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살리는 옷장 - 지속가능한 패션을 위한 고민
박진영.신하나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솔직히, 비건지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낫아워스라는 브랜드를 SNS에서만 봤지 큰 관심은 없었다. 첫째로는 옷이나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친환경", "에코", "비건" 재질 패션은 어쩐지 좀... 그렇잖은가 싶었다. 소수의 유행 잘 타는 사람들만 찾는 것 아닌가, 내구성도 떨어지고 디자인도 안 예쁘고 어쩐지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아니 편견으로. 그래서 SNS의 지인들이 신상품을 샀다거나 홍보를 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넘긴 적이 숱하다. 어느날 '아 이 가방 참 예쁘다. 보나마나 동물 가죽이겠지.'라고 생각하기 전 까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 때까지 순 착각이었고, 편견이었다. 내심 그래도 동물성 소재가 좋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으로 앞에서는 동물권을, 뒤로는 슬쩍 눈 감아오며 기만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에 대체 내가 지금까지 뭘 했던건가 싶더라. 관심없다는 핑계로 대충,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없는 셈 치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특가 세일", "기본템", "저렴한" 이라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매단 그 옷들은, 대체 원가가 얼마길래? 이 가격에 팔아도 이문이 남는다면 대체 이걸 만들고 유통한 사람들은 돈을 받긴 했다는건가? 환경에 덜 해로운, 해를 덜 끼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공정을 거치긴 한건가? 그 비용은 다 어쩌고? 대체 이건 무슨 돈으로, 어디에 비용을 떠넘겼길래 이 가격이 되어 한 철 입고 버리는 쓰레기가 되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p.36 "싼 물건의 가격에는 언제나 그 가격이 가능하도록 만든 보이지 않는 외부 비용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싼값으로 트렌디한 옷을 즐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제공한 값싼 노동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SPA브랜드며 인터넷쇼핑 광고에는 "신상"과 "잇템"이 쏟아져나온다. 환한 조명이 켜진, 널찍한 매장에 들어서면 수십수백벌의 옷이 사이즈별로, 종류별로 걸려있다. 이 많은 옷들은 대체 누가 다 사입고 다닌단 말인가? 2017년 기준으로 전세계 의류 소비량은 연간 6,200만톤에 이른다고 한다. 아니, 옷 한 벌에 무거워봤자 얼마나 된다고? 그 많은 옷은 "시즌템"으로 잠깐 입고 버려져 어디로 가는가? 역시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당연한 결과가 튀어나온다. 팔리지도, 재활용되지도 못한 옷은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도 쓰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 어딘가에 묻히거나 태워지거나 그저 던져지거나... 오물이 되어 어딘가의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절대로 내 근처, 내 집, 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하고도 뻔뻔한 확신이란. 그저 헌옷수거함에 휙 던져 넣으면 "불쌍한 사람"이 감사히 주워다 입고 사용할 것이라는 야비하고도 오만한 계산이란.
p.59 "패스트 패션의 옷은 판매된 후 1년 이내에 50퍼센트가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p.62 "많은 사람들이 '기부'라는 미명 아래 내가 안 쓰는 물건을 남에게 주어 처리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착각한다.하지만 진정한 기부는 쓸 만한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체모의 대부분을 잃었다. 생존과 멋을 위해 걸치는 것은 당연하게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털이라면 다른 동물의 것, 가죽이라면 역시 다른 동물의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가죽을 입고 태어난 인간이 다른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 입고 다닌다는 것이. 한때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모피를 최고급으로 치던 때가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이, 동물이 사람의 머리며 손가락, 발가락이 온전히 달린 가죽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지 않은가. 가죽은 동물의 피부다. 가죽은, 털을 제거한 모피다. 많은 사람들이 북극곰, 펭귄, 담비는 퍽 귀여워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멸종위기종을 보호하자는 표어는 수시로 내걸리며 그들을 형상화한 뱃지며 가방은 넘치게 팔린다. 그것들이 그들과 "덜 귀엽고" "덜 희귀한" 동물의 목을 조르고 살 곳을 빼앗고, 매일같이 뼈와 살을 발라내는 줄은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p.115 "물범, 바다코끼리, 북극곰, 판다 등을 위한 캠페인과 관련 굿즈는 언제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멸종위기종에 관심이 많지만 닭, 소, 돼지와 같은 흔해빠진 동물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p.116 "축산업과 가죽 산업 안에서 동물들이 받는 고통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늘린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환경보호, 종평등, 덜 해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늘 양쪽으로 시달린다. "그래봤자 우리는 이미 다 망했다"와 "이것저것그것은 누리고 고작 그정도만 해서 되겠느냐"면서. 탈진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런 말들이다. 개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동시에 무력감에 빠지는 것. 비건지향을 주장한은 이들의 대부분이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대기업의 쓰레기에 좌절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코"와 "친환경적"이라는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맥락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해봐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길이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래알 하나만큼의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고. 그 모든 노력과 용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나 한 명만큼, 하나의 일 만큼은 책임져야 한다고,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이 필요한 때라고, 저 멀리서 불이 번지는 숲이라도 하나의 씨앗을 심는 마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미미한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고. 어머니 대지, 방글방글 웃는 동물 같은 오래된 그림을 꺼내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며, 알 기회가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더는 안된다고, 물러설 곳이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는 생산자이 동시에 소비자라고, 한낱 생명인 동시에 크나큰 책임을 진 존재자라고.
p.144 "한 개인이 고민 끝에 깊은 자연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해 살아간다면 그것도 존경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러한 선택이 모두에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생산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도시가 된다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누가 그랬던가.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이라고.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만큼 이민자들의 도시인 곳이 있을까. 이방인들의 국가로 출발해 이방인들의 국가, 이방인들의 집합체가 된 곳, 그러면서도 이방인을 배척하는 곳. 이방인이란 무엇인가. 잠시 머무르는 자, "우리"가 아닌 자, 잠재적 위험요인, 침략자, 약탈자... 겉으로는 다를지언정 속내를 들여다보면 좋은 감정을 품은 단어는 아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동물은 낯선 것을 경계하기 마련이고 인간 또한 무리짓고 선을 긋는 동물이니. 배척은 습성이다. 사회적 규율로 차별과 배제를 차단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폭력을 향하는 본능이다.

이방인의 나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다섯 주인공이 뉴욕시 각 자치구의 화신이 되어 도시를 지킨다. 생각만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가 속한 곳 그 자체가 되어 수호한다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이 단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다중우주이론의 거대한 수식을 가져오지 않아도 쉽사리 상상해볼 수 있다. 다층적이고 환상적인 우주, 세계 간의 경합과 그 안의 이물질같은 인간.
각기 뉴욕시 내 다섯 자치구의 화신인 주인공들은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그러나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상류층이 아니라 이방인의 도시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유색인종, 혼혈, 선주민 그리고 비자를 원하는 불안정한 계약직 이민자들이 그 주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히 진정한 미국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이 환상문학에서 도시생성의 개념과 다중우주, 시공을 오가는 이야기를
p.420 "(전략) 특정한 장소에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충분히 발전시키면 모든 현실의 층들이 압축돼 변화하기 시작하지"

미국, 자유의 나라? 앞서 말했듯 이방인과 침략자의 나라? 원래 해본 놈이 더 잘 안다고,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표현의 자유를 가장한 혐오발언이 판치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의 그 Great America는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 경찰의 폭력성, 성소수자로 간주되는 유색인에 대한 백인-중산층의 혐오, 유대인과 소수자를 향한 온라인 루머와 반달리즘, 네오나치의 혐오발언과 폭력성, 위대한 엉클샘과 캡틴 아메리카 뒤에 숨겨진 추잡한 민낯이.
p.107 "경찰이 오는 중이래. 여태까진 대낮에 공원에서 마약을 빨든 다른 걸 빨아 주든 별짓을 다 하고 살았을지 몰라도 난 그런 짓거리를 참아 주려고 여기 이사온 게 아니거든? 너희 같은 놈들을 다 쫓아낼 거야. 한 번에 하나씩, 전부 다."
p.366 "마침내 나타난 경찰들은 브롱카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든다. 잘사는 집안의 착하고 순진해 빠진 백인 청년들이 갈색 피부의 히피 여자들이 운영하는 아트센터에 밤중에 몰래 들어와 잡힌 것뿐이니까."
현실을 그저 나열하거나 상상으로 도피하는 대신 날카로운 고발과 지적을 혐오와 차별을 사소하거나 당연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그저 나약하게 내몰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세대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가 나아갈 길과 진정한 도시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날카로운 지적과 더불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처럼. 매니, 브루클린, 브롱카, 파트미니, 아이슬린. 그들의 그들의 핏줄에 새겨진 긍지와 생존과 신념, 그러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도시와 인간들.

장편서사의 시작답게 분량의 반 가까이를 캐릭터와 세계관 설정에 할애하고 있으나 그 자체가 서사를 이루는 덕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훌훌 넘어가는 책장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워 재차 멈추고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이 책 하나만 가지고도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반대로 첫 권이 이정도면 대체 세계관 전체는 얼마나 거대할까-하는 생각에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기도 하다.
독특한 소제목과 챕터 또한 주목할만하다. 서막으로 시작해 각 장과 막간을 지나 코다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한 편의 무대극, 발레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SF와 이종족 전투물임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설레지 않을 수가 있나. 기성작가, 대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실험적인 작품 구성에 도전하는 모습에 독자는 그저 환호의 깃발을 흔들 수 밖에.(앗, 이것도 너무 군국주의스러운가?)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영상화를 기대해본 적이 있던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짜릿한 전투장면과 신랄한 비판이 시야를 꽉 채우는 화면과 귀를 울리는 사운드로 채워진, 실감넘치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작품이다. 전작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쌓아올린 기대가 전혀 무색하지 않은, 새로운 서사의 시작.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또다른 이방인이, 먼 곳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느날, 전대미문의 세계적 재난으로 인류의 반이 사망한다면? 나이, 신분 가릴 것 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간다면? 가난한 사람, 젊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손 쓸 겨를도 없이 숨이 끊어진다면? 익숙하다면 익숙한 소재다. 재앙, 인류절멸의 위기, 첨단과학과 자본으로 무장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 우리는, 적어도 여성은 이런 재난상황에 재난의 원인 외에도 한 가지 위험을 떠안게 된다. 약자로 전락하는 여성 신체. 여성을 포함하는 약자의 신체가 강자-약탈자-남성 존재에게 위협당하고 사회적 지위 또한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를. 그러나? 만일 그 재앙이 남성을 제거한다면? 전쟁과 같이 남성 간의 위계가 비일상적으로 공고해져 비-남성집단이 그 아래의 하층계급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집단이 한순간에 절멸 위기에 처한다면? 여성의 세상이 오는가?
처음의 질문의 다시 생각해보자. 어느날,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해 남성의 90%가 사망한다면? 나이, 경제적 계급을 가릴 것 없이 죽어버린다면? 극도의 여초사회가 도래한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이 소설은 이 도발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책 전체가 내용을 나타내듯,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의) 전부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수많은 여성의 이름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응급실에 내원한 한 환자의 급격한 상태 악화, 고열, 손 쓸 겨를도 없는 사망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전염병인가? 응급의 어맨더는 최근 입원기록을 확인하자마자 전염병을 의심하지만 사람 사는 일과 조직 돌아가는 꼬라지는 어디나 비슷하다지. 정부기관의 태도는 영 시큰둥하기만 하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안감, 그리고 기시감. 이것이 결코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저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공포. 독자는 아직 처음이니 가벼운 사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보겠지만, 분량이 어지간한 사전에 육박하지만 않았어도...... 재난영화의 문법이 대체로 그러하듯 사건 등장인물들의 태도 변화를 보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자 고통이다. 그 인물이 현실에 꺾이지 않으려 고군분투할수록 더욱.
최초보고자 어맨더의 앞에서 사망한 환자에 이어 전세계에 급속도로 유사한 증상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속출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 그 중에서도 XY염색체의 남성이다. 호흡기? 점막? 음식?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대유행에 부유층은 전염병 확산세를 피해 사유지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세상에서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 체감하던 위협의 범주가 역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출이 어려워지고, 접촉이 어려워지며, 각종 요직에서 비중이 줄어드는 것, 그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은 이미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 아닌가. 여성은 감정적이다. 여성은 연약하다. 여성은 비이성적이다. 여성이 대표를 맡는 것은 어색하다. 여성에게는 남성이 필요하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노골적으로 성적인 시선을 받거나 행동거지가 성적인 신호로 해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익숙하다면 익숙한 편견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근거가 무너진 세상에서 앞선 모든 편견과 위협이 남성에게 쏟아진다면? 그것 또한 익숙하고 당연하여 감내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현실이 되는가?

서술자로 구분되는 소챕터는 다양한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즐거움을 준다. 또한 앞서 말했듯 서술자 대부분이 여성이면서 동시에 기혼자이(었다 사별하게 되었)거나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그들에게도 소중한 가족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단순히 기존의 관계를 역전하는 데에서 그치는가, 이때다 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극이 펼쳐지는가, 아니면 돌봄과 애정, 관계에 대한 갈망과 밑바닥에서도 일어나는 의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결말까지의 여정에서 기꺼이 감수할 긴장과 즐거운 피로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남자들아 기죽지마라 그냥 죽어라"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집필된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대유행 전후의 세상을 소름끼치게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만일 이것의 정체가 페미니즘 소설이냐 묻는다면 당신이 묻는 "페미니즘 소설"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실제로 들었던 말처럼) "받은 대로 돌려준다니 너무 유치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럼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무엇이냐고 되물을테다.
시대반영부터 재난상황에 대한 인간의 유구한 아수라장, 젠더권력과 계급, 국가별 의료격차와 정치, 재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0호 환자"의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코로나 대확산 초기부터 지금까지 주욱 놓치고 있는, 언론이 생존자에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까지 아예 시리즈로 냈어도 무리가 없었겠다고 생각할만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지금은 괜찮으냐고, 이대로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생존자 혹은 남겨진 자가 된다면 그 이후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겠냐고. 바로 눈 앞에 도래한 현실을 계기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반복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재앙, 재난에 똑같은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저자 이름을 듣자마자 묘하게 익숙하더라니,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한동안 일본소설에 푹 빠지게 했던 그 와타야 리사다. 간질간질한 연애물도 얼굴에 절로 열이 오르게 하는 뜨거운 묘사도, 하다못해 해마다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 치정극(이라고 하기엔 팬들에게 너무한 단어 선택인가)에도 썩 흥미가 없었던 나를 앉은 자리에서 홈빡 빠지게 만들었던 그 이름, 와타야 리사.
그의 작품을 읽은 것도 꽤나 예전 일이라 "퀴어 로맨스"라는 홍보문구에 조금 시큰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BL은 만화든 드라마든 영화든 멋지고 화려한 청춘에 잘생긴 남자 둘이 붙어 이렇든 저렇든 행복해지는 것도 많은데 어떻게 된 게 여성애자만 나오면 어? 행복할 수가 없어! 백합? GL? 세기의 명작 "캐롤"을 보세요. 세기의 또다른 명작 "윤희에게"를 보세요. 나도 좀 행복하면 안되겠냐구! 운다 울어 정말. 사회고발 아니면 치정싸움, 그것도 아니면 둘이서는 행복할 수 없는 가슴아픈 이별!! 이런 것 좀 그만 보고 싶다고요!! 나도 좀 맘놓고 행복해져보자! 를 예. 내가 작가 이름에서도 좀 눈치챘어야 했는데. 응. 전작이 썩 말랑하기만 한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응. 냅다 읽어버려~!! 했던 내가... 천재였지. 후회라도 할 줄 알았나요? 그럴리가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떨어진 것도 주워먹는 게 여성애물인데 그럼.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좀더 청소년기의 미묘한 긴장감과 갈등, 관계를 다루었다면 이번 신작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는 제목처럼 꽤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내내'라니, 세상에, 이건 순애물일까? 아주 그냥 몹시도 상처를 주고나서 뒤늦게 후회하고 싹싹 비는 고백일까? 삑. 오답입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묘하게 싸한 맛으로 아슬아슬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작가가 약칭 등짝(...)에서 숨기지 못한 매운맛, 결말의 발길질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잘 다듬어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든 느낌이다. 시작부터 어른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돌아보고나니 그래 그 때 참 어렸지. 하는, 어떻게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그래야만 하는 인물들에 독자는 공감의 끄덕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일본 영화같은 느낌이다. 건조한 그림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 같기도, 표지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그대로 영화화 한 것 같기도 한 느낌. 다소 산만하거나 짧다고 느껴지는 각 장면들을 영상화해서 읽는 편을 권한다.
주인공 아이와 사이카는 각자의 남자친구와 여행지에서 처음 마주쳤다. 도도하고 냉정해보이는 미인 사이카, 귀엽고 싹싹한 아이. 첫만남부터 영 껄끄러웠다. 쟨 대체 뭐가 문제길래 말도 없고 단답에 사교성도 없어보이는지? 여기까지 읽고 아, 불편해... 라고 생각했다면 탈주가 너무 빠른 편이다. 참고 읽어보자.
남자친구 소우와의 관계는 순탄하고, 어쩐지 결혼까지도 자연스럽게 그려보게 되지만 자꾸만 마음이 간다. 불편하기만 한 첫만남을 지나 어쩐지 두 번 세 번 어울리다보니 사이카와는 친구가 되어있고? 그의 정체는 유명 연예인이었고? 그것도 놀라운데 이친구가 나를 좋아한다네? 나는 남자가 있는데?? 그게 문젠가요.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어도 편하지만은 않고, 자꾸만 나답지 않은 모습을 연기하게 되는 남자친구와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폭주기관차처럼 다가오는 여자,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신경쓰이고 잊혀지지 않은 그런, 여자. 초반부 아이의 태도는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눈치를 보고, 주변을 신경쓰고, 자기 마음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의 아이콘에 가깝다. 결국 졸지에 차여버린 소우가 안타까울 정도로.
결국 사귀는 사이가 되었지만 몸의 대화는 영 어색한 아이, 애매한 유명인에서 톱스타로 떠오른 사이카.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쉽기만 한가. 둘의 관계를 눈치챈 소속사와 사이카의 어머니는 갖은 협박과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둘을 갈라놓는다. 자기가 힘이 없어서, 사이카에게는 꿈이 있어서. 두 가지 이유로 잠시 떨어져있기로 결심한 아이는 소속사가 말한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사이카를 데리러 오겠다고 이별을 고한다. 과연 그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아무리 나만은 변함없는 마음이라고 해도 재회한 상대의 마음까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이건 사랑이 맞긴 한걸까?

섹슈얼스탠스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스릴에 가깝게 포착해 묘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몸의 대화는 피식과 포식에 가깝다는 진부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에서의 긴장감... 그것도 처음에 스릴러인 줄 알았지... 정말 무슨 일 내는 줄 알았다구. 그 기량이 어딜 가지 않는다. 앞서 우유부단의 아이콘이었던 아이가 여러 벽에 부딪히고 걸려넘어지면서 자기 마음에 누구보다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책임감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자리잡는 과정 또한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동안 자연스레 눈치채고 감동하게 된다.
앞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왜 여성애서사는 행복할 수가 없냐고 울부짖었지만, 따지고보면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예인에게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동성연애"가 흠이 된다는 것, 당당하게 드러내보이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 있다는 것, 믿고있던 가족마저 부정하고만 싶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현실의 많은 퀴어들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짠! 하고 행복해졌습니다~하고 끝내지 않고, 킨츠키처럼 깨어진 관계마저 더욱 아름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결국 우리의 청춘 또한 아름다웠고, 나는 너의 곁을 지킬 반려자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눈부시다고.
기실 젠더를 막론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게 사랑이고, 마냥 어릴 수만은 없는 어른의 로맨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그 자체는 남의 뜻대로 꺾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상품으로 취급되는 스타라도 나에겐 그저 너일 뿐이라고, 사랑이라고 작가는 피할 길을 주지 않으며 치열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끝끝내 묻는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 사랑이라 불러야 하죠?"(p.265)라고. 사랑이라고.

사실 온라인 서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서도, 한 번으로는 모자라 몇 번을 거듭 읽고 나서도 사실 얼떨떨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이거, 이런거 이젠 정식 출판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인가? 만화나 웹소설이나 개인 출판이 아니고 정말로 서점에서 고를 수 있는 그런 책으로 나와도 되는 내용이 맞나?
나는 자라나던 대부분의 시간을 퀴어의 ㅋ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숨기기에 급급하거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했다. 그런 게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로 나오다니, 이렇게 익숙하기까지 한 서사로 나오다니, 다른 연애물과 다를 바 없는 사랑이야기로 나오다니. 지금까지도 작가에 대한 걱정 반, 고마움 반의 복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자기 행복을 찾는, 완벽하고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모든 순간에 살아가는 누군가에겐 이런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다. 나를 포함해서.
"세월이 흘러도 끝없이 차오르는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오래 만나지 못해도, 마음의 결이 달라져도, 상대의 감정이 어떻든 아무래도 계속되는 그런 관계"를 그리며, 아련하고 찬란한 청춘들에게, 지나온 청춘에 자리했던 무수한 사랑들에게 이 말을 전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신간이 나왔단다. 이제나 저제나 목 빼고 기다리던 그 책이 나왔단다. 포장을 뜯고 처음 보자마자, "너구나, 어서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아이를 맞이하듯이, 오래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을 반기듯이. 왜 하필이면 "너구나, 어서와"였을까. 일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라는 알듯말듯한 제목에 이어지는 내용은 과연 처절하다면 처절하고 거룩하다면 거룩할 일기였다, 기록이었다, 고백이었다, 신화와도 같았다.
읽는 내내 편치만은 않았다. 내도록 앗 이거? 싶은 요소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전혀 다른 내용들이 생각나 아예 노트를 가져다놓고 적어가면서 읽어야 했으니. 그게 다라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대체 이게... 이게... 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고통, 이게 SF라고? 정말? 진짜로?를 외치게 만드는 묘사. 얼마 전에 느꼈던 생활밀착형 공포가 아악!! 으악!!을 외치면서도 실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할 힘을 얻게 했다면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차라리 르포르타주라고 해라, 기사라고 하는 편이 설득력있게 들릴 것이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2024년이라니요. 남 일이라고 우겨볼 수도 없는, 근미래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현재 아닙니까. 초판 출간이 1993년도였던 걸 감안하면 그 때 바라본 미래는 이렇게나 절망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냐는 말이 남아는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어쩌면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이래서는 안 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에서 한술 더 떠 '이것이 공정하고 옳다'고 제 목에 사슬 매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작중 대기업과 국가권력은 부패의 끝을 달리고, 어쩔 수 없이 눈앞의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이도 있지만 최소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존재한다. 작금의 현실을 보라. 과연 우리가 작중 빈민, 약탈자, 식인종을 비웃을 자격이나 있을지.

주인공 로런과 그의 가족은 장벽 안의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장벽은 전쟁이나, 재해나, 질병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약탈자, 장벽 바깥의 떠돌이, 모든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선이다. 총을 소지하지 않으면, 무리지어 다니지 않으면 살인을 비록한 범죄의 타겟이 되는 것이 일상인 세상, 물과 식량은 비싸고, 경찰과 소방관을 부르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 이동은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 자가용은 먼 옛날의 사치가 되어버린, 가난, 가난, 가난과 폭력과 혐오와 절도와 방화와... 그 모든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 대개는 이런 세상이 도래하기 전 엄청난 규모의 자연재해나 전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 먼 과거도 아니고 전쟁이나 재해의 탓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 노예제라고 하지 않을 뿐 다른 인종간의 결합과 고용주 없이 자립하는 것은 온갖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 세상에, 어떻게든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함께 살아남기를 원하는 그런 마을에, 주인공 로런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다.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물론 해가 지고 난 다음 외출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지만,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미래를 그릴 수 조차 없지만, 심심치않게 약탈자가 들이닥치고 아이들도 어느정도 자라면 총기 사용을 당연시하는 그런 세상이지만 어쨌든 굶지 않고 죽지 않고 가족과 함께, 목사이자 교수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교사인 새엄마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일이 올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 삶 속에서.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실종과 마을의 붕괴로 처참히 무너진다. 비상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존가방을 챙기는 바람에 별종 내지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녀석 정도로 여겨지던 로런은 한순간에 재난과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다. 울 것 같은가? 좌절하고 신을 찾을 것 같은가? 그랬다면 이 거대한 이야기의 서막은 100여쪽 만에 끝나버렸겠지.
로런은 "초공감증후군" 질환자이다. 초능력이라고 하기엔 장애로 판정되는 그것으로 인해 로런은 하여금 타인의 고통을 내것처럼 느낀다. 마음이 아픈 정도가 아니다. 남을 다치게 하면, 죽게하면, 아프게 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보기만 해도 같은 통증을 느낀다. 앞서 말한 세상에서 최약체나 다름없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쾌감도 포함되지만 이런 세상에 쾌감보단 도처에 널린 게 고통이 아니겠는가. 작중 사회에서도 로런의 이런 증상을 추앙받을 능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생모의 마약 복용으로 인해 태중에서 얻은 질병-정도가 한계일 뿐. 혹자는 이를 망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마을사람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목사집 딸래미(...)에 걸맞지 않게 로런은 신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성경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가 가진 세상의 질서와 원리, 인간의 사명에 대한 신념은 작품 전체에서 이어지는 『지구종: 산 자들의 책』에서 드러난다. 그로 하여금 우리는 첫 장에서 이런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로런은 메시아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이들을 새로운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자인가?' 잘 가지고 계십시오. 그 기대... 모 출판사에서 원작 번역서를 낸 『듄』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 지난 10월에 그 서막 분량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을 때 상영관을 나서는 관객의 반 정도는 "뭐야?"를 외쳤으니, 그것은 이 책과 이 저자의 전작들을 처음 접했던 독자들 또한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이번 작품도 실망시키지 않는 "뭐야? 뭐냐고??"의 외침이 될 것입니다.

2024년에서 시작해 2027년을 지나 그 이후를 기약하는 이 작품 전체에서 끈기와 생명력, 의지와 변화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주인공조차도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독자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며, 끊임없이 주저앉고 무너지며 잃고 또 잃는다. 무력도 지력도 어느 조건도 탁월하지 않다. 작가는 마치 대체 언제 반전이 일어날지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려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듯 하다. "그래서 뭐?"라고. 너 혼자 살아남으면, 불멸과 초월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이러한 메세지는 전작 『와일드시드』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가 있다. 읽는 이도 작가도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앞만 보고 가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당장에 쓸모없어보이는 기대와 신념 따위가 없이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는, 배척받고 채이고 언제 꺼질지 모르는 목숨이라서 변화하지 않고는, 살아남겠다고 이를 악물지 않고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만물의 영장도 지배자도 아닌 '지구종'일 뿐이라고. 차라리 호소에 가까운 문체로 말한다.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고통에,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그것이 장벽도 총도 자본도 심지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도 아니지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카드라고 작가는 독자의 눈앞에, 발밑에, 코끝에 끈질기게 들이민다(썩 곱고 아름답게 보여주질 않아서 문제겠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대체 지구종이란? 생명이란? 이 바닥의 바닥같은 현실에서 우리가 간신히 바라고 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하라, 이 세계는 파괴로 시작해 생명으로 끝난다. 삶이 그렇듯이, 세상이 그렇듯이, 그것 하나만을 믿고 인간은 기꺼이 공감하고 연민하듯이.
이미 여러번 말한 적 있지만, 현실이 아닌 것을 다루는 작품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벗어나 창조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에 밀착될 수 밖에 없는 장르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지만. 의료민영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치솟는 물가, 민중을 적으로 두는 국가권력, 자본이 있으면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소유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착취가 대를 이어 승계되기도 하는 그런 사회, 그것을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한국은 그것과 다를 수 있는가. 판타지는 빠져나올 현실이 있어야 판타지로 남을 수 있다. 악몽은 깨어나 안도할 수 있는 현실이 있어 악몽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옥타비아 버틀러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의 작품이라 전작을 포함해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추천하지만, 다음과 같은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짧고 굵게 요점만 전달하기를 바라는 독자, 이른바 "사이다 서사"로 일컬어지는, 정의의 영웅이 모든 역경과 악을 물리치고 우뚝 서기를 바라는 독자, 주인공이 가진 초능력으로 모든 적을 물리치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독자, 주인공이 "멍청한" 동정심으로 곤경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
반대로, 끈질김의 미학을 아는 독자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믿는 이를 믿고자 하는 독자라면, 대체 얘가 무슨 생각으로 죽을 길을 자처해 가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죽기 싫다고 울며불며 발악을 해도 결국은 차마 지나칠 수 없어 손을 내미는 주인공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신념이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믿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기꺼이 집어들 것이다.
내가 아는 옥타비아 버틀러는 "언니 다 죽여!"(물론 다 죽이는 캐릭터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 우리 편도 우리 언니도 아니다)가 아니라 생명과, 연민과, 공존의 가치를 믿는 작가이다. 그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의 의미를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제 발로 사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면에서 저자는 큰 그림을 보고, 먼 길을 가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을 절대 구원자, 초월자, 모든 것을 움켜쥐고 생사여탈권을 쥘 존재라고는 하지 않는 동행인이자 장대한 서사의 기록자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이자 우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심 반 공익 반의 마음으로 하는 추천.
아래의 소설들을 순서대로 함께 읽기를 권합니다.
1. 『씨앗을 뿌리는 사람』 (비채)
2.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3. 『당신이 남긴 증오』 (걷는나무)
4. 『태어난 게 범죄』 (부키)
5. 『와일드시드』 (비채)
6. 『킨』 (비채)
7. 『쇼리』 (프시케의숲)
8. 『경계선』 (문학동네)
9. 『블러드차일드』 (비채)
1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