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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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는 오복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어디 치아뿐이겠냐만은, 먹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불분명한 출처에도 불구하고 진리처럼 전해내려온다. 인간사에 '먹는 행위'는 빠질 수 없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혹자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할 정도로.

안타깝게도 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탓에, 뭘 먹어도 그러려니, 여럿이 왁자하게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도 그 때뿐 하는 식이라 미식가랄지, 애주가랄지, 그런 아름다운 단어와는 영 연이 없다. 그렇다고 "소식좌"는 아닌지라 그저 식사를 일과 중 하나로 취급하는 '대충 먹음이' 정도랄까.

그와는 별개로 식사, 먹는 일은 하루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준비하고, 맛을 느끼고, 포만감이 다시 허기로 돌아올 때까지의 감각은 비단 순간의 집합이 아닌, 계절과 시간, 삶의 핵심을 구성하는 일종의 연속체라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p.61 단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단식은 식욕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단식 첫 날처럼 긴 하루는 없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이상하게 시간도 안 간다. 굶어보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먹는 일들을 중심으로 세세하게 구분되어 있는지 알게 된다.


분명 먹는 일은 중요하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꼭 한 입, 기억 속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겠다고 할 만큼, 한 번 물꼬가 터지면 그치 그치, 나도 나도, 아우성칠 만큼. 맛은 단순한 감각반응이 아니다. 미각에는 기억이, 혀에는 이력이 있다.

하다못해 신생아도 분유 맛을 가리는데, 수년간 먹고살아온 가닥이 쉬이 흩어질까. 그런 탓에 부먹이니 찍먹이니, 비냉이니 물냉이니, 콩국수엔 설탕이네 소금이네 하는 일들로 점잖은 사람마저 때때로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리는 게 아닌가. 비단 열띤 토론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p,139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p.162 가끔 견딜 수 없이 어떤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무언가가 몹시 먹고 싶을 때 '목에서 손이 나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내 목에서는 커다란 국자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당장 그 국물을, 바로 그 국물을, 다른 국물이 아닌 바로 그 국물의 첫맛을 커다란 국자로 퍼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지는 것이다.


누구나 기억 속의 음식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이지 "맛대가리 없는" 악몽으로, 누군가에게는 그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이의 눈빛으로,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수고로. 그것들은 쉬이 대체되지도, 잊히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맛은 비단 맛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음식은, 그 맛은, 기억이다. 삶을 지탱하는 중심이다.

이런 속성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 빠질 수 없는 자리를 앞두고 꼭 터져나오는 갈등이 있다. 본질은 '먹는 입 따로, 차리는 손 따로'에 기인한 문제다. 맛은, 음식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수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집밥, 손맛은 누군가에게 아련한 추억과 기쁨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고립과 노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괴리를 내포한 것이다.

p.164 늙은 '간순이'로서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음식의 맛에는 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적 작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첫맛이 주는 놀라움 속에는 어린 나를 동료처럼 존중해준 어머니의 '신뢰'라든가, 내게 맛있는 감자탕을 먹이고 싶어 한 남자친구의 '애정' 같은 마법의 조미료가 숨어 있었다.

p.183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식구, 함께 밥 먹는 사이. 함께 음식을 나누고 둘러앉는 사이라면 식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입'과 '손'이 따로 노는 현장은 백날 모여봤자 식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잘 먹고, 함께 준비하고 먹는 즐거움, 수고한 이에 대한 감사. 식구의 본질은 어쩌면 결혼도 안 하고 제사도 안 지내는 "콩가루"들이나 지켜지고 있는지 모른다.

... 라는 이상의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는 베테랑 술꾼의 "소주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난 기억을 따라 취해보자. 메뉴판 사이사이 안주 하나에, 사장님, 사장님! 여기 잔 하나 더 주세요!

p.5 인터뷰나 낭독회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p.206 태곳적 조상들이 명절을 기리고 기다렸던 이유도 이렇게 휴식과 충전, 감사와 즐김의 시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참뜻을 잊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의 참뜻은 소수 콩가루들의 삶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설은 지나갔고 추석은 언제 오나, 콩가루는 간절히 그때만 기다린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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