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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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떤 이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또다른 이는 이렇게 기억한다. 단단하고 외로워 보이는 사람. 그가 속한 곳의 관리자들은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매사에 좋게좋게, 비위 맞춰가며 유도리있게 넘어가질 못하다고 뒷말이 오갔을 터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삶이 있다. 그가 디뎌온 길은 또다시 험하고 거칠어 그 존재조차 쉽사리 알아채지 못하는 선택지가 될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고마운 줄도, 고생스러운 줄도 모를 것이다. 명성 높은 책에 이름을 남기지도, 높은 자리에 올라 선망을 자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기억될 것이다. 기나긴 시간 어느 한켠에 머무른 다정으로,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한 외침으로, 느리고 더디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 불씨처럼. 그래, 불씨처럼.


누구나 사회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도 없고, 한번쯤은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이다. 직업과 노동의 가치는 단순히 돈을 벌고 삶을 영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삶도 있겠으나... 사람은 돈만 있다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 하고자 하는 일의 가치.

인간성이 마모된다는 것은, 신념을 내버리고 부패에 가담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은 대체,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차마 무엇으로 말해질 수 있는가.

온 힘을 다해 지켜내는 것,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안간힘을 쓰는 것,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지켜내는 것, 두려움과 치욕에 떨면서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것. 윤옥은 그것을 알고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한다. 휘청일지언정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이 존엄이 아니면, 신념이 아니면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삶이 온전히 떳떳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 또한 수많은 시간을 가해자이자 방관자로 살아왔다. 말해지지 않은 것은 더욱 무수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윤옥의 인간됨을 희망할 수 있다.

그가 번민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손 내밀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떄문에, 넘어지고 주저앉은 이를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아주 나중이 되어서라도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도 살고싶어요, 가 죽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살아갈 거예요, 가 되는 것. 희미하고 약한 것이 꺼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끌어안고 세상의 눈보라를 맞아내는 것을 숭고가 아니면 무엇으로 부를 수 있는가.


영광은 신에게도 권세에도 있지 않으니. 사람이 곧 영광이다.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신념이다. 인간성을 포기하기를 강요당하는 자와 함께 서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와 내가 같은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곧 존엄의 증명이다. 사랑하는 일, 기꺼이 껴안고 품고 아끼는 마음이 곧 사람됨이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변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끝내 고독할 것이나... 이름 모를 새와 풀씨가 그러하듯 또다시 누군가가 찾아와 무언가를 남기고 갈 것이다. 머무른 흔적, 깨지고 부서져서는 안 되는 것, 잊혀질 수 없는 것.

나는 그것을 신념이라고 부른다. 존엄이라고 한다. 뿌리채 뽑혀 흔들릴지언정 사그러질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는 언제 어느때고 끊임없이 존재할 것임을, 오직 그것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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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됩니다 - 아깽이에서 성묘까지 40마리 고양이의 폭풍성장기
이용한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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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야기장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어린 고양이가 길에서 살아남아 성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띠지만 봐도 눈물이 왈칵 난다. 몇 년쨰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면서도 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본 적은 손에 꼽는다.

한두살이나 되어 겨우 고양이 꼴 좀 갖췄다 싶은 정도면 또 모를까. 십여 년을 너끈히 사는 동물인데도 반 남짓 간신히 살아내는 경우만 해도 또다시 손에 꼽는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각 장 첫머리마다 이름 붙여진 사진들을 보며 얘는 누굴 닮았고 쟤는 이름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하나하나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한 마리씩 풀어놓는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고양이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고양이에게도 좋고 싫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들 또한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p.222 고양이 숲이 있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고양이 숲이 있다. 오직 고양이만 이 숲의 주인이다. (…) 그러나 당신은 모르는 게 좋다. 그래야 앞으로도 계속 고양이 숲은 고양이 숲으로 남을 테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어린 녀석들을 제 새끼처럼 품어 기르기도 하고, 애진작에 영역 찾아 떠났어야 할 놈이 제 남매와 그 아이들을 지켜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생판 남을 엄마처럼 따르는 아기들에게 수컷이라 나올 리도 없는 빈 젖을 물려주기까지 한다.

배 곯고 편히 자기만 해도 낮에는 꽃구경이며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눈이 오는 날에 웅크려 쉬거나 눈밭을 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한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반가워 뒹구는가 하면 멀찍이 앉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저희들끼리도 친한 고양이와 익숙한 사람이 다르다. 고양이도 그렇다. 고양이에게도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다. 그들 또한 살아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p.302 언제 어디서나 명랑하고 쾌활한 고양이. 하지만 녀석은 자라면서 특유의 껄렁함과 장난기를 잃고, 자신감마저 잃어버렸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야박한 곳인지 녀석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이야기 첫머리마다 반복되는, 사진 아래 한 마디. “이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됩니다”. 한 마리씩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신기할만큼 고대로 자랐구나 싶은 녀석도 있고, 그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영판 다른 고양이가 되었는가 황당한 아이도 있다.

그저 애틋하고 내가 기억하는 아이들이 그리워 울었다. 정 붙어 사람 무서운 줄 모르다 해코지라도 당할까 이름 한 번 불러주지 못한 아이들이, 어딘가에 살아만 있으라고, 건강하기만 하라고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마다 생몰년으로 추정되는 연도가 적혀있는데, 사람이 돌보고 살핀 아이들에 비해 겨우 밥이나 챙길 수 있었던 아이들의 수명이 눈에 띄게 짧다. 살기만도 힘든 삶, 사람이 부러 끊어놓는 목숨이 허다하다. 이제는 그 핑계며 수법에도 이골이 났다. 잔인하다. 지독하게 잔인하다. 산 목숨 끊어놓는 일이 너무도 쉬워 소름이 끼친다.

p.311 사실 무수한 고양이들이 질병과 배고픔의 고비에서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해 별이 되곤 한다. 모든 성장한 길냥이는 무사히 성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겨울이 온다. 이 계절이 지나면 또 아는 얼굴이 몇은 사라지고 꽃이 피고 땅이 녹으면 모르는 얼굴이며 갓 태어난 녀석들이 차례로 찾아올 것이다. 또다시 자라 어른이 되어주기만 한다면, 태어난 세상에 환영받지는 않아도 저희끼리 즐겁기라도 한다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살아준다는데, 살릴 수 있다는데, 그 앞에서 숨막히는 더위와 살을 에는 바람 따위는 고생도 아니다. 그렇게 오늘도 밥이며 물을 싸안고 나갈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할게. 그런 마음으로 매번 같은 인사를 남긴다. 또 보자 우리. 오래 보자. 내일도 다음 주에도 내년에도 계속 보자. 부디 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볼 수 있기를. 그저 그뿐이다.

p.206 아무것도 아닌 삶은 없다.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관심 밖에서 소외된 묘생을 사는 고양이도 고양이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고양이도 고양이로서 온 힘을 다해 산다.

#이아이는자라서이렇게됩니다 #이용한 #이야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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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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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시작부터 환장이다. 한 집에 사람이 넷, 정치성향도 넷. 다당제 국가에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애석하게도 배경이 한국인지라 대체로 타협 불가능한 대립 관계에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서로 죽이네 살리네 악을 써도 매일같이 부대끼는 가족은 그러기도 어려운 현실이라, 사랑하는 내 가족의 강경 지지 발언 내지는 허위사실 유포에 울화통이 터지는 게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별거냐. 하루가 멀다하고 “너 이자식 당장 나가!” “노망이 났어 아주!” 같은 싸움판만 벌어지지 않아도 반은 성공이다.

지난 대선 이후, 가족 꼴이 말이 아니다. 아들은 집을 나갔고 그 발단은 아버지가 얼굴에 핸드폰을 집어던졌기 때문이며 또다시 그 발단은 아들의 밥상머리 욕설이었고 그것의 발단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색 대립이었다... 남은 건 어머니의 아군, 든든한 딸 뿐인데, 세상에, 결혼을 한다네. 커밍아웃과 국제결혼 통보를 한 방에. 죽겠어요. 피곤해 죽겠어요.


각자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애는 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치졸함과 도덕심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나간다. 서로의 고민을 대신해줄 방도는 없으니. 달라지려고,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 결과는 실망스럽기도, 예상치 못한 행복이기도 하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읽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언제 그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물어뜯다 파국을 맞이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잔잔하게 흘러가는 씁쓸하다. 이 또한 신념에 따라 서로를 죽일듯이 미워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아닌가.

p.107 방금 전까지 고막을 때려대던 소음의 공중전은 잠시 멈춘 듯했다. 모든 배경이 지워지고 지상에 엘리사와 둘만 남았다. 판타지의 공간은 순간이면서 영원이다. 엘리사와 하민, 둘은 방금 앨리스의 토끼 구멍으로 빠져나온 게 분명했다. 페스티벌은 역시 페스티벌이다.

p.128 "요새 누가 오십을 노인이래? 육십도 노인 아니야. 얘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말 쉽게 하네. 너 오십 되고 나서 누가 노인이라 그래 봐. 기분 좋겠니?"


어쩐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잔잔한 영화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단 모두가 지극히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제법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는 점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베테랑 기자이면서 ‘진보적 스탠스’를 고수하고자 노력하는 어머니,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아들(특: 집나감), 화해 도모 식사자리에서 커밍아웃에 국제결혼까지 한 방에 해치우는 딸, 운동권 출신 전직 교수 아버지... 설정만 봐도 멀찍이 떨어져 앉고 싶은 이 가족이 “현실”에서 화목할 가능성이 몇이나 될까.

p.169 딱히 누구 들으란 것도 없이 제각기 통성기도하듯 소리를 질러대는 세 사람이 삼키는 폭탄주에는 서로 다른 또는 같은 성분들이 들어 있었다. 사라진 꿈, 깨진 가족, 오지 않는 기회, 안정에 대한 욕망과 안정에 대한 두려움, 동경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 곧 지나가 버릴 젊음.

p.250 이걸 건너갈 수 있을까. 이걸 메우는 게 가능할까. 당장은 아니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메워질 수 있는 골인가. 갑자기 이 사회에 대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멋대로 전위적인 내용을 기대한 탓일 수도 있고, 전작의 인상을 깊게 간직했기에 다른 작품임을 유념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어쨌든간에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선거 이후의 삶이 남아있으며,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치 구호 뒤에는 사람이 있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폭력이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도, 당장 “못배운 놈”이 “집값 떨어트리는 꼴” 보기 싫어 차악을 뽑았다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다.

부디 작가가 긴긴 삶을 멀리멀리 내다보았기를, 그리고 어딘가의 독자들 또한 희망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를, 그리하여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최악이 아닌 미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p.316 "사람이 어떻게 되면 등뼈가 부러질까요. 자꾸 그 생각이 나요."

p.329 "나는 사람들 상식을 믿어. 부지런히 하루하루 살면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세상이 이상한 데로 가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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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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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왜 사랑하는 것들은 나를 울리나... 사랑하는, 사랑을 하는, 내가 혹은 나를 사랑하는. 애정을 갖는 것, 마음을 빼앗기고 고통마저 끌어안도록 하는 그것은 어쩌면 운명에 새겨진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다.

사랑! 참 이상한 것이다. 대단찮은 이유에 모든 인생을 걸게 하고, 다시 없을 운명적 만남이라 생각했던 이가 한때의 착각에 불과한 허깨비가 되기도 한다. 오로지 사랑이라고 믿는 마음 하나 때문에.

사랑에는, 설령 자기 자신을 향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둘 이상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것. 그러나 사랑의 종결에는 변심 혹은 존재의 소멸이랄지, 아무튼 사랑의 관계를 부수고 나가버리는 단 하나의 이탈만이 필요하다.

p.330 결정적인 순간들 이후 우리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난도질 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대체로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나 사랑의 기억이 삶을 무너뜨린 시간에 이어져있다면, 때문에 스스로가 차마 마주할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에 절망에 몸부림치다 끝내 도망쳐버리기를 택했다면, 차마 함께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1차대전 이후 파국에 치달아버린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빛바랜 사진처럼 흘러간 시간 속 풍경에는 누군가가 뜨겁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웃음짓는 이들이, 세상을 물들이는 사랑으로. 그것이 무너뜨린 세상을 오직 그것 하나로 버텨내거나 혹은 무너지지도 못해 지워버리기를 택하며.

p.193 당신은 영국인인 나를 경멸한다, 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끈질기게 나를 강타하며 사라지길 거부했다. 영국인들이 당신 집에 불을 지르고 당신 가족을 파괴했다. 당신 어머니가 스스로에게 불러온 죽음은 그 비극의 일부였다.


당신은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나의 유년이고 마지막으로 온전했던 기억이다. 모든 것이 비명과 잿더미로 사라진 지금, 기억은 악몽이 되고 돌아갈 곳은 폐허가 된 지금 나의 사랑은 곧 고통, 그것도 차마 마주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러니 당신의, 나의 사랑을 부숴버리지 않고서는, 나의 세계 전부를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나의 사랑은 죄책과 파멸이었다고, 차마 용서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속죄조차 바라지 못하는 나를 끝내 용서하지 않기를.

p.168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읉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꼐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소개와는 다르게 사랑은 재앙의 씨앗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의 많은 이들이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무너져버리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택했다.

먼지 쌓인 시간의 반짝이는 기억들,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 끝내 끌어안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 울게 하소서, 슬퍼하는 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었으니. 무너진 땅에도 잊혀져가는 사랑이 있으니. 때로 순간의 기억은 평생을 살게 하나니.

p.262 난 당신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려 애썼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난 지금 나의 선택을 당신이 비난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우리 둘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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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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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싶지도, 저자의 경험담에 나의 과거를 덧씌워보고 조금의 차이도 없음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들었던 말들에, 그가 맞닥뜨렸던 일들에, 그가 부정하고 괴로워했던 나날들에 내 것을 겹쳐보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고 싶다.

나도 속 편하게, 그의 나날들에 눈시울을 훔치며 감동섞인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생존기가 아니라 영웅담, 멋진 극복 서사로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무슨 환상 소설이라도 읽듯 내 얘기가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럴 수 없다.

p.162 시스 이성애자 배우들이 퀴어나 트랜스 인물을 연기하고 추앙받는 모습을 보면 혼란스럽다. 그들이 수상 후보로 지명되고, 상을 받으면, 사람들은 “정말 용감하네요!”하고 감탄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을 부자연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단지 나 아닌 모든 사람들, 세상과 맞지 않을 뿐이다.

들켰다간 말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보며 자랐을 뿐이다. 농담처럼 오가는 혐오에 익숙했을 뿐이다.

학급활동 시간에 이름부터 학번까지 다 적어 걷어가는, “불순동성교제를 하는 학생의 이름을 적어 내시오”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를, 아무도 나의 다름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p. 163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인다.”


몇 차례의 아웃팅으로 지난 시간의 인연들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든지 “아랫도리에 뭐가 달린”거냐든지... 스스럼없이 묻는 사람이 수두룩했을 뿐이다. 혐오발언과 폭력에 양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먼저 보냈을 뿐이다. 연애며 결혼 따위를 묻는 자리에서 거짓말하는 데에 익숙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나... 세상은 변했다고 한다. 여전한 구석이 있는데, 아니, 조금 달라지고 대체로 여전한 곳인데.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달라졌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전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용기에 빚졌기 때문에, 나는 안다. 혼자가 아님을. 미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p.111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두려움인지 역겨움인지 모를 감각에 속이 울렁거려 수차례 혀를 깨물어가며 읽어야 했다. 알아, 나 이거 알아. 나는 숨어있기에도 급급해 작은 옷장 속 나의 고통에도 그렇게 버거웠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 있었을까.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는 나인지, 이상한 내가 살아가는 세계인지, 애초부터 ‘멀쩡’하고 ‘정상적인’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 이제는 따져보기를 포기했다. 잘 살면 됐다.

지금 여기, 세상의 어딘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당신’에게 전한다. 잘 살면 됐다. 살아있기만 해도 고맙다. 눈을 감고 걸어나와,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다. 열쇠는 주머니에 있으니, 지금이 아닐 이유가 없으니, 태어나 사람이니, 우리 모두는 살아가자. 행복하게.

p.173 “열쇠는 내 주머니 속에 있어, 내가 나 자신한테 늘 하는 말이지" 드루 베리모어가 한 말이었다. "확신이 없고, 망설여지고 겁이 나는 순간이면, 나는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그냥 떠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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