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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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는 오복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어디 치아뿐이겠냐만은, 먹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불분명한 출처에도 불구하고 진리처럼 전해내려온다. 인간사에 '먹는 행위'는 빠질 수 없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혹자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할 정도로.

안타깝게도 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탓에, 뭘 먹어도 그러려니, 여럿이 왁자하게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도 그 때뿐 하는 식이라 미식가랄지, 애주가랄지, 그런 아름다운 단어와는 영 연이 없다. 그렇다고 "소식좌"는 아닌지라 그저 식사를 일과 중 하나로 취급하는 '대충 먹음이' 정도랄까.

그와는 별개로 식사, 먹는 일은 하루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준비하고, 맛을 느끼고, 포만감이 다시 허기로 돌아올 때까지의 감각은 비단 순간의 집합이 아닌, 계절과 시간, 삶의 핵심을 구성하는 일종의 연속체라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p.61 단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단식은 식욕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단식 첫 날처럼 긴 하루는 없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이상하게 시간도 안 간다. 굶어보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먹는 일들을 중심으로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는지 알게 된다.


분명 먹는 일은 중요하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꼭 한 입, 기억 속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겠다고 할 만큼, 한 번 물꼬가 터지면 그치 그치, 나도 나도, 아우성칠 만큼. 맛은 단순한 감각반응이 아니다. 미각에는 기억이, 혀에는 이력이 있다.

하다못해 신생아도 분유 맛을 가리는데, 수년간 먹고살아온 가닥이 쉬이 흩어질까. 그런 탓에 부먹이니 찍먹이니, 비냉이니 물냉이니, 콩국수엔 설탕이네 소금이네 하는 일들로 점잖은 사람마저 때때로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리는 게 아닌가. 비단 열띤 토론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p,139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p.162 가끔 견딜 수 없이 어떤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무언가가 몹시 먹고 싶을 때 '목에서 손이 나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내 목에서는 커다란 국자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당장 그 국물을, 바로 그 국물을, 다른 국물이 아닌 바로 그 국물의 첫맛을 커다란 국자로 퍼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지는 것이다.


누구나 기억 속의 음식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이지 "맛대가리 없는" 악몽으로, 누군가에게는 그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의 눈빛으로,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수고로. 그것들은 쉬이 대체되지도, 잊히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맛은 비단 맛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음식은, 그 맛은, 기억이다. 삶을 지탱하는 중심이다.

이런 속성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 빠질 수 없는 자리를 앞두고 꼭 터져나오는 갈등이 있다. 본질은 '먹는 입 따로, 차리는 손 따로'에 기인한 문제다. 맛은, 음식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수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집밥, 손맛은 누군가에게 아련한 추억과 기쁨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고립과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괴리를 내포한 것이다.

p.164 늙은 '간순이'로서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음식의 맛에는 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적 작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첫맛이 주는 놀라움 속에는 어린 나를 동료처럼 존중해준 어머니의 '신뢰'라든가, 내게 맛있는 감자탕을 먹이고 싶어 한 남자친구의 '애정' 같은 마법의 조미료가 숨어 있었다.

p.183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식구, 함께 밥 먹는 사이. 함께 음식을 나누고 둘러앉는 사이라면 식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입'과 '손'이 따로 노는 현장은 백날 모여봤자 식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잘 먹고, 함께 준비하고 먹는 즐거움, 수고한 이에 대한 감사. 식구의 본질은 어쩌면 결혼도 안 하고 제사도 안 지내는 "콩가루"들이나 지켜지고 있는지 모른다.

... 라는 이상의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는 베테랑 술꾼의 "소주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난 기억을 따라 취해보자. 메뉴판 사이사이 안주 하나에, 사장님, 사장님! 여기 잔 하나 더 주세요!

p.5 인터뷰나 낭독회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p.206 태곳적 조상들이 명절을 기리고 기다렸던 이유도 이렇게 휴식과 충전, 감사와 즐김의 시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참뜻을 잊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의 참뜻은 소수 콩가루들의 삶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설은 지나갔고 추석은 언제 오나, 콩가루는 간절히 그때만 기다린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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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그네 - 교유서가 소설
하명희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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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첫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들숨이다. 태아의 세계 전체를 짓누르던 압력에 쪼그라든 폐를 펴고 어린 짐승으로서의 첫 울음을 위한 그것. 생애 가장 힘찬 동시에 최초의 숨. 마지막으로 내뱉어질 숨을 예고하는.

물에서 태어난 인간의 익사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죽은 자의 폐에 남은 물이다. 숨 대신 물을 들이킨 흔적. 절박하게 들이마신 만큼 확실하게 '숨이 막혀' 죽었다는 증거.

사람은, 살아있는 자는 심장보다 높이 차오르는 물에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손을 머리위로 추켜올"린다(신철규, 〈심장보다 높이〉 중). 그 앞에서 살려달라, 도와달라, 이렇게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외침에 답할 수 없는 세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p.78 선생님은 사람이 사람을 버린다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선생님은 당신을 겁쟁이라고 했지만 내겐 선생님이야말로 외톨이로 보인 날이었다.


인간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 들이쉰 숨으로 살과 뼈를 울려 말하는 우리, 인간은 물 안에서 숨쉴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시원처럼 가득한 물을 지나 전달되기에는 너무도 연약하다. 무른 살과 부서지기 쉬운 뼈는, 짧은 삶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적이어야 한다지만,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게 내몰리는 사회에서 여전히 인간적인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사람에게,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p.82 "내가 던진 돌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죽어야 한다면 난 그런 건 못하겠다, 그때부터 겁쟁이가 된 거야." 선생님은 그날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다 "그래서 페북에서 무언가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경이로워"라고 했다. 당신이 못했던 것을 그들은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미안하다고도 했다.

p.114 나는 언제부터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걸까. 그가 입을 닫아버리곤 하던 순간에 그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텐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언어를 버리고 여기까지 온 걸까.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은 정답을 말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그저 있는대로 내보일 뿐이다. 숨막히게 두려운 시간이 있었다고, 어떤 순간은 평생을 살게 했다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너무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고, 차마 할 수 없는 말에 숨이 막혀 가슴만 쥐어뜯었다고. 우리가 이렇게나 서로를 알지 못했다고.

혹자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Homo homini lupus)"라는 말을 지상명제처럼 받드는 세상에서조차,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묻기 전에, 우리는 인간 자신으로서 무엇이어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에, 그늘지고 비어버린 곳에서도 끝없이 소통해야 한다. 마주해야 한다. 말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숨이 닿아야 한다.

p.214 알았잖아. 알고도 모른 체하면 안 되지. 지금껏 그런 기억을 껴안고 살았다는 게, 남편이 아니라 내 아이가 그런 것처럼 가슴이 저리네. 얼굴은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야 할 것 같아.

p.225 핸드폰이 충전되자 긴급재난문자가 제일 먼저 뜨더라. 이걸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 하루에 한 번꼴로 사람을 찾는다는 문자가 행정안전부 산하 서울경찰청에서 오거든. 이번에는 실종이 아니라 배회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문자였어. 집을 나갔다가 얼마나 오래 들어오지 않으면 배회라고 할까.


하명희의 글은 이가 빠져 주저앉은 얼굴이나 세월에 흘러내린 피부 혹은 무거운 짐을 들 때처럼 숨을 흡, 참고 힘을 주기를 반복해 패인 주름같은 것이다. 흔적이 남은 삶에 대한 혹은 그 흔적 자체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부재에서 무게를 찾는다. 부재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 부재를 응시하는 존재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의 글이 남기는 족적은 함께 걸어온 흔적이다. 동정이 아닌 연민으로, 힘껏 잡아오던 손의 온기다. 귓가에 남은 웃음소리, 눈물이 오래도록 흐른 길이다. 두려워하고 연약한 생물의. 읽는 내내 속삭이던,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문장을 읽는다. 우리는 같아요.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적이지 않다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p.52 "내가 되돌아보니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여겼던 것 같아.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아저씨를 닮아가고 있더라. 아저씨는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친 어른이었던 거지."

p.87 선생님은 사람이란 게 원래 이렇게 소심하고 겁쟁이라고, 그것이 평생을 살게 한다면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소설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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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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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상실은 상처를 남긴다. 존재가 사라진, 어떤 이유로든, 빈 자리에는 벌겋게 벌어진 상처가 남는다. 때로는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채 생생하게 피를 흘리고, 때로는 농양은 째고 짜내야 가라앉듯 회복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상처는, 대부분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고 흉터로 내려앉으면 그 땐 그랬지, 하고 회상하게 하는, '지나간 것'이 된다.

가장 영구적인 상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일방적이고 영구적인 상실로 끝나버린 관계의 가장 잔인한 점은, 부재하는 이에게서는 그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부재의 자리를, 공백처럼 보이는 공간이랄지, 그것을 채우는 것은 그의 말과 행동이 남긴 기억들, 흔적 뿐이다. 남겨진 것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부재와의 싸움은 존재와의 그것보다 배는 어렵고 쉬이 흩어져버린다.

그리하여 죽음으로 인한 상실, 제각기 남은 인생을 움켜쥔 채 '그'가 부재하는 세상에 남겨져버린 이들에게 그것은 절대적인 물음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영원히 얻을 수 없는 답, 이해할 수 없는 질문, 딱 그 존재만큼의 부피와 질량을 갖는 물음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주인공, 핼이라고 불러달라는 해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야기는 '피고'로 시작된다. 마치 일기처럼, 아니, 그보다는 말처럼. 화면 너머로 눈을 마주치고 느리게 풀어가는 기억처럼.

다소 우울하지만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수줍음 많고 서툴고 조금 비딱한,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 혼란스러울 딱 그 나이의 소년. 어째서 그는 가장 슬퍼하는 동시에 가장 미움받는 자인가. 어째서 모든 해명을 거부하는가.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 그가 겪은 일을, 그가 한 일을 그의 이유로 설명하는 것. 그의 방식으로.

어느 여름날, 파도처럼 밀려와 기꺼이 빠져들었으나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끝난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에게 세계였고, 전부였다. 순간은 영원이었고, 함께하는 시간은 찰나의 영원이었다. 사랑이었다. 아닐 수 없이. 이유 없이. '그'라서, '그' 자체로 완전한 이유였기에.

p.213 내가 분명히 알았던 건 만나고 또 만나도 부족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고 말소리를 듣고 싶고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고 그와 함께 많은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밤이고 낮이고. 4,233,600초 동안 내내.


완벽한 관계는 없는걸까. 작은 균열은 순식간에 넘을 수 없는 선이 되어버리고, 딱 한 번, 오로지 단 한 번의 이별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그걸로 끝이었다.

마지막이 된 이름에 응답하지 못한 죄책감과, 터져나오지 못한 분노를 담아 그는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고자 한다. 그의 방식으로, 그와 '그'의 이야기로. 다른 이유는 없다. '그'였기에.

이 긴 글은 고작 치기어린 자기 위안에 불과할까. 살면서 한 번쯤 "재수가 없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섬세한 영혼을 흉내내는 풋내기의 자만에 가까울까. 혹은 미처 제대로 끝내지 못한 관계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서 나아가는 회복의 여정일까.

p.209 "약속할게." 내가 말했다. '오직 너를 위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자 멍든 입 위에 찢어진 입술이 포개지면서 우리의 맹세는 봉인되었다. 옛이야기 속 소년들처럼 손가락에 피를 내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잘 이별하기 위한' 애도의 과정이었을까. 미처 제 때 전하지 못한 인사를, 거부할 이유 없는 맹세를 마지막까지 지켜주고자 한 사랑이었을까. 그래. 패주고 싶은 마음, 믿을 수 없는 순간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다시금, 모든 관계에서 상실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통증을 수반하며, 잘 아물지 못한 상처는 오히려 덧나고 번져 오래도록 앓기도 한다. 잘 아무는 것이 중요하다.이야기는 지워지고 다시 쓰이기를 반복하고, 시간을 들여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독자는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 기록이다. 서사고, '잘 회복되기'를 시도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애도, 라고. 남겨진 사람이 남은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잘 보내주는 일, 딛고 서는 일. 부디 이 책이 닿는 모든 독자에게 끝나지 못한 '지금'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쓰이기를 바란다. 그 자신의 시간이, 삶이 남아있으니.

p.348 이것은 더 이상 현재의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는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것들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도서제공: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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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도둑 - 예술, 범죄,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마이클 핀클 지음, 염지선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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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도둑이 있다. 본격적인 절도 행위만 해도 최소 유럽 7개국, 약 200회에 걸쳐 300점 이상의 "물건"을 훔쳤고, 공식적인 자백만 해도 100건 이상이다. 도난품들의 가치는 가장 과소평가된 것만으로도 3,000만 달러(약 400억 원). 도저히 개인이 저질렀다고 믿기 어려운 규모다. 이 정도면 전문지식을 가진 범죄집단의 소행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세간을 경악케 한 범죄 행각에 최초로 선고된 형량은 4년. 규모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가벼운 처벌은 그의 죄목이 강도가 아닌 절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가능한, 적어도 통제불능한 절도광으로 변모하기 전에는, "물건"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려 애썼다. "장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기는 단 하나,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훔친 것은 예술품, 그것도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은 각국 박물관의 소장품이었다. 그는 "지극한 심미안"으로 선정한 목표물들을 "감옥"에서 구해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라 칭했다. 금전적 이득이 아닌, 오로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p.36 "박물관은 예술의 감옥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적이고 시끄러우며 관람 시간도 정해져 있고 자리도 불편하다. 조용히 생각하거나 쉴 만한 장소도 없다"


죄과를 논하기 전에,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림, 조각,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된 공예품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살아있는 동안 딱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 앞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마음을 빼앗겨 온 세계가 감동으로 차오르는 감각을 알고 있다면, 당신 또한 "도둑"에 공감하고도 남을지 모른다. 나 역시 도난된 예술품를 설명하는 장면마다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묘사에 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으니.

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에 얽힌 이는 최소 셋. 피고 본인과 그의 연인, 그리고 어머니.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담하고, 묵인했으며, 부추겼다. 피고, 브라이트비저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살아있는 예술, 그의 연인과 함께하는 낙원인 다락방에 처박힌 자신을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여겼다. 비록 '행복의 완성'은 "아름다운 예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혀진 절도품"이라 회고했지만.

p.152 브라이트비저는 산업혁명 이후 엔진과 전기의 발명, 그리고 대량 생산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수월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점차 보기 흉해졌고 (...)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기 직전의 시기에 인류 문명이 이미 아름다움과 기술 면에서 최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물건과 작품을 훔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지만, 한적한 마을의 작은 다락에서만은 멈추기를 희망한다.


앞서 말한 동조자, 모친은 아들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수집품"을 몽땅 내다버렸다. 그의 행동을 무분별한 예술품 파괴요 그 작품들의 가치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평생에 걸친 회피의 대가는 차치하더라도, 여기서 다시금 예술의 가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처분" 전후로 여러 사람에게 단순한 잡동사니로 간주된 것은 의외로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235-6의 "활용례"를 보라).

시작이야 유년기의 결핍이었든 잘못 자란 싹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는 극도의 이기심과 자아도취로 수많은 이들의 '감동'을 빼앗았으며 주체없는 절도와 수집 강박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작품들 중 일부는 영영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것은 파손이 아닌 파괴였다. 전자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기지만, 후자는 영혼이랄지 존중받아 마땅할 정수가 깡그리 무시되었기 때문에.

예술의 가치와 감상의 권리가 이렇게까지 혼돈 속에 뒤엉킨 적이 없었다. 그의 주장처럼 그간의 절도는 범죄가 아니라 구출에 불과했나? 도난과 경매로 이어져온 예술품 거래의 역사적 상례에 한 발 걸쳤을 뿐인가? 예술은 소유될 수 있는가? 온몸으로 감동을 느끼는 것과 "물건" 자체의 가치는 별개의 것으로 논해져야 하는가?

p.198 한때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브라이트비저였지만, 이때부터는 마치 사재기를 하듯 그저 무엇이든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 한때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를 따온 것 같던 두 사람의 다락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장이 되었다. 끝도 없이 물건이 줄지어 들어올 뿐인.


그를 수사한 예술품범죄수사관은 "박물관은 속세의 교회나 마찬가지라서 이런 곳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다"고, 피해 박물관장은 "금전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의미 자체, 그리고 물건과 장소 사이의 맥락"이라고 말했다.

읽기 전, "재미나고 요상하고 황홀한" 이야기라는 평을 들은 바가 있다. 과연 그랬다. 도둑과 수집가, 탐닉과 집착, 낭만과 광기를 오가며 빠져나갈 길 없는 파국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부디 박물관에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p.86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p.249 오래된 예술 작품은 시간 여행자 같은 존재라서 다락은 그저 정류장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훔친 작품들은 브라이트비저보다 세상에 더 오래 머물 것이다. "저는 잠시 맡아두었을 뿐입니다." 브라이트비저는 훔친 물건을 모두 돌려줄 계획이었다고 덧붙인다. "10년이나 15년, 20년쯤 지나서요." 그렇게 작품들은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었다.


*도서제공: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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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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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식간 허기를 달래거나 식후 마무리를 위해 조금씩 먹는 음식. 대체로 단 맛에 치중되어 요즘에 와서는 식사와는 별 관계 없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 그것, 에 의미를 두었던 게 언제적인가? 해가 갈수록 이전부터 썩 즐기지 않던 단맛이 숫제 고역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있어도 그다지,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로 여기게 되지 않았나.

이러나 저러나 인간사에 구복이 반이라. 맛의 즐거움, 맛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음미하듯 가만히 입안에 굴리다보면 마음이 술렁이고 묻어둔 이야기를 툭, 내뱉게 되지 않는가.

p.125 너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저 보통 수준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과 매 순간 맞대면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p.195 비로소 생각났다. 나는 자주 어머니의 속됨을 비꼬았고, 어머니는 내 다리를 비꼬았던 시절이. 나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무엇보다 불공정하다고 생 각했다. 속됨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다리는 내 의사와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에 알았다. 못된 것도, 이상한 성격도 절뚝거리는 다리처럼 타고난다는 걸.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알아도 바꿀 수 없다.


당황과 황당 그리고 충격, 미묘한 슬픔과 애증 비슷한 것을 지나 도달한 곳에서 독자는 해묵은 상처, 시간에 기대어 익어가는 마음, 미뤄왔던 끝, 어쩌면 뜻밖의 선택지를 마주할지 모른다. 보기 좋은 모양새 아래, 내내 모르는 척 미뤄뒀던 것을, 혀가 아린 단맛 뒤에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시큼하고 씁씁한 맛을, 입 안을 날카롭게 긁어내리는 단면을.

결국엔, 이를테면, 디저트는 추가제공 같은 존재다. 무심코 지나쳐버릴지도 모를, 한 번 더 주어진 기회같은 것이다. 어쩌면 즐거움을 위해, 살며시 딛고 건너가는 디딤돌처럼, 가끔은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을 위해. 이유야 어쨌건 모양새 자체는 사랑스럽지 않은가.

p.91 먹혀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어. 젤리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어,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줄은. (...) 그저 조금만 더 살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작고, 금방 먹힌다 해도 난 지금이 좋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이런 태도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p.116 그런데 젤리는 달콤하고, 사랑스럽잖아.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고. 게다가 빛을 받으면 투명해져. 나는 그렇게 투명하고 가뿐하게 살아본 적이 잘 없어서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빛 아래에선 투명하게 빛났다가 빛이 사라지면 다시 어두워지고, 빛이 투과하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투과하진 않고, 그런 점도 매력적이었어.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쓴 사람도 주제도 내용도 제각기인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 어쩌면 모두가 같은 것을 묻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잘 아는 삶에 기꺼이 잠겨들 수 있습니까? 어느 노랫말이 그러했듯 "내가 날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파삭, 하고 부서지는 것 아래를. 무섭지 않으냐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으냐고, 시고 쓰고 떫지 않냐고, 오래도록 다문 입이 쩍 벌어지고 베어문 맛이 달기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통증에 가까운 맛에 속을 게워내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148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p.151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눈을 보면서 나는 선영은 정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쩐지 불편해졌다. (...) 우리가 절교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선영과 내가 연주를 잘 몰랐던 것처럼, 선영도 나도 서로를 모른다고, 이제는 정말 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디저트의 본질은 이전의 것을 지우고 새로이 인상을 남기는 데에 있다. 그것이 들척지근하게 들러붙는 맛이든, 상큼하게 코끝에 맴도는 향이든, 무엇이든 간에.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해 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각기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박하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한 단편 다섯 편을 모았다. 소재로 불려온 음식들에 달콤하니 귀여운 내용을 짐작했다가는 필경 치미는 무언가에 입귀를 비틀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리라 장담한다. 어쩌면... 비명과 함께 덮어버릴 수도 있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p.171 괜찮아. 선영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녹기 시작했을 뿐이야.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서로의 혀를 바라보았다.

p.208 "간암이 꼭 한약 먹는다고 더 심해지고 그런 건 아니래. 속설이라더구나. 해나가 많이 알아봤어. 그렇다고 그렇게 무정하게 떠날 건 뭐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아. 이제 돌아오라고 하기엔 그곳의 삶이 있겠지. 잘 지내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건 알고 있으라고."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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