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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시작부터 환장이다. 한 집에 사람이 넷, 정치성향도 넷. 다당제 국가에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애석하게도 배경이 한국인지라 대체로 타협 불가능한 대립 관계에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서로 죽이네 살리네 악을 써도 매일같이 부대끼는 가족은 그러기도 어려운 현실이라, 사랑하는 내 가족의 강경 지지 발언 내지는 허위사실 유포에 울화통이 터지는 게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별거냐. 하루가 멀다하고 “너 이자식 당장 나가!” “노망이 났어 아주!” 같은 싸움판만 벌어지지 않아도 반은 성공이다.
지난 대선 이후, 가족 꼴이 말이 아니다. 아들은 집을 나갔고 그 발단은 아버지가 얼굴에 핸드폰을 집어던졌기 때문이며 또다시 그 발단은 아들의 밥상머리 욕설이었고 그것의 발단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색 대립이었다... 남은 건 어머니의 아군, 든든한 딸 뿐인데, 세상에, 결혼을 한다네. 커밍아웃과 국제결혼 통보를 한 방에. 죽겠어요. 피곤해 죽겠어요.
각자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애는 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치졸함과 도덕심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나간다. 서로의 고민을 대신해줄 방도는 없으니. 달라지려고,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 결과는 실망스럽기도, 예상치 못한 행복이기도 하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읽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언제 그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물어뜯다 파국을 맞이할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잔잔하게 흘러가는 씁쓸하다. 이 또한 신념에 따라 서로를 죽일듯이 미워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아닌가.
p.107 방금 전까지 고막을 때려대던 소음의 공중전은 잠시 멈춘 듯했다. 모든 배경이 지워지고 지상에 엘리사와 둘만 남았다. 판타지의 공간은 순간이면서 영원이다. 엘리사와 하민, 둘은 방금 앨리스의 토끼 구멍으로 빠져나온 게 분명했다. 페스티벌은 역시 페스티벌이다.
p.128 "요새 누가 오십을 노인이래? 육십도 노인 아니야. 얘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말 쉽게 하네. 너 오십 되고 나서 누가 노인이라 그래 봐. 기분 좋겠니?"
어쩐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잔잔한 영화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단 모두가 지극히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제법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는 점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베테랑 기자이면서 ‘진보적 스탠스’를 고수하고자 노력하는 어머니,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아들(특: 집나감), 화해 도모 식사자리에서 커밍아웃에 국제결혼까지 한 방에 해치우는 딸, 운동권 출신 전직 교수 아버지... 설정만 봐도 멀찍이 떨어져 앉고 싶은 이 가족이 “현실”에서 화목할 가능성이 몇이나 될까.
p.169 딱히 누구 들으란 것도 없이 제각기 통성기도하듯 소리를 질러대는 세 사람이 삼키는 폭탄주에는 서로 다른 또는 같은 성분들이 들어 있었다. 사라진 꿈, 깨진 가족, 오지 않는 기회, 안정에 대한 욕망과 안정에 대한 두려움, 동경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 곧 지나가 버릴 젊음.
p.250 이걸 건너갈 수 있을까. 이걸 메우는 게 가능할까. 당장은 아니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메워질 수 있는 골인가. 갑자기 이 사회에 대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멋대로 전위적인 내용을 기대한 탓일 수도 있고, 전작의 인상을 깊게 간직했기에 다른 작품임을 유념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어쨌든간에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선거 이후의 삶이 남아있으며,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치 구호 뒤에는 사람이 있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폭력이 여전히 힘을 잃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도, 당장 “못배운 놈”이 “집값 떨어트리는 꼴” 보기 싫어 차악을 뽑았다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다.
부디 작가가 긴긴 삶을 멀리멀리 내다보았기를, 그리고 어딘가의 독자들 또한 희망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를, 그리하여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최악이 아닌 미래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p.316 "사람이 어떻게 되면 등뼈가 부러질까요. 자꾸 그 생각이 나요."
p.329 "나는 사람들 상식을 믿어. 부지런히 하루하루 살면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세상이 이상한 데로 가지는 않을 거야."