었다.

우습지 않은가. 누구도 홀로 살아낼 수 없다, 모든 삶은 유일하다, 노상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남 이야기는 듣기 싫다고 피해왔다는 것이. 어쩌면 무서워서 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알면 이해하지 않을 수 없고, 이해하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모를 때처럼 속 편하게 살 수 없어서.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향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이것은 단지 말 그대로의 의미뿐만이 아니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자기 자신이라는 닫힌 세계를 내려두고 타인의 삶, 바로 그 자리에 서보지 않는 한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p.45 호기심은 우리를 움직인다. 기꺼이 움직여 이유를 찾고 묻고 듣게 한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간 누군가에게서 '나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될지라도, 곽재식과 유재석의 경우처럼 뜻밖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불현듯 발견한 공통점은 서로를 이해하는 첫 문장이 되리라.


그러니 "사람은 다 그렇다", "인생사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틀렸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고독하는 말은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사람은 홀로 살도록 생겨먹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배를 곯을자언정 차마 굶어죽어가는 이를 모른척하지 못하는 이가 분명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고, 어떤 상황에서든.

팍팍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세상에 여전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 인사를 건네고, 손을 내밀고, 푼돈이나마 나누는 이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희망은 거기서 온다. 더 작고 약한 이의 삶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세상을 묵묵히 지탱하고 꼭 한 사람만큼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이 있다.

p.134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마음으로 분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는 누군가가 옆에 있기를,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인간을 향한 본능적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절망을 희망으로 희석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도록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05 이름 모를 우리네 이웃이 적어도 밥 한 끼 정도는 잘 먹었으면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그 마음에 답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보듬는 곳. (...) 세상의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 이곳으로 더 많이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서로 생존을 확인하며, 우리 모두 오늘 또 하루 잘 살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사는 원래 그러려고 나누는 거니까.


읽는 내내 평생을 갖고 살아온 그 생각, 신념에 가까운 그것이 처음부터 틀려먹은 것,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고, 당사자에게서 듣는 삶은 타인의 시선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내밀한 층위를 포함한다. 뼈저리게 느꼈다.

선망받는 권력을 쥐지 않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대도,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작고 작은 삶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처음, 혹은 수차례 마주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있다.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련다. 영웅은 매일을 분투하는 평범한 일상에 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진대도 모두가 죽어버리게 둘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있다. 이야기를, 삶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

p.52 당장은 외롭고 방법이 없어 보일지라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가능성을 믿고 길을 가다 보면 같은 가능성을 믿는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날 수 있다. 혹은 내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그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걸출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살고 싶은 삶을 그리고, 믿고, 살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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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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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세계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하나. 하도 오래, 많이, 자주 봐서 그런가. 내 마음의 박완서 작가는 여전히 현역이다. 어쩐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신간이 나올 것만 같은.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치고 "박완서"라는 이름 세 글자는 몰라도 그의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활동 이력이라든지, 글 곳곳에서 그의 세월을 실감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곤 한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겁고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견해, 묵직하게 관록이 붙은 문체 따스함을 잃지 않는 소박한 글감들.

으레 "나이 든 사람"에게 기대하듯 그저 온화하고 진중한 태도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점 또한 닮고 싶다고 하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살다보면 다 그런거지, 피로에 전 목소리로 말하다가도 남몰래 머리를 맞대고 짓궂게 키득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의 글에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람 냄새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어떤 작품에서든 그리운 기분이 들게 한다.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언젠가의 시절.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던 엄마, 우리 엄마가 보고싶다던 엄마, 우리 엄마가 해주던 팥죽이 맛있었다고 너무너무 먹고 싶다고 하던 우리 엄마. 엄마 얘기를 하는,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던 때의 엄마.

엄마도 내가 엄마, 하고 부를 때마다 옛날 생각을 했을까. 메롱이다 이놈아, 혀를 쏙 내밀었을까. 너네 마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랑도 좀 놀아주라, 할 때마다 문 앞에서 서성였을까.

p.59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나.


둘. 살다보면 내가 싫어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뛰는" 때가 온다. 비단 아휴, 싫다 정도가 아니라 살면서 봐온 군상들, 저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온 것들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나 깨닫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코웃음을 치던 바로 그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 하나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은 무섭고 또 처참한 것이다. 그것을 마주할 수 있을 때야말로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일단 나는 한참 멀었다.

p.80 친구와 약속한 날은 하필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오후의 서울역 혼잡을 무엇에 비길까. 기차도 타기 전에 어질어질 멀미가 났다. 멀미 중 사람 멀미가 제일 고약한 것은 평소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인류애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믿을 게 못 된다는 자기혐오 때문일 것이다.

p.248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싫다. 이런 내가 쏟아 놓은 비비 꼬인 말들과 비겁하게 복면한 말들이 싫다. 그리고 이 긴긴 겨울이 싫다. 개 짖는 소리만이 충만한 이 긴긴 잠 안 오는 음습한 밤은 정말로 싫다.


셋. 언젠가 나도 으레 하는 입바른 소리, 누구도 혼자 살 수 없고 빛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때가 올까.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한껏 따뜻하고 다정한,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읽으며 연신 나는, 나라면 하는 물음을 내려놓지 못한 것은 아직도 갈 길이 먼 탓일까.

옛날이라고 말할 만큼, 잊혀져가는 때를 살아낸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 자식을 잃은 사람,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말해줄 사람을 잃은 사람. 그에 비하면 나는 그저 풋내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때. 이제야 겨우 모른다고 말할 줄 알게 된 정도.

언젠가 내가 저 나이가 된다면 저렇게 말하게 될까. 무겁고 따뜻하면서도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셋에 하나 더. 나이 들어가는 티를 내는지, 아니면 당초에 생겨먹기를 앞뒤 꽉 틀어막힌 벽창호인 탓인지 혀를 차는 일이 잦아졌다. 나중 가서 생각해보노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부끄러워 할 때도 많다.

p.218 사람들은 몇천 년을 두고 늙은이는 젊은이 하는 짓에 "말세로다 말세로다" 한탄을 하는 짓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도 말세는 안 왔고 젊은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 왔지 않은가.


사람이라면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는데, 저마다 혼자서도 살 수 있을 줄로 안다. 혼자만 잘 살면, 우리끼리만 잘 살면 다인 줄 안다. 나도 그럴 것이다. 아니라고 말만 잘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떨군다.

사람이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는 글에서 도리어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세상 없어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자신 또한 부끄러웠노라, 스스로를 내걸고 호되게 질책하는 데엔 당할 방도가 없다.

에세이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인 동시에 거울이자 시선의 공유이기도 하다. 긴긴 세월만큼 쌓인 웃음과 눈물, 참회와 감사의 기록을 읽으며 오늘도 노작가의 지혜를 배워간다. 잘 늙으리라. 사람답게 늙으리라.

p.130 인간답게 사는 길도 나만 인간답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인간답지 못하다. 이웃이 까닭 없이 인간다움을 침해받는 사회에서 나만은 오래오래 인간다움을 지키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어리석음이다.



#박완서 #사랑을무게로안느끼게 #세계사컨텐츠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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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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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으레 단편집이라 하면 여러 작가가 모였든 한 작가의 작품들이든 도서명과 같은 작품, 대표격인 표제작이 있기 마련인데 목차를 아무리 살펴봐도 누가 대표하는지 알 수가 없어 영 알쏭달쏭한 마음을 안고 읽었지요.

그런데 웬걸. 모든 작품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제목을 겨냥하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동시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저 상상이려니,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지부터요.

게다가 "모험"이라 함은 무릇 일말의 유쾌함이나 호방함을 품기 마련 아닙니까? "어쨌든간에 행복해졌다" 내지는 원하던 것을 얻어내야 모험이지. 냅다 떠밀린 세계에서 단결투쟁! 피땀으로 이룩한 해방!을 외치면 모험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투쟁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것만 모험일까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이를테면 일자리 같은 것들, 자기 자신의 안위마저 내걸고 나서는 길이 모험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절박함은 공명심이나 영움심리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의 아니겠습니까?


제목은 『어느 노동자의 모험』 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산업혁명 이래 대다수의 인류가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정말이지 "보통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상상은 현실에 기반하고, 판타지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내용을 담는다고 내내 말해왔듯이, 이 책의 수록작들 또한 현실 그 자체를 고통스러울 만큼 선명하게 내보입니다. 다섯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름답지도, 고귀한 혈통이나 대단한 용기를 타고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멸시받는, 하나도 아니고 수백 명씩 죽어나가도 주목받지 못하는 노동자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러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차마 그렇게 밀어낼 수는 없어서, 차마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가 없어서, 차마 돌아서고 포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어서, 삶에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서. 살고 싶어서.

p.59 "최태수 씨! 그냥 밀려드는 물살을 거슬러 가! 그곳에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 나올 거야. 걱정하지마. 여기도, 거기도. 당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 돕고 살면 돼!" 후회하지 말고, 살기 위한 투쟁을 위해 가!


2023년도 2분기 산업재해 누적 사망자 수는, 조사 후 인정된 것만 해도 289명입니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사람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조사되거나 인정받지 못한, 이들의 수를 합하면...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수많은 이름을 모릅니다. 가려졌기 때문에, "불법"으로, 사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어느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하는(response) 능력(ability)이라고. 타자의 호소를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바로 책임이라고.

부디 소리 없이 부르는 이름, 불리지 못하는 이름을 기억하기를, 온 마음으로 응답하기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당연하기를, 응답이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지는 희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일까요.

p.100 나는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그는 소리 내어 나를 불렀다.

p.196 소장은 말끝마다 따박따박 '불법'을 갖다붙였다. '불법 시위자', '불법 시위자 가족', 압류품에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듯 사람을 범죄자로 이름 붙이는 솜씨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알고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을 결국 하지 못하는 사람, 나보다 더한 놈도 떵떵거리고 사는데 나는 왜 못 하냐고 울고불고 해도 결국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 부끄러운 줄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은 그 '보통의'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세상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당연한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 책은 보통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영웅과 투사의 모험입니다. 그 이름들이,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이들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그런 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흘러간 기억으로 불릴 만큼 우리의 부당한 현실이 당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150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랑 행복하더라도 정말 괜찮아. 진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제 더는 행복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아름다움 아래에 우리가 있는 걸 이미 네가 아는데, 정말로 행복할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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