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신간이 나왔단다. 이제나 저제나 목 빼고 기다리던 그 책이 나왔단다. 포장을 뜯고 처음 보자마자, "너구나, 어서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아이를 맞이하듯이, 오래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을 반기듯이. 왜 하필이면 "너구나, 어서와"였을까. 일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라는 알듯말듯한 제목에 이어지는 내용은 과연 처절하다면 처절하고 거룩하다면 거룩할 일기였다, 기록이었다, 고백이었다, 신화와도 같았다.
읽는 내내 편치만은 않았다. 내도록 앗 이거? 싶은 요소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전혀 다른 내용들이 생각나 아예 노트를 가져다놓고 적어가면서 읽어야 했으니. 그게 다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대체 이게... 이게... 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고통, 이게 SF라고? 정말? 진짜로?를 외치게 만드는 묘사. 얼마 전에 느꼈던 생활밀착형 공포가 아악!! 으악!!을 외치면서도 실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할 힘을 얻게 했다면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차라리 르포르타주라고 해라, 기사라고 하는 편이 설득력있게 들릴 것이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2024년이라니요. 남 일이라고 우겨볼 수도 없는, 근미래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현재 아닙니까. 초판 출간이 1993년도였던 걸 감안하면 그 때 바라본 미래는 이렇게나 절망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냐는 말이 남아는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어쩌면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이래서는 안 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에서 한술 더 떠 '이것이 공정하고 옳다'고 제 목에 사슬 매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작중 대기업과 국가권력은 부패의 끝을 달리고, 어쩔 수 없이 눈앞의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이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존재한다. 작금의 현실을 보라. 과연 우리가 작중 빈민, 약탈자, 식인종을 비웃을 자격이나 있을지.
주인공 로런과 그의 가족은 장벽 안의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장벽은 전쟁이나, 재해나, 질병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약탈자, 장벽 바깥의 떠돌이, 모든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선이다. 총을 소지하지 않으면, 무리지어 다니지 않으면 살인을 비록한 범죄의 타겟이 되는 것이 일상인 세상, 물과 식량은 비싸고, 경찰과 소방관을 부르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 이동은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 자가용은 먼 옛날의 사치가 되어버린, 가난, 가난, 가난과 폭력과 혐오와 절도와 방화와... 그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 대개는 이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 엄청난 규모의 자연재해나 전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 먼 과거도 아니고 전쟁이나 재해의 탓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 노예제라고 하지 않을 뿐 다른 인종간의 결합과 고용주 없이 자립하는 것은 온갖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 세상에, 어떻게든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함께 살아남기를 원하는 그런 마을에, 주인공 로런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다.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물론 해가 지고 난 다음 외출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지만,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래를 그릴 수 조차 없지만, 심심치않게 약탈자가 들이닥치고 아이들도 어느정도 자라면 총기 사용을 당연시하는 그런 세상이지만 어쨌든 굶지 않고 죽지 않고 가족과 함께, 목사이자 교수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교사인 새엄마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일이 올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 삶 속에서.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실종과 마을의 붕괴로 처참히 무너진다. 비상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존가방을 챙기는 바람에 별종 내지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녀석 정도로 여겨지던 로런은 한순간에 재난과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다. 울 것 같은가? 좌절하고 신을 찾을 것 같은가? 그랬다면 이 거대한 이야기의 서막은 100여쪽 만에 끝나버렸겠지.
로런은 "초공감증후군" 질환자이다. 초능력이라고 하기엔 장애로 판정되는 그것으로 인해 로런은 하여금 타인의 고통을 내것처럼 느낀다. 마음이 아픈 정도가 아니다. 남을 다치게 하면, 죽게하면, 아프게 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보기만 해도 같은 통증을 느낀다. 앞서 말한 세상에서 최약체나 다름없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쾌감도 포함되지만 이런 세상에 쾌감보단 도처에 널린 게 고통이 아니겠는가. 작중 사회에서도 로런의 이런 증상을 추앙받을 능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생모의 마약 복용으로 인해 태중에서 얻은 질병-정도가 한계일 뿐. 혹자는 이를 망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마을사람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목사집 딸래미(...)에 걸맞지 않게 로런은 신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성경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가 가진 세상의 질서와 원리, 인간의 사명에 대한 신념은 작품 전체에서 이어지는 『지구종: 산 자들의 책』에서 드러난다. 그로 하여금 우리는 첫 장에서 이런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로런은 메시아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이들을 새로운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인가?' 잘 가지고 계십시오. 그 기대... 모 출판사에서 원작 번역서를 낸 『듄』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 지난 10월에 그 서막 분량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을 때 상영관을 나서는 관객의 반 정도는 "뭐야?"를 외쳤으니, 그것은 이 책과 이 저자의 전작들을 처음 접했던 독자들 또한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이번 작품도 실망시키지 않는 "뭐야? 뭐냐고??"의 외침이 될 것입니다.
2024년에서 시작해 2027년을 지나 그 이후를 기약하는 이 작품 전체에서 끈기와 생명력, 의지와 변화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주인공조차도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독자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며, 끊임없이 주저앉고 무너지며 잃고 또 잃는다. 무력도 지력도 어느 조건도 탁월하지 않다. 작가는 마치 대체 언제 반전이 일어날지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려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듯 하다. "그래서 뭐?"라고. 너 혼자 살아남으면, 불멸과 초월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이러한 메세지는 전작 『와일드시드』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가 있다. 읽는 이도 작가도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앞만 보고 가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당장에 쓸모없어보이는 기대와 신념 따위가 없이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는, 배척받고 채이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목숨이라서 변화하지 않고는, 살아남겠다고 이를 악물지 않고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만물의 영장도 지배자도 아닌 '지구종'일 뿐이라고. 차라리 호소에 가까운 문체로 말한다.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고통에,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그것이 장벽도 총도 자본도 심지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도 아니지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작가는 독자의 눈앞에, 발밑에, 코끝에 끈질기게 들이민다(썩 곱고 아름답게 보여주질 않아서 문제겠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대체 지구종이란? 생명이란? 이 바닥의 바닥같은 현실에서 우리가 간신히 바라고 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하라, 이 세계는 파괴로 시작해 생명으로 끝난다. 삶이 그렇듯이, 세상이 그렇듯이, 그것 하나만을 믿고 인간은 기꺼이 공감하고 연민하듯이.
이미 여러번 말한 적 있지만, 현실이 아닌 것을 다루는 작품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벗어나 창조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에 밀착될 수 밖에 없는 장르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지만. 의료민영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치솟는 물가, 민중을 적으로 두는 국가권력, 자본이 있으면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소유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착취가 대를 이어 승계되기도 하는 그런 사회, 그것을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한국은 그것과 다를 수 있는가. 판타지는 빠져나올 현실이 있어야 판타지로 남을 수 있다. 악몽은 깨어나 안도할 수 있는 현실이 있어 악몽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옥타비아 버틀러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의 작품이라 전작을 포함해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추천하지만, 다음과 같은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짧고 굵게 요점만 전달하기를 바라는 독자, 이른바 "사이다 서사"로 일컬어지는, 정의의 영웅이 모든 역경과 악을 물리치고 우뚝 서기를 바라는 독자, 주인공이 가진 초능력으로 모든 적을 물리치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독자, 주인공이 "멍청한" 동정심으로 곤경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
반대로, 끈질김의 미학을 아는 독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믿는 이를 믿고자 하는 독자라면, 대체 얘가 무슨 생각으로 죽을 길을 자처해 가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죽기 싫다고 울며불며 발악을 해도 결국은 차마 지나칠 수 없어 손을 내미는 주인공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신념이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믿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기꺼이 집어들 것이다.
내가 아는 옥타비아 버틀러는 "언니 다 죽여!"(물론 다 죽이는 캐릭터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 우리 편도 우리 언니도 아니다)가 아니라 생명과, 연민과, 공존의 가치를 믿는 작가이다. 그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의 의미를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제 발로 사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면에서 저자는 큰 그림을 보고, 먼 길을 가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을 절대 구원자, 초월자, 모든 것을 움켜쥐고 생사여탈권을 쥘 존재라고는 하지 않는 동행인이자 장대한 서사의 기록자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이자 우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심 반 공익 반의 마음으로 하는 추천.
아래의 소설들을 순서대로 함께 읽기를 권합니다.
1. 『씨앗을 뿌리는 사람』 (비채)
2.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3. 『당신이 남긴 증오』 (걷는나무)
4. 『태어난 게 범죄』 (부키)
5. 『와일드시드』 (비채)
6. 『킨』 (비채)
7. 『쇼리』 (프시케의숲)
8. 『경계선』 (문학동네)
9. 『블러드차일드』 (비채)
1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