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그네 - 교유서가 소설
하명희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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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첫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들숨이다. 태아의 세계 전체를 짓누르던 압력에 쪼그라든 폐를 펴고 어린 짐승으로서의 첫 울음을 위한 그것. 생애 가장 힘찬 동시에 최초의 숨. 마지막으로 내뱉어질 숨을 예고하는.

물에서 태어난 인간의 익사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죽은 자의 폐에 남은 물이다. 숨 대신 물을 들이킨 흔적. 절박하게 들이마신 만큼 확실하게 '숨이 막혀' 죽었다는 증거.

사람은, 살아있는 자는 심장보다 높이 차오르는 물에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손을 머리위로 추켜올"린다(신철규, 〈심장보다 높이〉 중). 그 앞에서 살려달라, 도와달라, 이렇게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외침에 답할 수 없는 세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p.78 선생님은 사람이 사람을 버린다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선생님은 당신을 겁쟁이라고 했지만 내겐 선생님이야말로 외톨이로 보인 날이었다.


인간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 들이쉰 숨으로 살과 뼈를 울려 말하는 우리, 인간은 물 안에서 숨쉴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시원처럼 가득한 물을 지나 전달되기에는 너무도 연약하다. 무른 살과 부서지기 쉬운 뼈는, 짧은 삶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적이어야 한다지만,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게 내몰리는 사회에서 여전히 인간적인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사람에게,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p.82 "내가 던진 돌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죽어야 한다면 난 그런 건 못하겠다, 그때부터 겁쟁이가 된 거야." 선생님은 그날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다 "그래서 페북에서 무언가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경이로워"라고 했다. 당신이 못했던 것을 그들은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미안하다고도 했다.

p.114 나는 언제부터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걸까. 그가 입을 닫아버리곤 하던 순간에 그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텐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언어를 버리고 여기까지 온 걸까.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은 정답을 말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그저 있는대로 내보일 뿐이다. 숨막히게 두려운 시간이 있었다고, 어떤 순간은 평생을 살게 했다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너무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고, 차마 할 수 없는 말에 숨이 막혀 가슴만 쥐어뜯었다고. 우리가 이렇게나 서로를 알지 못했다고.

혹자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Homo homini lupus)"라는 말을 지상명제처럼 받드는 세상에서조차,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묻기 전에, 우리는 인간 자신으로서 무엇이어야 할지를 물어야 한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에, 그늘지고 비어버린 곳에서도 끝없이 소통해야 한다. 마주해야 한다. 말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숨이 닿아야 한다.

p.214 알았잖아. 알고도 모른 체하면 안 되지. 지금껏 그런 기억을 껴안고 살았다는 게, 남편이 아니라 내 아이가 그런 것처럼 가슴이 저리네. 얼굴은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야 할 것 같아.

p.225 핸드폰이 충전되자 긴급재난문자가 제일 먼저 뜨더라. 이걸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 하루에 한 번꼴로 사람을 찾는다는 문자가 행정안전부 산하 서울경찰청에서 오거든. 이번에는 실종이 아니라 배회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문자였어. 집을 나갔다가 얼마나 오래 들어오지 않으면 배회라고 할까.


하명희의 글은 이가 빠져 주저앉은 얼굴이나 세월에 흘러내린 피부 혹은 무거운 짐을 들 때처럼 숨을 흡, 참고 힘을 주기를 반복해 패인 주름같은 것이다. 흔적이 남은 삶에 대한 혹은 그 흔적 자체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부재에서 무게를 찾는다. 부재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 부재를 응시하는 존재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의 글이 남기는 족적은 함께 걸어온 흔적이다. 동정이 아닌 연민으로, 힘껏 잡아오던 손의 온기다. 귓가에 남은 웃음소리, 눈물이 오래도록 흐른 길이다. 두려워하고 연약한 생물의. 읽는 내내 속삭이던,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문장을 읽는다. 우리는 같아요.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적이지 않다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p.52 "내가 되돌아보니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여겼던 것 같아.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아저씨를 닮아가고 있더라. 아저씨는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친 어른이었던 거지."

p.87 선생님은 사람이란 게 원래 이렇게 소심하고 겁쟁이라고, 그것이 평생을 살게 한다면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소설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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